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퀸시 애덤스

존 퀸시 애덤스

다른 표기 언어 John Quincy Adam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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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767. 7. 11, 미국 매사추세츠 브레인트리
사망 1848. 2. 23, 워싱턴 D. C.
국적 미국

요약 미국의 제6대 대통령(1825~29 재임).

목차

접기
  1. 개요
  2. 초기의 정치활동
  3. 연방주의자들과의 불화
  4. 국무장관 시절
  5. 잭슨과의 불화와 대통령직
  6. 후기의 의원활동
애덤스(John Quincy Adams)
애덤스(John Quincy Adams)

개요

존 퀸시 애덤스는 제2대 대통령 존 애덤스의 첫째아들로 대통령이 되기 전에는 외교관으로서 뛰어난 활동을 했으며 먼로 독트린을 고안해냈다.

1831~48년 연방의원으로 일할 때는 노예제도의 확대에 대항해 지속적이고 때로는 극적인 싸움을 벌였다.

초기의 정치활동

외증조할아버지인 존 퀸시가 여러 해 동안 매사추세츠 의회의 저명한 의원으로 활동하다가 그만두었을 때 태어나 할아버지의 이름을 물려받았다.

미국 독립전쟁으로 브레인트리의 유일한 선생님이 사라진 뒤 존 퀸시 애덤스에게 교육적인 영향을 미친 사람은 당시 대륙회의의 대표였던 애국자 아버지와 지적인 어머니였다. 1778, 1780년에 소년 애덤스는 아버지와 함께 유럽으로 갔다. 1778~79년에는 파리에 있는 사립학교에서, 1780년에는 레이덴대학교에서 공부했다. 그래서 일찍이 애덤스는 프랑스어에 대한 많은 지식을 얻을 수 있었고, 네덜란드에 대해서도 조금은 알 수 있었다.

1780년부터 규칙적으로 일기를 쓰기 시작했는데, 이 일기는 이후 60년의 미국 역사에서 존 퀸시 애덤스 자신과 동시대인의 행적에 대한 뛰어난 기록으로 손꼽히고 있다. 1781년 14세 때 러시아 주재 미국 공사 프랜시스 데이나의 개인비서이자 프랑스어 통역관으로 러시아에 갔다. 애덤스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1년 이상을 빈둥거리며 보낸 뒤 데이나가 러시아 정부의 신임장을 얻지 못하자 1782년 스칸디나비아·하노버·네덜란드를 경유하여 아버지가 있는 파리로 돌아왔다. 파리에서 미국의 독립을 확정짓기 위해 평화조약을 협상하는 미국 대표들의 보조사무관이 되어 비공식적으로 일했다.

영국 주재 미국 공사로 임명된 아버지와 함께 런던에 머무는 대신에 매사추세츠로 돌아와 1787년 하버드대학교를 졸업했다. 테오필루스 파슨스의 후견을 받으며 뉴버리포트에서 법학을 공부했고 1790년 보스턴에서 변호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변호사 개업을 위해 힘쓰는 한편, 신문에 토머스 페인의 〈인간의 권리 Rights of Man〉에 담긴 학설을 반박하는 일련의 사설을 기고했다. 나중에 쓴 다른 사설에서는 1793년 프랑스와 영국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을 때 조지 워싱턴 정부가 취한 중립정책을 열렬히 지지했다.

이 사설들은 조지 워싱턴 대통령의 관심을 끌었고 이로 말미암아 워싱턴은 1794년 5월 존 퀸시 애덤스를 네덜란드 공사로 임명했다.

당시 헤이그는 제1차 대(對)프랑스 전쟁 때문에 유럽에서 가장 좋은 외교정보 수집장소가 되어 있었다. 젊은 존 퀸시 애덤스가 국무부에 보낸 공문서와 당시 부통령이었던 아버지에게 보낸 비공식적 편지들 덕분에 미국 정부는 곤란에 빠져 있는 유럽 대륙의 외교활동과 전쟁들, 유럽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어가는 것들의 위험성에 관해 잘 알 수 있었다.

