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티스

오티스

다른 표기 언어 James Otis
요약 테이블
출생 1725. 2. 5, 미국 매사추세츠 웨스트반스터블
사망 1783. 5. 23, 매사추세츠 앤도버
국적 미국

요약 미국의 정치가.

미국 독립전쟁이 다가오던 시기에 활약했으며, 특히 식민지인들의 역사적 권리를 보장하는 법적 원칙들을 마련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매사추세츠 정계에서 이름이 알려져 있던 대(大)제임스 오티스의 아들로 태어나 플리머스에서 변호사로 일하다가 1750년 보스턴으로 이주했다. 1761년 영국이 식민지 아메리카에 시행하기로 한 일반 수색 영장에 맞섬으로써 유명해졌다.

이 영장은 북아메리카에 무역과 항해에 관한 법률을 보다 엄격히 적용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는 보스턴의 상급법원에서 영국령 아메리카 식민지와 영국정부간의 기본적인 연계를 강조하면서 이러한 영장이 본국의회의 승인을 받은 것이지만 무효라고 주장했다. 그는 영국 헌법의 근본정신을 참고하여 식민지인들에게 기본적 원칙들을 제시했는데 그것은 이후 수십년 동안 많은 논객들에 의해 자주 언급되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이때 그는 뒤에 널리 인용된 "대표 없는 과세는 폭정이다"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1761년 5월 매사추세츠 의회의원이 되었고, 이후 거의 매년 재선되어 활발한 활동을 했다. 1766년 하원의장으로 선출되었지만 매사추세츠 총독의 거부로 취소되었다. 1762년 9월 〈매사추세츠 식민지 의회의 행동에 대한 변호 A Vindication of the Conduct of the House of Representatives of the Province of Massachusetts Bay〉를 펴내, 비록 프랑스 해적으로부터 뉴잉글랜드 어업을 보호하기 위해서 선박을 건조할 경우라도 의회가 승인하지 않으면 의회는 그 비용을 충당할 의무가 없다고 주장했다.

그의 이러한 주장은 당시 총독의 선박건조 비용 요구를 거부하고 있던 의회의 입장을 옹호하는 것이었다. 또한 그는 공동의 대의에 협력할 것을 요청하는 서한을 여러 차례 작성하여 각 식민지에 보냈고, 영국정부에도 식민지인들의 권리와 탄원사항을 존중해줄 것을 요청하는 서신을 보냈다. 자유를 위한 식민지의 운동을 지도하고 통제하는 과정에서 그가 미친 영향력은 널리 인정되었으며, 1769년 이전에 오티스만큼 영국 의회와 언론에서 자주 인용되고, 비판받고, 칭송받기도 한 아메리카인은 별로 없었다. 1765년 그는 뉴욕 시에서 소집된 인지세법 회의에 대표로 파견되었고 영국 하원에 보내는 서한을 준비하는 위원회에서 일하면서 두드러진 활약을 했다. 그러나 이미 약간의 정신이상 증세가 있던 오티스는 1765년 본국 관리와 언쟁중에 머리를 얻어맞은 뒤부터는 일시적으로는 정신이 돌아온 적도 있지만, 정신이상자로 여생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