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셜

마셜

다른 표기 언어 John Marsh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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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755. 9. 24, 버지니아 저먼타운 근처
사망 1835. 7. 6, 필라델피아
국적 미국

요약 미국의 제4대 연방대법원장.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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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청소년기
  2. 초기경력
  3. 연방대법원장 재임기

사법심사 원칙을 비롯한 미국 헌법해석 체계의 주요 기초자였다. 30년 이상의 재직기간중에 마셜이 행한 위대한 첫번째 판결은 '마베리 대 매디슨'(Marbury v. Madison:1803)이었는데, 동 판결은 연방대법원에 무엇이 합헌적 법률인지를 밝히고 선언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는 점을 확인했다.

이러한 권한을 행사함에 있어서 그가 내린 가장 중요한 판결은 '매컬럭 대 메릴랜드'(McCulloch v. Maryland:1819)였는데, 동 판결은 연방의회에 합중국은행(Bank of the United States)을 설립할 수 있는 권한이 있음을 확인했다. 마셜은 재직기간 동안 1,000개 이상의 판결에 참여했으며, 그중 519개의 판결문을 직접 기초했다.

청소년기

존 마셜은 토머스 마셜과 메리 키스 마셜 부부의 15자녀 중 장남이었다. 1759년에 버지니아 주 포키르 군이 된 국경 근처 지역에서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보냈으며, 나중에는 아버지가 블루리지 산악지대에 얻은 광대한 소유지에서 살았다. 그의 교육은 약 1년간 가족과 함께 살았던 순회목사로부터 받은 지도와 웨스트모어랜드 군에 있는 한 사립학교에서 받은 몇 개월의 다소 공식적인 교육을 제외하고는 주로 부모의 노력의 결실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초기경력

영국과의 정치적 논쟁에 뒤이어 1775년에 무력충돌이 발생하자, 마셜은 버지니아 주 긴급소집병 연대에 있던 아버지와 함께 육군 중위로 버지니아에서의 첫번째 전투에 참전했다.

1776년에는 독립군에 가담하여 뉴저지·뉴욕·펜실베이니아 등지에서 3년 동안 워싱턴 휘하에서 복무했는데, 그중에는 포지 계곡에서 보낸 1777~78년의 혹독한 겨울도 포함되어 있었다. 마셜은 1779년 버지니아 군대에서의 복무기간이 끝나자 버지니아로 돌아갔고, 그후 1781년 제대 전까지는 뚜렷한 활동을 보이지 않았다. 마셜의 법조경력은 1780년부터 시작된다.

1780년 초 윌리엄앤드메리대학에서 조지 위스로부터 받은 단기강좌가 그가 받은 유일한 공식적 교육이었다. 그해 8월에 변호사 개업을 허가받았으며, 포키르 군으로 돌아와서 1782, 1784년에 버지니아 하원의원에 선출되었다. 리치먼드에 소재한 의사당에서 의회에 참석하는 한편 그곳에 법률사무소와 가정을 꾸몄는데, 얼마 후인 1783년 1월 메리 앰블러와 결혼했다.

그후 15년 동안 마셜의 이력은 버지니아의 재기있는 변호사로의 성장이라고 특징지울 수 있다.

그는 1787년 필라델피아에서 개최된 제헌회의에 대표자로 파견되지는 못했으나, 하급자임에도 불구하고 헌법안 승인을 둘러싼 치열한 논쟁에서 연방헌법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마셜은 주의원에 선출되었고 주의회는 헌법안 승인을 향한 1단계 조치로서 그 여부를 심의하기 위한 회의를 소집했다. 그는 그 회의의 대표자로 선출되어 주로 사법부 관련조항의 방어를 위해 노력했다. 당시 그는 빠듯한 정족수를 채우는 데 자신의 지명도를 이용함으로써 결국 연방헌법에 대한 버지니아 주의 승인을 얻어냈다.

