잭슨

잭슨

다른 표기 언어 Andrew Jackson 동의어 앤드류 잭슨, 제 7대 미국 대통령, 7th President of the United States, 늙은 호두, Old Hickory
요약 테이블
출생 1767. 3. 15,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 웩스호
사망 1845. 6. 8, 테네시 내슈빌 근처 허미티지
국적 미국

요약 애팔래치아 산맥 서쪽 출신으로서는 처음으로 대통령이 되었으며, 또한 일부 유권자들에게 직접 지지를 호소해 대통령직에 오른 최초의 인물이다. 그의 정치적 운동은 이후 잭슨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1828년 선거는 일반적으로 미국 정치사에서 하나의 전환점으로 간주되는 사건이다. 즉, 입후보시킨 추진력과 선거운동 조직의 주도력이 모두 서부지역에서 나왔다는 사실이 큰 의미를 지닌다. 잭슨의 승리는 정치 권력의 중심이 서쪽으로 이동하는 것을 시사했다. 그는 또한 일반대중 유권자들에게 직접 지지를 호소해 당선된 최초의 대통령으로, 모든 성인남자에게 보통선거권을 부여하기 시작한 당시 흐름의 도움을 받았다. 보다 폭넓은 정치 민주화를 향한 이러한 추세는 전통적인 정치조직들의 위력을 약화시켰고, 유권자 대중에게 직접 호소하는 데 능숙한 새로운 정치지도자들이 부상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했다.

목차

접기
  1. 개요
  2. 초기생애
  3. 테네시 정계
  4. 군사적 업적
  5. 대통령직으로 향한 길
  6. 잭슨 민주주의
  7. 첫 임기
  8. 1832년의 재선거
  9. 영향
앤드류 잭슨 (Andrew Jackson)
앤드류 잭슨 (Andrew Jackson)

개요

애팔래치아 산맥 이서(以西) 출신으로서는 처음으로 대통령이 되었으며, 또한 일부 유권자들에게 직접 지지를 호소해 대통령직에 오른 최초의 인물이다.

그의 정치적 운동은 이후 잭슨 민주주의(Jacksonian Democracy)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초기생애

잭슨은 캐롤라이나 서부 변경지역에서 출생했다.

그의 출생지는 사우스캐롤라이나 주와 노스캐롤라이나 주 사이에 영유권 시비가 있던 곳인데 이들 2개 주는 저마다 잭슨이 자기 주 출신이라고 주장해왔다. 잭슨 자신은 사우스캐롤라이나에서 태어났다는 말을 했고, 여러 가지 증거로 볼 때 이 말이 사실인 것 같다. 잭슨의 출생지역에서는 정규교육을 받기 어려웠고, 학교교육이라는 것도 1780~81년 서부 캐롤라이나에 영국군이 침공함으로써 중단되었다. 1781년 그는 영국군에 붙잡혀 감금된 직후 영국군 장교의 군화 닦기를 거부했는데 이때문에 기병도(騎兵刀)를 맞아 얼굴에 상처를 입었다.

어머니와 두 형은 전쟁이 끝나는 해에 죽었는데 이는 영국군의 캐롤라이나 침공과 직접·간접으로 관련되어 있다. 이러한 비극적인 경험으로 잭슨은 평생토록 영국에 대한 적대감을 간직하게 되었다. 미국 독립전쟁이 끝난 뒤 노스캐롤라이나 주 솔즈베리에 있는 한 법률사무소에서 법학을 공부했으며 1787년 노스캐롤라이나에서 변호사 자격을 얻었다. 이듬해에는 노스캐롤라이나 서부지구 지방검사로 컴벌랜드 지역에 파견되었다.

이 지역은 애팔래치아 서부지역으로 곧 테네시 주가 되었다.

잭슨이 내슈빌에 도착했을 때 그곳은 아직 변경정착촌에 불과했다. 지방검사로서 그는 주로 채무 징수에 관한 소송업무를 담당했다. 이같은 소송에서 큰 성공을 거둠에 따라 개인 변호사사무실을 운영했으며 토지소유자 및 채권자들과 교분을 맺었는데, 이후 그는 거의 30년 동안 테네시 정계에서 이들과 결속했다.

