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머스 허친손

토머스 허친손

다른 표기 언어 허친슨 , Thomas Hutchinson
요약 테이블
출생 1711. 9. 9, 보스턴
사망 1780. 6. 3, 런던
국적 영국

요약 영국령 북아메리카 매사추세츠베이 식민지의 총독(1771~74 재임).

그의 엄중한 조치는 식민지의 불안을 조장하고 궁극적으로 미국 독립전쟁(1775~83)의 계기가 되었다. 부유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난 허친슨은 사업에 투신했다가 보스턴 행정위원회 위원으로 공직생활을 시작했다(1737). 그후 1749년까지 거의 계속해서 매사추세츠베이 총회(General Court) 의원을 지낸 그는 정계에서 꾸준히 승진해 참사회 위원(1749~66), 최고법원장(1760~69), 부총독(1758~71)을 역임했다.

허친슨은 처음에 식민지들의 통합안을 내놓은 올버니 회의(1754)에 참석할 정도로 동료들과 사이 좋게 지냈으나 식민지의 골수 국왕파였던 그는 식민지의 점진적인 독립 움직임에 반발했다. 그의 확신에 따르면 반란정신이란 새뮤얼 애덤스 같은 성미 급한 애국파의 일이었을 뿐이었다. 그는 애덤스에 대해 깊은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다.

보스턴의 여러 사람들은 허친슨이야말로 혐오스러운 인지세법 제정(1765)의 주범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같은 해 군중들은 그의 화려한 보스턴 저택을 불지르고 귀중한 서류와 원고를 대량 파손했다. 여기서 구사일생으로 빠져나와 한이 맺힌 허친슨은 이때부터 점점 서민층을 불신했으며, 식민지에 대한 우위를 강조할 억압적인 법안들을 통과시키라고 영국 의회에 은밀히 조언했다.

1770년 보스턴 학살사건 당시 총독 권한대행이었으며, 영국법을 문자 그대로 통치에 적용하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점점 더 인기를 잃게 되었다. 그는 상하 양원 모두의 충고를 묵살하고 1773년 선적된 수입 차(茶)를 통관허가서도 받기 전에 하역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로써 불만에 찬 사람들이 수입 차를 항구의 바닷물 속에 던져버린 보스턴 차 사건이 발생했다.

긴장이 고조되자 허친슨은 1774년 군인 총독인 토머스 게이지 장군으로 교체되었다. 그는 영국으로 가 조지 3세 및 북아메리카 업무 관계 부서의 자문역을 맡았다. 이때에는 온건책을 조언했다. 그의 저서로는 1764~1828년에 출간된 〈매사추세츠베이 식민지와 주의 역사 History of the Colony and Province of Massachusetts Bay〉(3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