워싱턴 대통령도 이 편지를 읽었으며 사실상 워싱턴이 1796년에 행한 '고별연설'에서도 존 퀸시 애덤스가 쓴 문구들이 인용되었다. 런던 주재 공사였던 토머스 핑크니의 부재시에 애덤스는 1794년 미국과 영국 사이에 체결된 제이 조약의 비준교환과 관련하여 영국 외무부와의 공식업무를 처리하기도 했다. 1796년 워싱턴은 애덤스를 가장 유능한 외교관이라고 생각하여 그를 포르투갈 공사로 임명했으나 포르투갈로 떠나기 전 그의 아버지 존 애덤스가 대통령에 선출됨에 따라 그는 프로이센으로 부임하게 되었다.

존 퀸시 애덤스는 1797년 런던에서 베를린으로 떠나기 전날 루이자 캐서린 존슨(1775~1852)과 결혼했다.

루이자의 아버지는 메릴랜드 출신의 미국 영사 조슈아 존슨이었고 어머니는 영국인 캐서린 너스였다. 1799년 존 퀸시 애덤스는 베를린에서 프로이센과 우호조약 및 상업조약을 협상했다. 1800년 토머스 제퍼슨이 대통령에 당선된 뒤 아버지의 부름을 받아 1801년 보스턴으로 돌아온 애덤스는 이듬해 매사추세츠 상원의원이 되었다. 1803년 매사추세츠 의회는 애덤스를 연방 상원의원으로 선출했다.

연방주의자들과의 불화

그때까지 존 퀸시 애덤스는 연방파에 속해 있는 것으로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었으나, 그는 연방파의 일반적인 정책을 불쾌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알렉산더 해밀턴의 추종자와 보수적인 집단에 있어서 존 퀸시 애덤스는 존 애덤스의 아들이라는 이유만으로도 언짢은 존재였으며, 그 역시 곧 자신이 인기없는 소수집단의 인기없는 구성원으로서 사실상 힘없는 존재임을 깨달았다. 실제로 애덤스는 당시에도 그 이후에도 결코 엄격한 의미의 정당인은 아니었다.

전생애를 통해서 보다 높은 공직을 갈망할 때조차도 존 퀸시 애덤스는 자신을 '미국 전체의 사람'으로 생각했다. 애덤스는 너무 늦게 워싱턴에 합류했기 때문에 다른 연방파 상원의원들이 반대했던 루이지애나 매입조약 비준에 투표할 수 없었으나 이 조약을 실행할 수 있는 세출승인에 투표했으며 자신은 매입조약 자체에도 찬성표를 던졌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애덤스는 연방파 동료들과 함께 새로 획득한 루이지애나를 대통령 자신이 임명한 관리가 통치할 수 있도록 하는 법안에는 반대표를 던졌다.

존 퀸시 애덤스의 저항은 헛된 것이었지만, 이 법안은 헌법이 대통령에게 부여한 권력을 넘어서는 것이었고 자치정부의 권리를 위반하는 것이었으며 대표기구도 없이 과세를 부과하는 것이었다. 1807년 12월 애덤스는 제퍼슨 대통령이 모든 해외무역 금지를 위해 제안한 봉쇄정책(영국이 미국의 권리를 승인하도록 하기 위한 조치)에 찬성했으며, "대통령은 막대한 책임감을 가지고 정책을 제안했다. 나는 생각하지도 고려하지도 않을 것이다. 나는 행동할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즉각적인 행동을 강력히 촉구했다. 5시간도 채 안 되어 상원은 이 봉쇄정책 법안을 통과시켜 하원으로 보냈다.

그러나 이 정책을 지지함으로써 존 퀸시 애덤스는 연방파의 미움을 사게 되었으며, 지역경제를 둔화시킨다는 이유로 뉴잉글랜드 지방에서 인기를 잃고 상원의원에서 물러나야 했다. 애덤스의 후임은 차기 상원의원 선거일보다 몇 개월 앞선 1808년 6월 3일에 선출되었으며, 그로부터 5일 뒤 애덤스는 사임했다. 그해 애덤스는 제임스 매디슨을 대통령으로 지명한 공화파 의회 간부회의에 참석했고, 그뒤 공화파와 연합했다. 1806~09년에는 하버드대학교에서 보일스턴의 수사학과 웅변술을 가르쳤다.

1809년 매디슨 대통령은 존 퀸시 애덤스를 미국 대표로 러시아의 차르 궁전에 파견했다.

