존 애덤스

존 애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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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735. 10. 30(구력 10. 19), 미국 매사추세츠 브레인트리
사망 1826. 7. 4, 매사추세츠 퀸시
국적 미국

요약 미국의 초대 부통령(1789~97 재임), 제2대 대통령(1797~1801 재임).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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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요
  2. 초기생애
  3. 대륙회의
  4. 독립기의 정치활동
  5. 외교활동
  6. 부통령과 대통령 재임기
  7. 은퇴
애덤스(John Adams)
애덤스(John Adams)

개요

존 애덤스는 젊은시절 정치가·정치이론가로서 미국 독립운동에 참가해 미국 헌법 구성에 영향을 미쳤다.

미국독립전쟁 기간 동안과 그 직후에 외교관으로 활동했다.

초기생애

농부 출신의 도시행정위원이었던 디컨 존 애덤스와 매사추세츠 브레인트리 출신 슈재너 보일스턴의 3명의 아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매사추세츠 퀸시 에있는 애덤스의 고향
매사추세츠 퀸시 에있는 애덤스의 고향

브레인트리에서 소년시절을 보냈고 그곳에서 대학교육을 받았다. 1755년 하버드대학교를 졸업한 뒤 우스터에 있는 제임스 퍼트넘의 사무실에서 법률을 공부했다. 퍼트넘은 세련되고 학식있는 사람으로서 존 애덤스는 그래머스쿨에서 교사로 있는 동안 퍼트넘의 집에서 묵었다. 1758년 보스턴의 변호사 자격증을 가지고 브레인트리로 돌아온 애덤스는 1764년 이웃 웨이머스 지방의 목사 딸 애비게일 스미스와 결혼했다.

그녀의 저명한 가족 연줄 덕분에 존 애덤스는 변호사 생활에서 많은 이득을 얻을 수 있었다. 지적이고 생기넘치며 재치있는 애비게일의 편지들과 애덤스의 거리낌없는 일기들은 당시 뉴잉글랜드 지방의 대중 문화와 그 지방사람들의 예절과 학식에 대한 갈망을 보여주고 있다.

젊은 변호사로서 존 애덤스는 자신의 학식에 대한 자긍심뿐 아니라 출판분야에 대한 야망도 가지고 있었다.

1763년 여러 신문에 기고를 함으로써 "그는 2개의 주요한 보스턴 신문에서 그 자신과 대화를 하고 있다"라는 평판을 얻기도 했다. 당시 매사추세츠 정계에는 '분파'가 형성되기 시작했는데, 변호사계에서 인기를 끌던 제임스 오티스 2세가 영국의 식민지 정책에 반대하는 급진적 세력을 지휘했다. 존 애덤스는 오티스를 오랫동안 존경했으며, 특히 오티스가 보조영장사건(1761) 때 세관원이 특정 증거도 없이 밀수품을 찾기 위해 식민지 주민의 가택을 수색할 수 있도록 허용한 모든 영장은 위헌이라고 주장하면서 식민지 주민의 권리를 옹호하자 더욱 존경심을 느끼게 되었다(식민지보조수색영장). 애덤스는 노년에 이 문제가 영국과의 싸움의 개막을 알리는 하나의 사건이었다고 회상했다.

이런 존 애덤스의 회상은 다분히 극화된 것이지만 이 사건은 그에게 애국적인 대의명분에의 열의를 고무시켰으며, 미국 식민지에서 나오는 출판물과 문서에 인지를 붙일 것을 요구하는 영국의 수입세법, 즉 인지세법을 둘러싸고 이후 4년 동안 계속된 위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해주었다.

존 애덤스는 인지세법과 관련해 반란을 일으키는 것에 반대했지만 식민지 주민들이 이 법에 동의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법은 불법이라고 생각했다.