그는 존 대령의 집에서 하숙을 했으며 거기서 도넬슨 대령의 딸 레이첼 로바즈 부인과 만나 결혼했다.

테네시 정계

그는 공적인 활동과 정치에 대해 큰 관심을 갖고 있었다.

내슈빌에 정부관리로 임명되어 파견된 그는 1796년 신생 테네시 주의 주헌법 기초위원회 위원이 되었으며, 이듬해에는 테네시 주를 대표하는 최초의 연방 하원의원에 당선되었다. 하원의원 재출마를 거부하고 1797년 3월 4일까지만 재임했으며, 다시는 공직에 종사하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테네시 주로 돌아왔으나 그해말 연방 상원의원에 선출되었다. 당시 그는 테네시 주에 대한 주도권을 다투던 두 정치세력 가운데 한 정파의 인정받는 지도자로 부상했으므로 기꺼이 상원의원직을 맡았다.

상원의원으로 평범하게 1년을 보내다가 1798년 사임했는데 개인적인 재정적 어려움이 사퇴의 직접적인 원인이었으나, 중앙 정치무대에서의 불안감과 가족과 떨어져 생활하는 데 불편을 느낀 점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내슈빌로 돌아온 직후 주 상급재판소(사실상 대법원) 판사에 임명되어 1804년까지 재직했으나 금전적 어려움으로 또다시 공직에서 물러났다.

1802년 테네시 주의 민병대 소장으로 선출되었으며 1812년전쟁때까지 이 직책을 맡았다. 1812년의 미·영전쟁은 그에게 있어서 지휘관과 전쟁영웅으로서의 이름을 떨치게 한 계기가 되었다.

군사적 업적

영국과의 전쟁이 임박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던 1812년 3월 잭슨은 캐나다 침공에 대비해 5만 명의 자원병 모집령을 내렸다(1812년전쟁, 크리크 인디언 전쟁). 그해 6월 전쟁이 선포되자 그는 자신의 민병대 병력이 참전할 것을 정부측에 제의했으나 정부는 이 제의에 소극적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마침내 잭슨은 지휘권을 얻어, 당시 영국군과 제휴해 남부 변경지역을 위협하던 크리크 인디언들과 맞서 싸우게 되었다. 1813~14년 약 5개월간의 작전에서 그의 부대는 크리크 인디언들을 격파하고 앨라배마의 토호페카 전투에서 최종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이 승리로 크리크 인디언들이 다시는 변경지역에 출몰할 수 없게 되었으며 잭슨은 서부의 영웅으로 명성이 높아졌다.

1814년 8월 부대를 남부 모빌로 이동시켰다.

특별한 명령을 받지는 않았으나 잭슨은 펜서콜라에 있는 스페인 진지를 목표로 하고 있었다(웨스트플로리다 분쟁). 그가 의도한 바는 당시 스페인 영토인 플로리다를 미국이 차지하기 위해 발판을 마련하고자 한 것이었다. 이러한 대담한 행동을 스스로 정당화한 근거는 스페인과 영국이 유럽의 전쟁에서 동맹관계에 있다는 점이었다. 모빌에 당도한 잭슨은 영국 정규군 병력이 펜서콜라에 상륙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11월 첫째 주 그는 플로리다로 부대를 이끌고 들어갔으며, 7일에 영국군이 해상을 통해 루이지애나로 이동하자 잭슨의 부대는 펜서콜라를 점령했다.

이윽고 그의 군대는 육로를 통해 뉴올리언스로 향했으며 12월초 그곳에 도착했다. 양측의 분견대 사이에 몇 차례 소규모 접전이 일어나다가 1815년 1월 8일 마침내 대규모 전투가 벌어졌다. 이 전투에서 잭슨의 병력은 영국군에게 결정적인 패배를 안겨주고 영국군을 퇴각하게 만들었다. 승전소식이 워싱턴에 전해졌을 당시에는 미국측의 사기가 가라앉아 있던 때였다.

