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2년전쟁

1812년전쟁

다른 표기 언어 War of 1812 , 一千八百十二年戰爭 동의어 미영 전쟁

요약 나폴레옹 전쟁 도중 가혹한 해상 조처로 말미암은 미국의 불만이 주 원인이 되어 벌어진 미국영국 사이의 전쟁(1812. 6. 18~1814. 12. 24).
미영전쟁이라고도 함.

1812년전쟁(War of 1812)
1812년전쟁(War of 1812)

그러나 두 나라는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한 채로 전쟁을 끝냈다.

영국과 프랑스가 1793~1815년에 걸친 오랜 기간 동안 간헐적으로 치른 싸움은 결국 중립국가들의 권리와 이익을 침해, 손상하기에 이르렀다. 나폴레옹은 미국이 영국을 상대로 무역하는 것에는 개입하지 않겠다고 합의함으로써 중립국들의 적의를 피했다. 그러나 영국은 자국의 해군력이 우세하다고 확신하고, 계속하여 1807년 추밀원령(樞密院令)을 시행하도록 했다. 이 추밀원령에 따라 영국은 프랑스의 모든 항구를 봉쇄하고 중립국 선박들은 우선 영국의 항구에 들러 관세를 내야 한다고 강요했다.

영국은 미국 선박들이 공해(公海) 상에서 항해하지 못하도록 했고 미국 수병들이 영국 해군에서 탈함(脫艦)한 군인들이라고 주장해 미국의 감정을 상하게 했다. 신생국인 미국은 이에 반발해 1807년의 수출입 금지법과 1809년의 통상금지법으로 맞섰다. 이어서 1810년 발표한 3번째 조처로 교역제한은 철폐되었으나 봉쇄를 철회하지 않는 경쟁국에 대해서는 통상금지를 재개한다고 규정했다.

영국은 이 조처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해 1812년 6월 18일 제임스 매디슨 미국 대통령이 선전포고에 서명하는 사태를 초래했다.

한편 영국이 캐나다 변경에서 벌인 군사작전에 대해 미국이 적의를 품고 있었으므로 국제적 긴장은 더욱 고조되었다. 영국 정부는 인디언 영토에 진출한 백인들을 조사하기 위한 방편으로 쇼니족 족장인 테쿰세에게 무기를 공급하고 격려했다.

쇼니족이 백인을 공격하고 마침내 티피커누 전투(1811. 11. 7)가 벌어지자 서부정착민들은 영국을 캐나다에서 몰아내고 국경수비를 강화해야 한다고 탄원하기에 이르렀다. '매파'라고 불리던 의회 내의 팽창주의자들은 이 주장을 열렬히 지지했다. 이들은 영토를 넓히려는 야망으로 플로리다를 연방에 포함시키기도 했다.

미국은 제대로 준비도 못한 채 전쟁으로 치닫고 있었다.

캐나다를 공격한다는 야심에 찬 계획은 결코 실현되지 않았다. 미국 군함은 1812년 영국 프리깃함과 싸움을 벌인 끝에 '게리에르'호를 상대로 '콘스티튜션'호가 거둔 승리를 비롯해 3번의 주목할 만한 승리를 거두었으나 이 전쟁에서 나머지 3번의 승리는 영국에 돌아갔다. 이리 호(湖), 온타리오 호, 섐플레인 호의 지배권을 차지하기 위한 여러 차례의 작은 접전이 벌어졌다. 미국은 디트로이트 탈환을 비롯, 몇 번의 작전에서는 성공을 거두었으나 1814년까지도 영국은 미시간 호에 접근하는 통로를 그대로 지배하고 있었으며 새로이 미시시피 강 북쪽 유역을 점령했다.

영국의 육해군은 체서피크 만(灣) 해안을 황폐화시켰고 블레이던즈버그 전투에서 승리한 뒤, 미국의 요크(토론토) 작전에 대해 앙갚음 하기 위해 워싱턴 D. C.의 공공건물들을 불태웠다. 미국의 선박들이 영국 상선을 방해하자 미국군의 사기는 높아졌지만 영국의 해상통제권을 교란시키지도, 미국 해안 봉쇄를 풀지도 못했다.

별 성과 없는 전쟁에 지친 두 나라는 1814년 12월 24일 벨기에의 헨트에서 전쟁 전 상태로 복귀하자는 조약을 맺었다(겐트 조약). 이 조약은 뉴잉글랜드의 분리운동을 미리 방지하는 역할을 했는데, 국민의 지지를 거의 얻지 못한 전쟁에 대한 반응으로 열린 하트퍼드 회의(1814. 12~1815. 1)에서 뉴잉글랜드가 분리해 나가려는 움직임을 보였던 것이다.

비록 미국은 내세웠던 목표를 이루지는 못했지만 대중 사이에 떠도는 전설은 패배를 승리에 대한 환상으로 바꾸어놓았다. 이런 과정에는 몇 가지 상황이 도움이 되었다. 우선 1814년말에 미국이 거둔 잇따른 승리는 승리감을 자아냈다. 이 승리감을 가장 강하게 해준 것은 뉴올리언스 전투로, 미국이 승리한 뒤 이곳에 평화조약 체결 소식이 도달했기 때문이다.

또한 유럽에서 나폴레옹 전쟁이 끝남에 따라 징병문제와 말뿐인 봉쇄작전도 막을 내렸다. 마지막으로 이 전쟁은, 1814년 앤드루 잭슨 소장이 남부에서 크리크족 연합군을 격파(이 전투는 1819년 플로리다 획득의 간접적인 계기가 되었음)하는 도중 테쿰세가 죽음으로써 일어난 인디언들의 저항을 가라앉히는 역할을 해준 것이다. 이 전쟁을 고비로 미국은 차츰 유럽에 대해 독자적으로 나가기 시작했고 자국의 국민성을 한층 북돋울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