이 논쟁은 1765년 8월 〈보스턴 가제트 Boston Gazette〉에 발표된 존 애덤스의 유명한 사설들의 주제로 다루어졌으며, 1768년에는 런던에서 〈교회법과 봉건법에 관한 논문 A Dissertation On the Canon and Feudal Law〉으로 재발행되었다. 이 논문에서 애덤스는 인지세법에 대한 뉴잉글랜드 식민지들의 반대는 유럽의 집단적인 권위주의에 대한 신세계의 개인주의적 저항의 일부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1768년 존 애덤스는 가족과 함께 브레인트리에서 보스턴으로 옮겨가 그곳에서 나중에 매사추세츠 주지사가 된 대법원장 토머스 허친슨(1711~80)의 소개로 보스턴 대법원에 들어갔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애덤스는 허치슨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1770년 애덤스는 이른바 보스턴 학살의 살인자로 기소된 영국 군인들의 변호를 맡았다.

유리·납·차·종이·염료에 수입세를 부과하는 타운센드 법을 관철시키기 위해 영국군을 폭동에 투입하여 5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사건이었다. 여론은 이들을 비난하는 분위기였으나 재판에서는 지휘장교와 대부분의 군인들에게 무죄가 선고되었다.

존 애덤스는 1771년 공직 활동에서 좌절을 겪었다.

당시 존 애덤스는 2명의 사무원을 고용해야 할 만큼 변호사업이 확장되었으나, 건강이 나빠져 브레인트리로 돌아가 스태퍼드스프링스에서 요양을 하며, 승마여행을 했다. 건강이 많이 좋아진 애덤스는 1772년 보스턴으로 돌아와 늘어난 가족(1765년에는 딸, 1767년에는 첫아들 존 퀸시가 태어남)의 생계비를 벌기 시작했다. 그러나 애덤스의 개인적 이해관계는 그가 매사추세츠의 하원의원에 선출됨으로써 다시 희생되었다.

대륙회의

1774년 8월 존 애덤스는 최초의 13개 주 식민지 연방의회인 제1차 대륙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매사추세츠 대표단과 함께 필라델피아에 갔다.

존 애덤스의 일기에서는 이 회의의 구성에 대한 보기 드문 통찰력을 찾아볼 수 있는데 대륙회의는 영국과의 타협계획을 짜기보다는 먼저 영국에 대해 불만을 가지는 급진주의자들을 만들어냈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 회의에서 애덤스는 3년의 험난한 기간 동안 솔직하지만 빈틈없는 의원으로 활동했다. 한편 1775년초 애덤스는 〈보스턴 가제트〉에 노뱅글러스라는 필명으로 편지를 발표했는데, 이 편지들은 국왕파 작가인 다니엘 레너드 또는 '매사추세튼시스'가 쓴 편지를 반박하는 것이었다.

전년에 토머스 제퍼슨이 〈요약적 견해 Summary View〉 혁명사상에서 제시한 것과는 달리 노뱅글러스는 항상 지배영역에서 제외되어왔던 식민지들이 제국의회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은 온당하지 못하다는 보다 발전된 단계의 혁명사상을 강조했다.

영국 통치자들과의 개인적 유대는 아직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지만 존 애덤스는 점차 그 관계를 정리해나갔다.

1775년 6월 제2차 대륙회의에서 존 애덤스는 버지니아가 독립에 관련된 정책들을 지지해주기 바라는 마음에서 버지니아 출신의 조지 워싱턴을 유명무실한 군대의 총사령관으로 임명했다. 1년 뒤 애덤스는 "이 연합 식민지는 자유롭고 독립적인 주(州)들이며, 또 마땅히 그렇게 되어야 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라고 한 버지니아의 리처드 헨리 의 결의안을 지지했으며, 1776년 6월 11일에는 독립선언서 기초위원회 위원으로 임명되었다.

토머스 제퍼슨이 주로 기초한 독립선언서는 존 애덤스가 대륙회의에서 행한 발언들을 주로 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한편 애덤스는 델라웨어 주의 존 디킨슨을 비롯한 보다 타협적인 대륙회의 의원들과 논쟁을 벌이면서 경솔하게도 편지에 디킨슨을 '하찮은 천재'라고 썼는데, 나중에 이것이 영국인들에게 넘어가 발행되었다. 우유부단한 의원들에 대한 애덤스의 증오는 새로이 식민지에 도착한 영국인 언론가 토머스 페인에 대한 감정과 뒤섞여 일어났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페인이 쓴 〈상식 Common Sense〉은 애덤스가 1776년에 열렬히 지지했던 독립에의 대의명분을 촉진시켜주었다.