뉴 올리언스의 전투(The Battle of New Orleans )
뉴 올리언스의 전투(The Battle of New Orleans )

며칠 후 미국과 영국 사이에 평화협정이 1814년 12월 24일 겐트에서 체결되었다는 소식이 워싱턴에 전해졌다. 이 2가지 소식은 미국민들에게 기쁨과 안도를 가져다주었으며, 또한 잭슨을 서부에 국한되지 않은 사실상의 전국적 영웅으로 만들었다.

전쟁이 끝난 후 잭슨은 남부지구 사령관에 임명되었으나 지휘권을 부하들에게 위임하고 내슈빌 근처 허미티지에 있는 집으로 돌아갔다. 그러던 중 1817년 12월말 국경지역에서의 불안이 심각해지자 현직 복귀명령을 받았다. 그에게 내려진 지시는 모호한 내용이었으나 잭슨은 지휘권을 다시 인수한 직후 플로리다 침공을 명령했다.

그리고 스페인 진지 2개소를 점령하고 부하 가운데 한 사람을 플로리다 군정관에 임명했다. 잭슨의 이러한 대담한 조치들은 스페인측으로부터 즉각 거센 항의를 불러일으켰으며, 또한 수도 워싱턴에서는 내각을 위기상황에 처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국무장관 존 퀸시 애덤스가 잭슨을 적극 옹호하고 나서 그에게 가해지는 비난을 막아주었으며, 미국의 플로리다 획득을 촉진시켰다.

대통령직으로 향한 길

이러한 눈부신 전승(戰勝)으로 대통령 후보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엿보였으나 정작 잭슨 자신은 대통령직에 관심이 없다고 주장했으며, 워싱턴 정계 지도자들도 그에 대한 지지 열기가 일시적인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잭슨에 대한 계속된 인기로 인해 그를 대통령으로 만들고자 하는 운동은 지속되었으며 내슈빌에 있는 그의 지지세력들에 의해 조심스럽게 확산되어갔다. 내슈빌의 지지자들은 잭슨 장군에 대한 부하로서의 헌신을 고도의 정치적 기술과 결합시켰던 사람들이다. 1822년 이들은 테네시 주 의회를 교묘히 움직여 잭슨을 대통령 후보로 지명하도록 만들었다. 또한 이들은 이듬해 주의회를 설득해 잭슨을 연방 상원의원으로 선출했는데, 이는 테네시 주에서 잭슨이 누리는 인기를 과시하고자 하는 의도에서였다.

1824년 대통령 선거에서 선거인단 투표는 4명의 후보를 놓고 치러졌다.

잭슨을 비롯해 존 퀸시 애덤스, 윌리엄 H. 크로퍼드, 헨리 클레이가 후보로 나섰는데 그 가운데 잭슨이 최다 득표를 했다. 그러나 과반수 득표자가 없자 하원은 다수득표자 3명 가운데서 한 사람을 대통령으로 선출해야 했다. 크로퍼드가 중환을 앓고 있었기 때문에 선거전은 사실상 잭슨과 애덤스의 싸움이었다. 하원의장인 클레이는 선거결과를 판가름하는 데 결정적인 위치에 있었다. 결국 애덤스가 1차 투표에서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애덤스가 당선된 후 국무장관에 클레이를 임명하자, 잭슨의 지지자들은 이를 애덤스와 클레이 사이에 '더러운 거래'가 있었다는 소문을 입증해주는 것이라고 여겼다. 지지세력들은 잭슨에게 국민들의 의사가 음모에 의해 좌절당한 것이라고 납득시켰으며, 이에 따라 잭슨은 1828년 재출마함으로써 자신과 지지자들의 정당함을 입증하고자 결심했다.

잭슨은 선거인단 투표에서 178 대 83이라는 표차로 애덤스를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는데, 이 선거의 유세과정은 미국 대통령선거 역사상 한 개인의 품성과 중상모략이 가장 크게 작용한 선거였다. 그러나 잭슨에게 승리의 영광은 곧 개인적인 비극에 압도되었다. 1828년 12월 22일 아내가 허미티지에서 죽은 것이다.

잭슨 민주주의

1828년 선거는 일반적으로 미국 정치사에서 하나의 전환점으로 간주되는 사건이다(미국 개척). 잭슨은 애팔래치아 산맥 서부지역 출신으로는 최초로 대통령이 되었으며, 이와 함께 그를 입후보시킨 추진력과 선거운동 조직의 주도력이 모두 서부지역에서 나왔다는 사실이 큰 의미를 지닌다.

