밴 뷰런

밴 뷰런

다른 표기 언어 Martin Van Buren 동의어 마틴 반 뷰렌, 미국 제8대 대통령
요약 테이블
출생 1782. 12. 5, 미국 뉴욕 킨더후크
사망 1862. 7. 24, 킨더후크
국적 미국

요약 미국의 제8대 대통령(1837~41 재임).

밴 뷰런(Martin Van Buren)
밴 뷰런(Martin Van Buren)

민주당을 세운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며 정치가로서 문제 해결에 뛰어난 능력을 발휘해 '작은 마술사'로 알려졌다.

밴 뷰런은 법률을 공부하고 1803년 킨더후크에서 변호사로 개업했다.

제퍼슨 공화파로서 2차례 뉴욕 주 상원의원(1812~20)을 지냈으며 임기중 주 법무장관에 임명되었다. 1821년 연방상원에 당선된 뒤 비공식 정치단체인 '올버니 섭정단'(Albany Regency)을 조직해 자신이 워싱턴에 머무르는 동안 뉴욕 주 행정을 맡게 했다. 그는 자신을 토머스 제퍼슨의 제자로 여겨 상원에서 주권(州權) 원칙을 지지했고, 강력한 중앙정부를 반대했으며, 국내 개발사업에 연방정부가 지원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1824년 존 퀸시 애덤스가 대통령에 당선된 뒤 밴 뷰런은 새로운 정치판도 형성을 도왔고 그결과 민주당이 창당되었다.

앤드루 잭슨, 윌리엄 H. 크로퍼드, 존 C. 캘훈 등이 이끄는 제퍼슨 공화파로 구성된 민주당은 제퍼슨의 원칙들을 신봉했고 잭슨의 인기에 편승했다. 상원의원직에서 물러난 밴 뷰런은 1828년 뉴욕 주지사에 출마해 당선되었다. 그러나 12주 만에 주지사직을 포기하고 앤드루 잭슨 행정부의 국무장관이 되었다. 이때문에 엽관제(獵官制)를 조장한다는 비난을 받았지만 일부 역사가들은 이러한 비판이 과장된 것이라고 했다.

1831년 개각 때 사임한 뒤 잠시 동안 영국 주재 공사로 일했다.

1832년 민주당 제1차 전당대회에서 부통령후보에 지명된 그는 대통령후보인 잭슨과 함께 기존 은행제도를 반대하는 강령을 내걸고 선거에 나서 당선되었다. 잭슨의 지명으로 차기 대통령후보에 나섰고, 1835년 전당대회에서 만장일치로 대통령후보에 지명되었다. 밴 뷰런이 선거에서 승리해 1837년 대통령직에 취임했을 때 미국은 전국적인 금융공황을 맞고 있었다.

1840년 그는 각주 은행에 들어 있는 정부자금을 인출해 '독립된 국고'에 보관하자는 제안을 했으며, 이 제안은 의회의 격렬한 논쟁을 거친 뒤 가까스로 통과되었다. 그러나 이때 민주당의 많은 보수주의자들이 휘그당으로 전향했다. 그의 인기는 희생이 컸던 플로리다 세미놀 인디언과의 전쟁과 텍사스 합병 거부 등으로 떨어졌다.

미국의 북동부 국경문제로 메인 주 주민들과 아루스투크 강 연안에 살고 있던 캐나다인 사이에 충돌이 일어났다.

밴 뷰런에 의해 무력충돌이 중단되었으나 완전한 해결은 1842년 웹스터-애슈버턴 조약으로 이루어졌다. 대통령으로서 마지막 업적은 연방공무원이 하루 10시간 이상 근무하지 못하도록 규정한 것이었다. 그는 1840년 만장일치로 민주당의 대통령후보로 재지명받았으나 선거에서 휘그당의 윌리엄 헨리 해리슨에게 크게 패했으며, 4년 뒤에는 민주당의 지명을 받는 데에도 실패했다.

민주당 안의 노예제폐지론자와 '양심적인 휘그'(Conscience Whigs) 당원이 자유토지론자들과 연합해 만든 자유토지당(Free-Soil Party)에서 1848년 대통령후보로 지명되었으나 선거에서 패했다. 그뒤 킨더후크에 있는 고향 린덴월드로 은퇴했다.

1833년에 쓴 회고록은 1920년에 출판되었다.

또한 〈미국 정당의 기원과 진로에 관한 연구 Inquiry into the Origin and Course of Political Parties in the United States〉(1867)를 쓰기도 했다. 에드워드 M. 셰퍼드가 쓴 〈마틴 밴 뷰런 Martin Van Buren〉(1892), 로버트 V. 레미니의 〈마틴 밴 뷰런과 민주당의 탄생 Martin Van Buren and the Making of the Democratic Party〉(1959) 등 2편의 전기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