연방헌법에 따라 새로운 정부가 출범하면서 조지 워싱턴 대통령은 마셜을 버지니아 주 연방법무관으로 임명하려 했으나 마셜은 이를 정중히 거절했다. 그러나 1789년에 그는 연방정부의 지지자로서 버지니아 주하원에서 보다 좋은 조건으로 일하게 되었다. 1790년대에 들어와 노선을 달리한 정당들이 등장·결성됨에 따라, 마셜은 버지니아 주 연방파 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1795년에 워싱턴은 그에게 법무장관직을 제의했으나 그것 역시 마다하고 연방파 지도자로서 주의회로 되돌아왔다.

그의 첫번째 연방 관직은 존 애덤스 대통령이 엘브리지 게리, 찰스 C. 핑크니와 함께 프랑스 정부와의 관계증진을 모색하기 위한 위원회의 일원으로 임명하면서부터 시작되었는데, 그 임무는 실패하고 말았다(XYZ 사건). 그러나 모모 씨로 알려진 몇몇 중개자와 알려지지 않은 몇몇 인물들이 위원들에게 접근하여 먼저 큰 뇌물을 주지 않는다면 프랑스 정부가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고 통지했음을 폭로하는 보고서가 당시에 공개되고, 마셜이 이러한 뇌물의 제공을 거절했음이 보고서를 통해 밝혀지게 되었다.

마셜은 그때부터 유명인사가 되었으며, 그의 일화는 "조국을 지키기 위해서는 수백 만 달러도 아깝지 않으나 공물(貢物)로는 단돈 1센트도 내놓을 수 없다"라는 미국의 초창기 애국표어로 칭송받았다.

프랑스에서 돌아온 후 마셜은 제임스 윌슨 후임으로 연방대법관직을 제의받았으나 거절하고, 워싱턴의 설득으로 연방의원에 출마했다. 그는 1799년 리치먼드 지구에서 연방파 의원으로 선출되었지만 연방하원에서 봉직한 기간은 짧았다. 연방하원에서의 그의 주된 업적은, 영국측이 범죄인인도조약에 따라 공해상(公海上) 의 영국전함에서 발생한 살인행위에 책임있는 선원의 인도를 요구하고 대통령이 이 요구를 들어준 데 대하여 공화파가 대통령을 공격했는데, 마셜이 이를 효과적으로 방어했던 것으로 보인다.

1800년 5월 애덤스 대통령은 육군장관의 사임을 요청하고 그 직위를 마셜에게 제의했으나 거절당했다. 대통령은 다음에는 국무장관을 해임시키고 그 공석을 맡아줄 것을 제안했다.

당시 연방정부는 구성원간의 불화와 다가올 선거에서의 불확실한 전망으로 혼란스러웠으며, 그러한 행정부로 들어오라는 대통령의 제의는 거의 전적으로 마셜의 애국심에 호소한 것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는 잠시 주저하다가 이를 받아들였고 대통령이 몇 개월간 고향인 매사추세츠에 체류해 있는 동안 정부의 주도적인 수뇌가 되었다.

1800년 가을 올리버 엘즈워스 연방대법원장이 신병을 이유로 사임했고, 11월 선거에서 참패한 애덤스는 초대 연방대법원장이었던 존 제이에게 재취임할 것을 권유했으나 거절당했다. 그러자 대통령은 국무장관으로 있던 마셜에게 관심을 돌리고 1801년 1월에 후임 연방대법원장으로 그를 지명했으며, 그해 1월 27일에 연방파 상원이 지명을 승인했다. 2월 4일 마셜은 임명을 수락했으나 대통령의 요청에 따라 애덤스 행정부의 마지막 몇 개월 동안 국무장관으로 계속 활동했다.

연방대법원장 재임기

마셜 법원의 출범과 함께 마셜과 연방대법원에 부여된 첫번째 과제는 통치구조의 전반적인 윤곽을 제시하는 것이었다.

