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합중국은행

미합중국은행

다른 표기 언어 Bank of the United States , 美合衆國銀行

요약 1791년에 설립된 과거 미국의 중앙은행.

미합중국은행(Bank of the United States)
미합중국은행(Bank of the United States)

토머스 제퍼슨 대통령의 반대를 무릅쓰고 알렉산더 해밀턴의 강력한 설득으로 의회의 승인을 받아 설립되었다.

중앙은행의 합헌성에 대한 논쟁이 확대됨에 따라 논쟁에서의 찬성파와 반대파는 각각 미국 최초의 정당으로 발전해 찬성파는 연방당을, 반대파는 민주공화당을 결성했다. 그러나 은행권 발행에 대한 반대론이 계속해서 뜨겁게 달아올라 결국 1811년에는 은행의 인가를 갱신하지 못했다. 1816년 은행은 다시 설립되었으나 논쟁과 정당간 대립은 계속되었다. 헨리 클레이와 휘그당은 중앙은행을 열렬히 지지한 반면 앤드루 잭슨과 민주당은 맹렬히 반대했다.

첫번째 설립되었던 은행은 해밀턴의 재정정책의 초석이 되었다.

그는 중앙은행을 설치함으로써 혁명기에 발행했던 공채의 상환자금을 마련하고 국내 통화발행을 안정시키며 국민들에게 편리한 교환수단을 제공하고자 했다. 이 은행의 자본금은 1,000만 달러에 달했는데, 전액이 거의 순식간에 모아졌다. 연방정부는 20%를 출자해 가장 큰 지분을 차지했으며 유럽인들도 상당량의 주식을 매입했다. 합중국은행은 해밀턴이 바라던 목표를 달성했을 뿐 아니라, 몇몇 주에서는 인가받은 사설은행들을 통제하는 등 예상 못한 역할까지 수행했다.

당시엔 예금업무보다 은행권 발행이 더 두드러진 은행업무였다. 은행권은 은행이 고객에게 대부하는 화폐로서 유통되었으며 총통화유통량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당시 미국은 갓 독립한 신생국으로서 급속한 성장이 이루어짐에 따라 강력한 대출수요가 발생했으며 과잉신용팽창을 초래했다. 그 결과 신용의 과잉확대를 억제하는 것이 일반의 관심사가 되었고, 자동적으로 합중국은행이 그 임무를 떠맡았다.

주요항구와 상업 중심지에 관공서를 둔 정부는 합중국은행에 돈을 보관했기 때문에 합중국은행은 항상 세무서에서 사설은행이 발행한 지폐를 받았다. 정부에 지불해야 하는 돈은 사설은행에서 발행한 지폐를 썼다. 합중국은행은 사설은행권을 받자마자 발권은행에게 금이나 은으로 태환해주어야 했다. 따라서 자동적으로 과잉신용대출이 억제되고 인플레이션도 방지할 수 있었다. 반대로 공황이나 디플레이션 때에는 압력을 늦출 수 있었다.

이 은행은 뒤에 중앙은행이 행한 것과 똑같은 기능을 이미 이때에 수행하고 있었다.

합중국은행은 성공적으로 그 역할을 수행했지만 정당간 세력균형이 바뀌어 반대파가 강화됨에 따라 정치적 반대에 부딪혔다. 긍정적으로 볼 경우 이 반대는 합중국은행이 각 주의 사설은행을 규제한다는 데 근거를 두고 있었다. 그들은 이와 같은 규제가 주의 권리를 무시하는 것이며 따라서 연방정부가 그 은행을 승인하는 것은 위헌이라고 주장했다.

1811년 마침내 20년간의 설립허가 기한이 만료되었지만 설립허가 갱신은 정치적으로 불가능하게 되었다. 합중국은행의 임원들은 현실을 인식하고 뉴욕 주의 설립허가를 받아 사설은행으로 전환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후 몇 년 간의 경제발전 속에서 주은행들간의 혼란이 계속되고 의회의 구성이 변화됨에 따라 새로운 합중국은행이 설립되었다. 새 은행은 이전보다 더 폭넓은 권한을 지녔으며 정부와의 관계도 보다 밀접해졌다. 초기에는 운영상의 잘못도 있었지만 1823년 필라델피아의 니콜라스 비들이 은행장으로 취임하면서 번영하기 시작했다.