잭슨의 승리는 정치 권력의 중심이 서쪽으로 이동하는 것을 시사했다. 그는 또한 잘 알려진 정치조직의 지지를 통해서보다는 일반대중 유권자들에게 직접 지지를 호소해 당선된 최초의 대통령이었다. 그의 승리는 동시대인들과 역사가들에 의해 민주주의 정치의 승리로 간주되었다. 잭슨은 당시 성장하고 있던 민주주의의 정서로 덕을 본 인물이다. 그 무렵 연방에 가입한 신생 6개 주 가운데 5개 주가 기존의 여러 주들이 선거권을 확대하는 법을 제정한 것에 보조를 맞춰 모든 성인남자에게 보통선거권을 부여했다.

보다 폭넓은 정치 민주화를 향한 이러한 추세는 전통적인 정치조직들의 위력을 약화시켰고, 유권자 대중에게 직접 호소하는 데 능숙한 새로운 정치지도자들이 부상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했다. 사실 잭슨은 30년 동안 테네시 정계에서 보수파와 손잡았으며 1819년 이후 서부지역을 휩쓴 금융위기 때는 채권자 구제를 위한 입법에 적극 반대한 일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잭슨의 선거조직이 대통령선거에서 거둔 놀라운 승리는 이 조직이 잭슨을 민주주의의 화신으로 대중에게 인식시키는 데 성공했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다.

잭슨의 당선이 미국의 정치무대에서 새로운 세력의 등장을 나타내듯이 잭슨 자신은 대통령으로서의 새로운 개인적 자질을 보여주었으며, 이같은 자질은 이후 19세기 나머지 기간에 대통령 후보의 됨됨이를 판단하는 하나의 기준이 되었다. 그는 또 조지 워싱턴 이래 공직생활 경력이 일천하고 외교정책 입안이나 수행의 경험이 전혀 없었던 최초의 대통령이었다.

의회에서 잠시 활동한 경험은 관세문제를 제외한 여타 문제들에서 자신의 입장을 펼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는 일상의 문제에 접근하는 방식대로 대통령직 수행에 따른 문제들을 다루어 나갔다. 발생하는 문제마다 그때 그때 대처해 나갔으며, 군 지휘관으로서 그의 통솔력을 특징 지웠던 요소들인 정열과 결단력을 백악관에서 똑같이 발휘했다. 자신이 행정부의 주인이 될 것이라는 점을 처음부터 분명히 했으며 때로는 너무나 의지가 굳고 과단성이 넘쳐 정적들은 그를 일컬어 '국왕 앤드루 1세'라고 불렀다.

첫 임기

1829년 3월 4일 잭슨이 대통령에 취임하자 미국은 4반세기를 넘는 동안 처음으로 새로운 대통령의 출현으로 인한 전임 대통령과의 단절을 겪게 되었다.

잭슨의 대통령 당선을 위해 힘썼던 수백여 명의 인사들은 현직 관료들이 신임대통령의 친구들로 교체될 것과 몇 주 안에 잭슨 지지세력들의 관직진출을 위해 반대파 제거 작업이 시작될 것으로 기대했다. 수년 후 연방상원에서 뉴욕 주 출신 윌리엄 L. 마시 의원은 '관직은 승리자의 몫'이라는 격언을 인용하며 '관직 순환'의 원칙을 주장했다. 그러나 잭슨은 관직이동을 실시하지 않았으며 이같은 관행을 비난받을 만큼 폭넓게 적용하지 않았다. 8년간 대통령직에 있으면서 잭슨이 교체한 관리의 수는 전체의 1/5이 채 못 되었다.

대통령직에 올랐을 때 그의 건강상태는 좋지 못했기 때문에 그가 재선에 나설 힘이나 의향을 갖고 있으리라고 믿은 사람은 거의 없었다.

따라서 그의 집권초기부터 후임자 문제가 관심사항이 되었다. 유력한 후보자 가운데 한 명은 잭슨과 같은 사우스캐롤라이나 출신인 존 C. 컬훈 부통령이었으며, 또 다른 후보는 잭슨 정부의 초대 국무장관 마틴 밴 뷰런이었다. 새로 출범한 정부는 시작부터 이 두 사람 사이의 대립으로 그 조화에 균열이 생겨났다.