혼란스런 시기에 존 애덤스의 저서 〈정부론 Thoughts On Government〉은 식민지 전역에서 사용할 수 있는 새로운 헌법을 만들고자 했던 몇몇 동료들에 의해 회람되었다.

독립기의 정치활동

1776~78년 존 애덤스는 독립의 대의명분을 장려하는 데 힘썼고, 해군창설위원회와 외무위원회를 비롯한 수많은 대륙회의 위원회에서 일했다.

당시 급진파들은 영국의 옛 적대국인 프랑스를 끌어들임으로써 자신들의 입장을 개선시킬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품기 시작했다. 1777년말 대륙회의에서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프랑스로 파견하는 공동사절로서 존 애덤스와 벤저민 프랭클린을 임명했다. 이 임명은 원래 미국측 사절로 선출되었던 사일러스 의 독립에 대한 충성심이 문제시되었기 때문에 딘의 후임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존 애덤스는 1778년 2월 11세 된 첫째아들 존 퀸시 애덤스를 데리고 대륙횡단 범선을 타고 프랑스로 갔다. 그러나 애덤스가 프랑스에 도착했을 때 프랭클린이 이미 프랑스와의 동맹을 성공적으로 체결했음을 알고 그해말 프랑스에서의 합동 미국위원회가 해체되자 고향으로 돌아왔으며, 프랭클린만이 그곳에 남아 임무를 계속 수행했다.

1779년 여름 미국에 도착한 존 애덤스는 평소 자신이 적절한 통치 기능의 분리라고 생각했던 노선, 즉 "사람에 의해서 움직이는 정부가 아니라 법률에 의해서 움직이는 정부가 되어야 한다"라는 생각에 따라 모든 독립 주의 헌법 가운데 가장 유명한 1780년의 매사추세츠 헌법초안을 기초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애덤스는 스스로 의회정치에 통달했고 자신이 딘의 충성심을 둘러싼 오랜 싸움에서 다소 미심쩍은 수혜자가 되어 있음을 발견했다. 애덤스가 영국과의 상업적인 조약들을 협상하고 평화를 조성하기 위한 위원으로 임명된 사실을 볼 때 의회 내의 그의 친구들은 친프랑스파가 아니라 비공식 외교를 노골적으로 주장하는 사람들이었음이 분명했다.

존 애덤스는 농장경영을 위해 아내를 브레인트리에 남겨두고 첫째아들 존 퀸시와 둘째아들 찰스를 데리고 다시 한 번 길고도 위험한 여행을 떠났다.

그당시 존 애덤스는 의회가 임명한 또 한 사람의 평화협상 판무관인 존 제이, 그리고 프랭클린과 함께 영국과의 마지막 평화협상을 위해 힘썼으며, 네덜란드에서 대륙회의가 몹시 필요로 했던 차관문제를 협상했다. 1785년 미국 최초의 영국 주재 공사(公使)가 되어 가족과 함께 영국으로 갔다.

외교활동

중년의 나이에 존 애덤스는 외교관으로서 활동하기 시작했는데 나중에 그의 아들과 손자 역시 외교 분야에서 명성을 얻었다.

그러나 브레인트리 변호사에서 노련한 유럽 외교사절을 상대하는 외교관으로의 전환은 생각보다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존 애덤스의 오랜 외국생활은 미국의 공공여론이 그를 귀족이 된 '브레인트리 공작'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여지를 주었지만, 이런 중상모략은 기본적으로 정치적인 것이었다. 애덤스는 늘 그래왔듯이 본질적으로는 똑같이 둔감한 뉴잉글랜드 사람이었고, 그가 1778~88년 해외에서 주로 배운 것은 1789년 프랑스 혁명 이전 구체제의 프랑스 정치에 대한 불신과 유럽의 도덕에 대한 불신이었다.

이념도 전적으로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미국으로 돌아오기 1년 전 영국 공사로 있으면서 존 애덤스는 〈미국 헌법에 대한 옹호 Defence of the Constitutions of Government of the United States of America〉(1787)라는 책을 출판했다. 이 저서에서 애덤스는 몇몇 사람이 자신을 '귀족적'이라고 생각했던 것에 착안하여 자신을 강하게 표현했고 공화국이 살아남으려면 '부유하고 집안 좋고 유능한 사람'이 공화국의 상원을 구성해야 한다고 제시했다. 이 책은 최고 수준의 작가들이 정부와 인간본성에 대해 묘사한 것 중 학술적인 것에 속했으나 잘 알려지지 않은 문구들을 잔뜩 인용하고 있다.