비들의 지휘 아래 중앙은행으로서의 책임을 인식하게 되었으며, 나아가 당시 영국의 잉글랜드은행만큼, 어쩌면 그보다 더 강한 책임의식으로 발전시켰다. 그러나 이러한 책임감은 사설은행에 대한 규제로 나타나기 일쑤였고, 사설은행은 이와 같은 규제를 탄압이라고 불평하면서 반대했다.

산업 및 교통수단의 발달이 가속화되면서 미국은 더욱 풍부한 자원을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동시에 기업가들은 민주주의 사상을 자유기업제도와 자유방임사상으로 해석하기 시작했다. 따라서 대출억제를 권장하도록 만든 바로 그 조건들이 오히려 대출억제를 부당한 것으로 만들었다. 한편 이 시기에는 남부와 중부를 중심으로 전지역의 빈민들 사이에 '농업인민주의'가 전개되고 있었다. 농업인민주의는 민주주의를 특권·귀족주의·부 등에 반대하는 것이라고 파악했다. 합중국은행은 '괴물'로 불리면서 일반국민들의 적이 되었다.

이처럼 각각 위상과 입장이 상이한 집단들이 1829년 대통령으로 취임한 앤드루 잭슨의 지도 아래 합중국은행 반대세력으로 뭉쳤다. 합중국은행에 대한 잭슨의 공격은 계속 다양한 형태로 전개되었으며 많은 지지를 받았다. 즉 이보다 10년 전 매컬럭 대 메릴랜드 사건에서 대법원이 묵시적 권한이라는 원칙에 따라 합중국은행 설립을 합헌이라고 판결내린 바 있었으나, 이후에도 그 합헌성에 대한 공격은 계속 이어졌다.

1831년부터 상원에서 휘그당을 이끌었던 헨리 클레이는 잭슨의 민주당에 반대하면서 합중국은행을 옹호했다.

그는 또 1832년 합중국은행의 설립허가 종료시한을 4년이나 앞두고 허가갱신 문제를 제기했는데, 이 문제는 7월 3일 의회에서 채택되었으며 이로써 클레이는 대통령 선거유세에 의도적으로 은행문제를 포함시켰다. 잭슨은 즉시 은행허가갱신법안이 위헌이라고 주장하면서 거부권을 행사하고 대법원 판결을 무시했다. 그는 공무원은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자기 자신이 이해하는 대로 신념에 따라 헌법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잭슨은 선동적인 거부교서에서 합중국은행을 "다수를 희생시키면서 소수를 전진시키기 위해 정부가 항복한 꼴"이라고 묘사했다.

합중국은행 문제는 1832년 선거전에서 가장 큰 쟁점으로 부각되었는데 이를 통해 잭슨은 결정적으로 클레이에게 승리를 거두었다. 은행연장법은 거부되었지만 아직도 합중국은행의 활동기한은 4년이나 남아 있었다. 그래서 잭슨은 정부출자금을 회수해 은행을 미리 폐지하기로 결정했다.

잭슨은 2차례의 내각 개편을 거쳐 R. B. 토니를 재무장관으로 임명했다. 그는 법무장관 시절 적법한 조처를 취할 것을 선언했던 인물로서 재무장관이 된 뒤 합중국은행으로부터 정부예금을 회수해 주정부의 인가를 받은 여러 사설금융기관에 예치시켰다. 이 기관들은 곧 '애완은행'(pet bank)이라 불리게 되었다. 합중국은행은 1836년 설립허가가 끝날 때까지 최선을 다해 맡은 역할을 수행한 뒤 주의 인가를 받아 미합중국 펜실베이니아은행이 되었다. 이 길고 격렬했던 사건은 '은행전쟁'이라고 불린다.

잭슨의 승리는 거의 80년간 지속되었으나, 마침내 1913년에 '연방준비제도'가 창설됨으로써 미국의 사설은행들을 효과적으로 규제할 수 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