연방헌법이 연방국가 체제를 설정했는지 단일국가 체제를 설정했는지는 19세기초에 합의를 도출해낼 수 있었던 문제가 아니었다. 사법부의 판단만으로 의견차이를 일소할 수는 없었지만, 사법부의 판단은 의견을 모으고 유력하게 만드는 과정에서 일련의 통일되고 권위있는 공평한 원칙들을 만들어낼 수는 있었다. 마셜은 그러한 합의의 핵심을 만들어내는 임무수행에 있어 매우 훌륭하게 대처함으로써 그 자질을 보여주었다.

마셜 스스로는 연방헌법이 요구 내지 규정하고 있는 효과적인 정부에 대해 명백하고 체계적인 관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명쾌하고 설득력있을 뿐 아니라 과감하게 판결했으며, 그것은 그의 사법적 견해에 부족했던 정밀한 분석력을 상쇄시켜주는 이상의 논리적 필연성을 갖게 했다. 마셜은 35년간 법을 집행하는 자리에 있으면서 통일된 헌법이론을 발전시킬 수 있는 기회를 접하게 되었고, 그와 그가 이끈 법원이 이러한 기회를 놓치지 않은 것이 마셜이 이룬 업적의 첫번째 측면이었다.

연방대법원은 마셜이 취임하기 전까지만 해도 영국에서와 마찬가지로 모든 법관이 중요한 사건마다 자신의 의견서를 교환하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었다.

이러한 방식은 법원이 조직화되어 있고 가시적인 현행법 체계를 취급하는 경우에는 효과적일 수도 있지만, 신흥법원이 대부분 논파되지 않은 법체계를 가지고 운영하는 경우에는 모순이나 상반되는 의견이 나오지 않는 대신 그 판결이 일시적이고 임시방편에 그칠 수밖에 없다는 인상을 갖게 했고, 그러한 결과는 법원이나 법원이 해석하는 법률에도 권위를 주지 못했다. 그러나 이러한 관례는 마셜이 취임하면서(직접 제안했을 가능성도 있음) 변화되었다.

그후 몇 년간 연방대법원에서는 단일의견만 나오는 것이 일반규칙이 되었다. 이러한 관례의 변화 하나만으로도 법원을 보다 유력한 기구로 만드는 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법원의 의견이 마셜의 명쾌하고 설득력있는 표현을 통해 전달되면서 법원의 권위 또한 신장되었다.

'마베리 대 매디슨'은 마셜이 내린 최초의 위대한 판결이라 평가되며, 이를 계기로 법원은 연방헌법과 상충된다고 판단되는 연방제정법을 무시하고 헌법을 선언·해석할 수 있는 권한을 확고히 다졌다.

사건의 전말은 다음과 같다. 애덤스 대통령은 임기가 끝나기 얼마 전에 컬럼비아 특별구의 치안판사를 대폭 임명했다. 대통령은 임명장에 서명했고 국무장관을 통해 미합중국 인장이 첨부되었으나, 윌리엄 마베리를 포함하여 몇 명의 임명장이 발송되지 않은 상태였다. 이에 관해서는 토머스 제퍼슨 대통령이 발송을 금지하는 명령을 내렸던 것으로 보고 있다.

마베리는 국무부에 청원을 냈으나 실패하자 신임 국무장관인 제임스 매디슨을 피고로 연방대법원에 직무집행영장의 발급을 구하는 소송을 제기했다. 연방대법원은 사안에 대한 관할권에는 의문의 여지가 있지만 연방의회가 제정법을 통해 그러한 소송은 하급법원이 아니라 연방대법원에서 개시되어야 한다고 권위있게 말했음을 우선 인정했다. 그러나 마셜은 법원을 대변하여 연방헌법 제3조(연방대법원의 제1심 관할권을 제한적으로 열거하고, 그밖의 사건에 관해서는 상소관할권만을 인정)는 이러한 제소를 허용하지 않으며, 따라서 법원은 연방헌법에 배치되는 제정법을 따를 수 없다고 판시했다.