존 퀸시 애덤스는 차르가 나폴레옹과의 관계단절을 결심했을 때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했다. 그러므로 애덤스는 호의적 환대를 받았고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미국의 상업적 이익을 늘릴 수 있도록 준비할 수 있었다. 이처럼 유리한 입장에서 애덤스는 나폴레옹의 러시아 침공과 프랑스 대군의 비참한 퇴각 및 해체를 지켜보았으며 이를 본국에 보고했다. 1812년 미·영전쟁이 일어났을 때에도 애덤스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었다. 그해 9월 러시아 정부는 차르가 기꺼이 미국과 영국의 중재자 역할을 해줄 것이라고 발표했다.

매디슨은 황급히 이 제안을 받아들였으며, 앨버트 갤러틴과 제임스 베이어드를 파견하여 존 퀸시 애덤스와 함께 일하도록 했으나 영국은 이와 관련된 아무런 조처도 취하지 않았다. 그러나 1814년 8월 이들과 헨리 클레이, 조너선 러셀 등은 영국 대표들과 협상을 시작했으며, 그결과 그해 12월 24일 겐트 조약이 체결되었다.

그후 파리를 방문중이던 존 퀸시 애덤스는 나폴레옹이 엘바에서 프랑스로 돌아오는 것을 목격했으며, 그뒤 런던으로 가서 1815년 클레이·갤러틴과 함께 '무역과 항해에 관한 규제협정'을 협상했다. 그 직후 애덤스는 영국 주재 미국 공사로 발령을 받았는데 그 보직은 이전에 그의 아버지 존 애덤스가 일을 했던 곳이며, 차후에는 그의 아들 찰스 프랜시스 애덤스가 일하게 될 곳이었다. 별 성과없이 영국에서의 임기를 마치고 1817년 여름 미국으로 돌아온 애덤스는 제임스 먼로 대통령 내각에서 국무장관을 지냈다.

이 임명은 물론 존 퀸시 애덤스가 외교분야에서 이룬 업적 때문이기도 했지만, '화합의 시대'로 알려진 당시의 분위기 속에서 부서별로 균형잡힌 내각을 유지하고자 하는 먼로 대통령의 바람 때문이기도 했다.

국무장관 시절

국무장관으로서 존 퀸시 애덤스는 플로리다 취득 문제를 주도했다.

일찍이 루이지애나를 얻은 이후 행정부는 플로리다의 일부분만이라도 매입하려는 정책을 계속해서 추진해왔었다. 1819년 오랜 협상 끝에 존 퀸시 애덤스는 스페인이 미시시피 강 동쪽 영토에 대한 모든 권리를 포기하며, 미국은 지금의 텍사스 지방에 대한 모든 권리를 포기하고 미국의 국경은 대서양에서 태평양까지로 정해진다는 조약에 대해 스페인 공사의 동의를 얻어냈다. 이 대륙간 조약은 미국 외교역사상 단 한 사람이 이루어낸 가장 위대한 승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대륙횡단조약). 애덤스는 스스로도 미국의 북부 국경을 로키 산맥으로부터 태평양까지 더 서쪽으로 확장하고자 했었다.

그러므로 이 조약은 외교의 천재로서 존 퀸시 애덤스의 재능을 보여준 한 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애덤스 자신의 말을 빌리면 이것은 미국의 대륙확장 정책에 있어 승리의 '신기원'을 이룬 것이었다. 그러나 스페인 정부가 1819년 이 대륙간 조약을 비준하기 전에 텍사스를 포함한 멕시코가 모국에 반기를 들자, 미국은 군사력을 동원하여 플로리다를 점령했다. 또한 애덤스는 1818년 미국의 북부 국경을 북위 49°를 따라 우즈 호(湖)에서 로키 산맥까지로 하는 조약을 영국과 체결했다.

1년 뒤 하원의원이 되었을 때에도 존 퀸시 애덤스는 오리건 주의 경계선을 로키 산맥에서 태평양에 이르는 북위 49°로 할 것을 주장했다. "나는 서부 개척자를 위해 그 지역을 원한다." 제임스 K. 포크 대통령 때 체결된 오리건 조약(1846)은 국경선을 북위 49°로 정하고 있다.