1830년 잭슨은, 지난 1818년 내각에서 토론이 벌어졌을 때 컬훈이 플로리다를 침공한 잭슨을 비난받아 마땅하다고 주장했던 사실을 알아내고는 더이상 컬훈을 신뢰할 수 없다고 결론지었다. 그 이후로 밴 뷰런은 차기 대통령이 될 가능성이 높은 인물로 여겨졌다. 1830년 고율의 보호관세에 반대하는 사우스캐롤라이나 주의 입장을 컬훈이 공개적으로 옹호하고 나서자 잭슨과 컬훈의 불화는 심각성을 띠게 되었다. 사우스캐롤라이나 주민들의 감정은 매우 격화되어 있었으며 사우스캐롤라이나 주정부는 주경계 내에서 관세징수의 방해를 시도할 수도 있다는 위협을 은근히 내보이기까지 했다.

관세 문제는 이후 미해결 상태로 남아 있다가 1832년 의회 지도자들이 관세율을 소폭 인하하는 선에서 절충을 시도했다. 그러나 사우스캐롤라이나 주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1828년과 1832년에 발효된 관세법을 무효라고 선언했으며, 1833년 2월 1일 이후로 주경계 내에서의 이 2가지 관세법의 강행을 금지하는 것을 내용으로 한 결의안을 채택했다(연방법 거부론). 잭슨은 관세를 무효로 선언한 논리를 공박하면서 관세법의 시행을 위해 사우스캐롤라이나에 대한 군대파견을 연병의회에 요청했다.

그러나 잭슨도 관세율이 너무 높다고 생각했으며 수개월 전 의회가 통과시킨 관세율을 인하하도록 의회에 촉구했다. 1833년 3월 1일 의회는 잭슨에게 2건의 법안을 제출했다(주권, 1833년의 타협). 그 하나는 여러 가지 품목에 걸쳐 관세를 인하하는 내용이었으며, 나머지 하나는 연방법의 시행을 위해 대통령이 군대를 동원할 수 있도록 한 이른바 강제법(Force Bill)이라는 법안이었다.

사우스캐롤라이나 주는 관세법의 무효화 결정을 철회했으나 이와 동시에 강제법을 무효라고 선언했다.

동기가 무엇이든 간에 잭슨은 여태까지 직면한 가장 심각한 위협에 맞서 연방을 유지시켰다. 그러나 이와는 대조적으로 조지아 주가 연방정부에 반기를 들고 나섰을 때는 내심으로 반기는 자세를 보였다. 1829년 조지아 주는 주경계 내에 있는 약 900만 에이커의 땅에 대해 관할권을 확대시켰는데 그 땅은 여전히 인디언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그 땅에 대한 인디언들의 소유권은 미국정부와의 협정을 통해 인정된 것이었다. 인디언측은 연방법원에 제소했으며 2건의 개별적 판결에서 연방 대법원은 조지아 주의 패소로 결정을 내렸다. 그러나 조지아 주는 대법원의 판결을 무시하고 인디언들의 영토에 대한 관할권을 계속 주장했다. 사우스캐롤라이나 주에 대해 강력히 대응했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잭슨은 조지아 주에 대해 아무런 제재를 가하지 않았다.

인디언들의 강제 이주
인디언들의 강제 이주

그의 측근들은 잭슨이 조지아 주의 입장에 공감하고 있는 것으로 확신했다.

1832년의 재선거

이러한 가운데 잭슨은 친구들로부터의 요구로 대통령직 재임을 시도했다.

1832년 선거가 다가오자 잭슨의 반대진영은 새로운 문제점을 제기함으로써 잭슨을 혼란에 빠뜨리고자 했다. 미합중국은행(Bank of the United States)의 영업허가 시한은 1836년으로 예정되어 있었다. 잭슨은 이에 관한 입장을 분명히 하지 않고 있었으나 점차로 이 은행 문제에 대해 불편한 심기를 갖게 되었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선거해가 되자 잭슨을 지지하는 유권자들 가운데 다수집단이 공개적으로 미합중국은행에 대한 반감을 공공연히 드러내게 된 점이다.