이 판결에 의해 법원은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켰던 권한인 사법심사의 기능과 연방헌법의 법리를 발견·선언하는 기능을 가짐을 확인했다.

일단 사법심사권(위헌법률심사권)이 확립되자 마셜과 법원은 통일된 사법체계 안에서 연방대법원을 그 정점으로 하여 사법심사권의 행사와 전체 연방법률체계의 확정을 보장하는 판결을 계속 내놓았다. '마틴 대 헌터의 차지인'(Martin v. Hunter's Lessee:1816)과 '코언스 대 버지니아'(Cohens v. Virginia:1821)는 연방문제에 관하여 연방대법원에 주법원 판결을 심사하고 파기할 수 있는 권한이 있음을 확인했다.

'매컬럭 대 메릴랜드'는 연방헌법이 연방의회에 부여한 '묵시적 권한'의 법리를 주장했다(본 사안에서 연방의회는 연방헌법에 의해 명시적으로 부여받은 것은 아니었지만, 합중국은행을 설립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고 판시).

'매컬럭 대 메릴랜드' 판결은 사법심사 제도에 부정적 측면뿐만 아니라 긍정적 측면도 있을 수 있음을 잘 보여주었다.

즉 사법심사는 의문시되는 통치행위에 권위있는 정당성을 부여해줄 수 있으며, 이는 금지되거나 권한없는 행위를 제한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측면이다. '플레처 대 펙'(Fletcher v. Peck:1810)과 '다트머스 칼리지 대 우드워드'(Dartmouth College v. Woodward:1819)는 주가 체결한 계약의 불가침성을 확인했다. 또한 '기번스 대 오그던'(Gibbons v. Ogden:1824)은 연방정부에 주간통상(州間通商)을 규제할 수 있는 권한과 규제함에 있어서 주법률을 파기할 수 있는 권한이 있음을 확실히 했다.

그러나 정부활동에 대한 구체적 통제를 중심으로 하는 마셜의 많은 판결들은, 특히 정부의 활동과 통제가 증가하는 후기에 와서는 그리 오래 지속되지 못하게 되었음을 분명히 주목해야 한다. 사법심사가 가장 강력한 반박을 받은 것은 바로 이 분야에서이다.

당시 연방대법원은 매년 1회 개정했고, 개정기간은 일반적으로 7~8주였다(1827년 이후 다소 연장됨). 각 판사는 동시에 순회법원을 지휘했으며, 마셜도 버지니아 주 리치먼드와 노스캐롤라이나 주 롤리 지역을 담당했다. 그는 1807년 리치먼드에서 반역죄로 기소된 아론 전 부통령의 재판에서 주심을 맡아 어떻게든 유죄로 몰고가려는 제퍼슨 대통령의 노력을 허사로 만드는 데 성공했고, 버는 석방되었다.

매년 소송업무에 관여하는 것은 3개월 정도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마셜은 개인생활에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그는 50대 초반에 5권으로 된 〈조지 워싱턴 일대기 Life of George Washington〉(1804~07)를 완성했다. 그는 병약한 아내를 보살폈고, 10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그중 4명은 어릴 때 죽었다.

그는 사람들과 어울리며 술마시고 리치먼드의 동료법관들과 토론하는 것을 즐겼다. 연방대법원장으로 재직한 처음 30년간을 돌이켜볼 때 그의 인생은 대체로 성공적이라고 할 수 있다.

마셜은 76세 되던 1831년 가을에 신장결석을 제거하기 위해 어려운 수술을 받았는데 그 당시는 회복도 빠르고 완전한 듯 보였다. 그러나 그해 성탄절에 찾아 온 아내의 죽음은 큰 충격이었고 그는 그 충격으로부터 쉽사리 헤어나지 못했다. 1835년에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어 7월 6일 필라델피아에서 죽었으며, 리치먼드에 묻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