이런 모든 과장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적어도 1776년 이래 존 애덤스가 주장해온 이념, 즉 모든 정부기관은 분리되어야 하고 입법부 자체도 양원으로 분리되어야 한다는 사상을 강조한 것에 불과했다. 학문적인 관점에서 볼 때 이 책은 프랑스의 정치철학자 몽테스키외가 영국 정부의 구성방식을 견제와 균형의 원리에 입각한 것으로 이해했던 것에 근거하고 있다.

이 책의 정치적인 명성은 말년에 존 애덤스가 겪은 정치적 어려움의 주요원인이 되었다. 〈미국 헌법에 대한 옹호〉 제1권이 미국에 도착하자, 이 책은 필라델피아 의회 의원들에게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이 책의 귀족주의적 색채에 감정을 상한 선거인들 때문에 애덤스는 1789년 대통령 선거에서 낙선했다. 조지 워싱턴이 선거인 2명당 1명꼴인 69표를 얻은 데 비해 애덤스는 나머지 69표 중 34표를 얻는 데 그쳤다.

그러나 이 득표수는 2번째로 많은 숫자였기 때문에 존 애덤스가 부통령이 되었다.

부통령과 대통령 재임기

추진해야 할 정책을 둘러싸고 일어난 신(新)정부각료들간의 의견 차이는 2개의 정치집단을 형성하게 만들었다.

연방주의자들은 알렉산더 해밀턴이 이끄는 보수적 분파로서 강력한 중앙집권정부를 주장했고, 기업가·지주·상인의 이권을 지지했으며, 토머스 제퍼슨을 필두로 한 민주공화주의자들은 개인의 자유와 연방정부의 제한된 권력을 강조했다(미국연방당, 미국공화당). 존 애덤스는 처음부터 공화국을 위한 신연방계획안의 지지자였으며, 비록 당내의 많은 인사보다 덜 보수적이기는 했지만 결국 그도 연방파의 핵심적인 지도자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더구나 부통령으로서 존 애덤스는 다소 거만하게 자신이 전국민의 요청에 귀를 기울이는 존재라고 생각했다. 나중에는 자신의 농민적 기질로 인해 해밀턴의 정책에 반대했지만, 한때는 자신이 해밀턴 정책의 '대역'이라는 환상을 갖기도 했다. 애덤스의 〈다빌라에 대한 강연 Discourses on Davila〉이 신문에 발표되자 고립된 해밀턴은 이 글이 연방정책안에 대한 평판을 떨어뜨릴지도 모른다고 비판했다.

한편 제퍼슨은 이 글을 세습군주제와 귀족정치를 공포한 것과 다름없다고 생각했다.

이 글이 존 애덤스의 인기를 저하시킨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애덤스는 1789, 1792년의 선거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되는 데 필요한 투표수의 1/2에 해당하는 표를 얻는 데 그쳤다. 상원의장으로서 '비만 각하'(그의 비방자들이 부른 이름)라고 호칭된 애덤스는 연합이 깨졌을 때도 변함없이 연방파였지만 조지 워싱턴 대통령 밑에서의 부통령 시절 8년은 정치적으로 무의미했다.

1796년에 이르러 의회 간부회의에서 존 애덤스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을 때 연방파 내에서 그에 대한 반대세력이 명확히 드러나게 되었다. 애덤스가 제퍼슨보다 조금밖에 표를 더 못 얻은 것은 선거인들 중의 일부가 또다른 연방주의자인 사우스캐롤라이나 주 출신의 토머스 핑크니에게 표를 던졌기 때문이었다. 당시 핑크니는 스페인 공사로서 업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있었으며, 당 지도자들의 총애를 받고 있었다.

