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니

토니

다른 표기 언어 Roger Brooke Taney
요약 테이블
출생 1777. 3. 17, 미국 메릴랜드 캘버트
사망 1864. 10. 12, 워싱턴 D. C.
국적 미국

요약 미국의 제5대 연방대법원장.

목차

접기
  1. 개요
  2. 초기생애
  3. 미국은행 반대 투쟁
  4. 드레드 스콧 판결

개요

주로 드레드 스콧 판결(1857)로 알려져 있다.

초기생애

마이클 토니와 모니카 (브룩) 토니의 아들로서, 영국 혈통인 아버지는 프랑스에서 교육을 받았고, 메릴랜드 주 캘버트 군에서 담배재배로 재산을 모았다.

로저는 1795년 펜실베이니아 주에 있는 디킨슨대학을 졸업한 뒤 메릴랜드 주총회의 제러마이어 체이스 판사 밑에서 법률을 공부했다. 1799년 아나폴리스에서 변호사 자격을 얻었고, 1년 동안 메릴랜드 주의회 하원에서 일한 뒤 메릴랜드 주 프레더릭에 정착해 변호사로 개업했다. 1806년 앤 키와 결혼했는데, 미국 국가 〈성조기여 영원하라〉를 작사한 프랜시스 스콧 가 그의 처남이다.

보수적이고 사유재산을 중시하는 연방파 소속이었지만 1812년 연방파가 영국에 대한 선전 포고에 반대하자 거기에서 탈퇴했다.

1816년 메릴랜드 주의회 하원으로 돌아왔고, 같은 해에 무소속 정치가로서 주의회 상원의원으로 선출되었다. 1821년 임기가 끝난 지 2년 뒤 가족과 함께 볼티모어로 이사해 곧 뛰어난 변호사로 인정받게 되었다. 배심원들은 그의 공정성과 반대측 변호인에 대한 예의바른 태도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1827년 메릴랜드 주 법무장관에 임명되었다. 이무렵 그는 이미 민주당 당수인 앤드루 잭슨과 손을 잡고 있었다. 1828년 대통령선거에서 승리한 잭슨은 1831년 내각을 개편할 때 토니를 연방정부의 법무장관으로 임명했다.

미국은행 반대 투쟁

워싱턴에 있는 동안 토니는 민주당의 미국은행 반대 투쟁을 이끌었다.

중앙은행인 미국은행은 당시 동부의 경제적 이익을 위한 도구로 널리 간주되고 있었다. 토니는 미국은행이 권한을 남용했다고 믿었기 때문에 미국은행의 특허를 경신하는 의회 법안을 거부하도록 대통령에게 강력히 건의했으며, 대통령의 거부안도 직접 작성했다. 그는 또한 정부기금을 미국은행에서 인출해 여러 주은행에 나누어 예치할 것을 권유했다.

토니는 미국은행 반대 투쟁에서 보인 이러한 활동으로 전국적인 인물이 되었고, 1833년 잭슨 대통령은 그를 재무장관에 임명했다.

그러나 토니와 그의 재정계획에 대한 반대가 너무 강력했기 때문에 상원은 1834년 6월 그의 인준을 거부했다. 대통령이 지명한 각료를 의회가 거부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토니는 볼티모어로 돌아와 다시 변호사를 개업했다. 1년 뒤 잭슨 대통령은 그를 연방대법원의 판사로 지명했다. 토니의 적들은 핑계를 대어 그에 대한 인준을 지연시켰다. 1835년 7월 6일 존 마셜 대법원장이 죽자 토니는 대법원장으로 지명되었다.

헨리 클레이, 존 C. 컬훈, 다니엘 웹스터 등의 정치가들이 토니의 임명에 강력히 반대했지만 토니는 결국 1836년 3월 대법원장으로 선서를 했다.

비록 그가 남부 귀족의 보수적 전통을 물려받았고 각 주의 권리를 지지했지만, 토니의 대법원은 연방이 주보다 우월하다는 존 마셜의 견해를 버리지 않았다(→ 주권). 토니는 권력분립에 대한 필요성을 확고히 믿었지만 그것이 어떤 식으로 되어야 하는가를 결정하는 것은 대법원의 역할이라고 믿었다.

결국에는 토니의 임명을 반대한 사람들도 대부분 그를 존경하게 되었다(→ 미국연방헌법).

토니를 유명하게 만든 가장 중요한 대법원 판결 가운데 하나는 설립 특허가 부여한 권리에 관한 판결이었다. '찰스리버교량회사 대 워런교량회사 판결'(1837)에서, 대법원은 특허장에 구체적으로 명시하지 않은 권리를 서류의 표현에서 추론할 수는 없다고 하는 다수 의견을 내놓았다.

이 판결에서 토니는 이미 주의회에서 설립 특허를 받은 교량회사가 있는데 주의회가 다른 교량회사에 또 특허를 내준 것은 최초의 특허를 손상시킨 행위라는 교량회사의 주장을 기각했다.

드레드 스콧 판결

토니는 1857년 3월 6일 '드레드 스콧 판결'에서 대법원 판사의 다수 의견에 따른 판결문을 낭독했는데, 그는 이 판결문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이 판결문의 요지는 스콧은 노예이고 시민이 아니므로 연방법원에 소송을 제기할 자격이 없다는 것이다. 토니는 또한 의회는 준주에서 노예제를 금지할 권한이 없고 흑인은 미국 시민이 될 수 없다는 의견을 덧붙였는데, 이 의견은 북부 언론의 호된 비판을 받았다. 드레드 스콧 판결은 아마 미국 역사상 가장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킨 법률적 견해일 것이다. 이 판결은 미국 전역의 정치권을 격렬하게 분열시키는 쟁점이 되었고, 대법원의 위신마저 실추시켰다.

그러나 주정부 당국이 연방정부의 권한 행사를 위협하거나 방해할 때마다 토니는 연방의 우위를 지지했다.

'에이블맨 대 부스 판결'(1858)에서 "주(이 경우에는 위스콘신 주법원)는 연방법원의 소송 절차를 방해할 권한이 없다"는 토니의 의견은 지금도 헌법상의 연방주의에 대한 최고 의견으로 남아 있다. 토니가 대법원장으로 재직하는 동안 연방의 사법권은 기업에까지 확대되었고, 연방정부는 외교관계에 대하여 최고의 배타적인 권한을 갖는다고 주장되었으며, 미국 내 재산과 영토에 대한 의회의 권한은 적극적인 지지를 받았다.

링컨 대통령이 전시에 시민의 인신 보호 영장 청구권을 보류한 것을 둘러싸고 토니는 대통령과 충돌했다. 이때문에 그는 신랄한 비판 대상이 되었지만, 결국 많은 법률가들이 헌법이 보장한 개인의 권리를 옹호하는 토니의 견해에 동의하게 되었다(, 미국법).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토니는 노예제를 악으로 생각했다.

그는 대법원장에 취임하기 전에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노예들을 모두 해방했다. 그러나 노예제는 점진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이고, 특히 그 제도가 존재하는 주가 자체적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신념이었다. 남부의 지지자로서, 자신의 주장이 패배하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는 1864년 10월 워싱턴 D. C.에서 죽었다. 그의 생각은 당시의 지배적인 조류를 거스르는 것이었지만, 그는 미국 헌법의 본질과 발전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