1832년 여름 잭슨의 반대진영측은 미합중국은행의 영업기간 연장을 위한 법안을 의회에서 통과시켰다. 이는 잭슨으로 하여금 법안에 서명해 자신의 지지세력들로부터 멀어지거나 아니면 거부권을 행사해 건전한 금융업에 대한 반대자로 드러나든지 양자택일을 요구함으로써 잭슨을 궁지로 몰아넣는 것이었다. 내각의 각료들도 미합중국은행에 대한 지지세력과 반대세력으로 양분되었다. 그러나 은행 영업기간연장 법안의 정치적 의도가 명백히 드러나자 각료들 모두는 법안에 거부권을 행사해야 한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잭슨 앞에 남겨진 문제는 거부권을 행사하더라도 앞으로 타협의 여지가 있을지 하는 점이었다.

1832년 7월 10일 잭슨이 거부권을 행사해 법안을 의회에 다시 회부한 사건은 이후에도 유례 없는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미합중국은행에 대한 거부권 행사는 또한 잭슨의 제2차 임기 동안 줄곧 계속된 금융정책을 둘러싼 갈등의 전주곡이었다. 한편 잭슨은 의회를 설득해 은행권의 유통을 제한하기 위한 법안을 통과시키려고 했다. 이러한 시도는 실패로 끝났으며 자신의 생각을 관철시킬 수 있는 중요한 순간이 왔다. 공유지를 구매한 거의 모든 사람들은 당시 은행지폐로 대금을 지불하고 있었는데, 지폐를 발행한 은행들의 지불능력에 관한 의문이 제기됨에 따라 은행지폐의 다수는 액면 가격 이하의 가치로 사용되어야 했다.

부분적으로는 연방세입의 손실을 막고 또다른 한편으로는 통화의 안정성 확보에 대한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 잭슨은 1836년 7월 정화(正貨)유통령을 발표, 공유지를 매입할 경우 반드시 금이나 은 같은 정화로 지불하도록 했다. 이같은 조치는 많은 은행들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정화지불에 대한 수요를 불러일으켰다. 서부지역에서 은행들이 파산하기 시작해 그 여파가 동부지역으로 미쳤으며 1837년 봄에는 미국 전역이 금융공황에 빠져들었다. 그러나 이같은 금융공황은 1837년 3월 4일 밴 뷰런이 대통령에 취임하는 모습을 잭슨이 느긋하게 지켜볼 당시까지는 발생하지 않고 있었다.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후 고향 허미티지로 돌아온 잭슨은 생애 마지막 8년간을 병으로 고생하며 보냈으나 국사에 대해서는 계속 활발한 관심을 기울였다.

영향

그가 관직을 떠날 때는 처음 발을 들여놓을 때보다 더 인기가 있었다.

그의 활동에 대한 폭넓은 지지는 이후 반세기 동안 미국 정치의 성격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가 거둔 성공은 새로운 민주주의에 대한 주춧돌로 여겨졌다. 민주주의의 분별력과 도덕성에 대해 1829년 의문을 나타내는 목소리가 강했으나 1837년에는 이에 의혹을 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잭슨은 거기다가 이후의 대통령 후보자들이 본받고자 했던 하나의 전형을 확립했다. 변변찮은 환경에서 출생한 점, 변경지역에서의 경험을 가진 점, 일반 대중과 가까이 지내려 한 점, 민주주의에 대해 헌신한 점, 그리고 여기에 덧붙일 수 있다면 군사적으로 공훈을 세운 점 등 이 모든 요소가 대통령 후보자에게는 가치 있는 경력으로 간주되었다.

1825~37년의 치열한 정치적 투쟁은 양당체제의 부활을 가져왔다.

잭슨은 한번도 자신이 훌륭한 정치인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지만, 그 자신과 동료들은 당대에 가장 유능한 정치지도자들임을 스스로 입증해 보였다. 1828년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을 때 그는 어느 정당의 후보라기보다는 특정 정파의 후보였다. 대통령직에서 물러날 때는 활력 있고 잘 조직된 민주당을 유산으로 남겨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