그러므로 존 애덤스는 제퍼슨뿐만 아니라 해밀턴과 해밀턴의 추종자들에 대한 깊은 의혹을 품고 대통령 임기를 시작했다. 각료 가운데 몇 명은 조지 워싱턴 집권시절 유능한 재무장관이었고, 당시에는 뉴욕 법조계로 복귀하려고 노력중이던 해밀턴의 조언에 의존하고 있었지만, 애덤스는 1800년까지 워싱턴 때의 내각을 거의 원래대로 유지했다.

그러나 워싱턴의 내각각료들을 그대로 유지시킨 것은 중대한 실수였으며, 이는 존 애덤스가 '파당'의 심각성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애덤스는 자신을 워싱턴에 버금가는 미국 전체의 지도자로서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애덤스 정부는 프랑스의 혁명가들이 유럽에서 새로운 절대권을 만들어내려고 위협하고, 미국에서 자신들의 수많은 찬미자들을 선동했기 때문에 계속적인 위기를 겪었다. 존 애덤스는 프랑스 혁명의 성격이 처음부터 자신이 보아왔던 미국 독립혁명의 성격과 매우 다른 데 놀랐다.

아들 존 퀸시와 함께 존 애덤스는 제퍼슨의 도전에 응했는데, 제퍼슨은 1791년 프랑스 혁명을 변호하는 토머스 페인의 저서 〈인간의 권리 Rights of Man〉를 미국에서 출판할 수 있도록 후원했다. 애덤스는 친프랑스 비평가 제퍼슨 때문에 화를 냈다. 애덤스는 1798년 미국에 오기를 희망하거나 이미 미국에 와 있는 프랑스 혁명가들의 행동을 제한하기 위해 고안한 '외국인규제법과 보안법'을 발안하지는 않았지만 이 법을 비준하는 데 서명했고 이것은 애비게일의 열렬한 찬성을 받았다.

군국주의를 증오하던 존 애덤스는 1799년 프랑스와의 전쟁이 아니라 협상 창구를 열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이 결정은 극단주의자들을 크게 자극했고 많은 극단주의자들이 애덤스를 적으로 여기게 되었다. 애덤스는 그 자신이 인식하고 있던 것보다 훨씬 더 중도적인 연방주의자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애덤스는 자신이 소속되어 있는 연방파보다 개인적으로 대중에게 더 인기가 있었지만, 1800년 재선에 실패했다. 그 이유는 제퍼슨과 에어론 버가 이끄는 야당, 즉 민주공화파의 전략과 애덤스의 대(對)프랑스 회유정책에 대한 보복으로 해밀턴이 마지못해 민주공화파를 지지했기 때문이었다.

1801년 3월 3일 대통령 재임 마지막 날까지 존 애덤스는 버지니아 출신 국무장관인 존 마셜을 대법원장으로 임명하는 등 자신이 추천한 사법제도 개혁법 아래 수많은 재판관을 임명했다. 애덤스는 적어도 사법제도만큼은 연방주의자들의 수중에 남겨놓으려 했으며, 새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을 맞이하지도 않은 채 서둘러 워싱턴을 떠났다.

은퇴

존 애덤스는 정계에서 은퇴한 후 첫째 아들 퀸시와 함께 살면서 '자서전'을 3시기로 나누어 쓰며 활기찬 노년을 보냈다.

혁명에 대해 일관된 생각을 지닌 사람들에게 수많은 편지를 썼고, 〈미국 혁명의……역사 History……of the American Revolution〉에서 잘못된 정보를 독자들에게 전달한 옛 친구 머시 오티스 워런과 이웃들을 용서했으며, 방대한 양의 지식을 축적했고 아들 존 퀸시 애덤스가 외교관으로 성공하고 정치적인 명성을 얻는 것을 지켜보며 기뻐했다. 1818년 애비게일이 죽은 뒤에도 마을을 산책하고 조카들에게 저서를 구술시키며 활동적인 생활을 유지하려고 애썼다.

존 애덤스의 생애 마지막 큰 즐거움은 1825년에 아들이 대통령으로 당선된 일이었다. 애덤스는 공식적인 독립선언을 한 지 50년이 지난 바로 그날 죽었는데, 이날은 토머스 제퍼슨이 죽은 날과 같은 날로 그가 죽은 지 몇 시간 뒤였다. 한때는 친구이며 협력자였다가 정적이 되었던 두 사람은 만년에 다시 화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