먼로 독트린은 당연히 1823년에 이를 공포한 대통령의 이름을 딴 것이지만 사실은 존 퀸시 애덤스의 작품이다.

잭슨과의 불화와 대통령직

먼로 대통령의 2번째 임기가 끝날 무렵 그의 공식 자문관들은 그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다.

이 가운데 3명, 즉 국무장관 존 퀸시 애덤스, 육군장군 존 C. 컬훈, 재무장관 윌리엄 H. 크로퍼드는 먼로의 뒤를 이어 대통령직을 계승하려 했다. 하원의장 헨리 클레이와 앤드루 잭슨 장군 역시 대통령 후보였다. 컬훈은 부통령으로 지명되었고 나머지 4명은 대통령후보로 나서 잭슨 99표, 애덤스 84표, 크로퍼드 41표, 클레이 37표를 얻었다.

이들 중 누구도 다수를 얻지 못했기 때문에 결정은 하원으로 넘어갔고 하원은 가장 많은 득표수를 얻은 순서대로 3명의 후보자를 선택했다. 오랫동안 잭슨에 대해 몹시 비판적이었던 클레이는 자신의 영향력을 존 퀸시 애덤스에게 몰아주었고 이로써 애덤스는 1차 투표에서 다수표를 확보할 수 있었다.

며칠 뒤 존 퀸시 애덤스는 국무장관으로 클레이를 임명했으며, 클레이는 이를 수락했다. '거래와 부패'에 대한 비판이 뒤따랐으며, 그로 인해 미국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애덤스와 잭슨 간의 불화가 생겨났다.

그때까지 존 퀸시 애덤스의 활동은 거의 성공적이었으나, 미국이 번영을 누리고 있던 그의 대통령 재임기간(1825~29) 동안은 잭슨주의자들의 격렬한 반대 때문에 모든 점에서 정치적인 실패를 거듭했다. 1828년 잭슨은 애덤스를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잭슨의 재임기간 동안에는 애덤스 추종자와 잭슨 추종자 사이에 서로 화해할 수 없을 정도의 의견 차가 생겼는데, 애덤스 추종자들은 후에 반(反)프리메이슨파와 연합해 휘그당의 전신인 국가공화파를 형성했다.

1829년 존 퀸시 애덤스는 잠시 동안 퀸시로 은퇴해 개인적인 시간을 가졌으나 1830년 반프리메이슨 운동가(프리메이슨단에 반대하는 정치세력의 규합으로 형성됨)들의 광범위한 지지를 얻어 연방하원의원에 선출되었다. 애덤스가 하원의원직을 받아들이는 것이 전직 대통령의 품위를 떨어뜨린다는 의견이 나왔을 때, 그는 "어떤 사람도 의회에서 국민의 대표로 또는 자기 마을에서 도시행정위원으로 국민에게 봉사한다는 것이 그의 품위를 떨어뜨리는 것은 아니다"라고 대답했다.

존 퀸시 애덤스는 1831~48년 그가 죽을 때까지 하원의원으로 재직했다. 그러나 애덤스는 반프리메이슨당(이 당이 정치적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던 동안에는 이 당에서 그가 매우 적극적으로 활동했음)이나 국가공화파, 또는 이 2개당의 연합당, 심지어는 나중의 휘그당의 지명을 받아서라도 대통령에 재선하리라는 희망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애덤스의 마음속에는 항상 '나는 전(全)국민의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 있었다. 그러나 이런 희망들은 점차 사라졌다.

후기의 의원활동

생애 후반의 오랜 의원활동은 외교관으로서의 초기 활동만큼이나 중요했다.

의원생활을 하는 동안 존 퀸시 애덤스는 노예제도의 확대에 대해 두드러진 반대자였으며 노예제도 폐지론이라는 말의 정치적인 의미는 결코 깨닫지 못했지만 진심에서 우러난 노예제도 폐지론자였다. 1839년 애덤스는 "1842년 7월 4일 이후 미국에서 태어난 모든 아이는 자유로워야 하고, 플로리다를 제외한 연방의 모든 신생 주는 노예제도를 채택할 수 없으며, 1845년 7월 4일 이후에는 컬럼비아 지역 내에서 노예나 노예무역을 결코 허용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헌법 개정안을 하원에 제출했다.

그러나 하원에서 노예제도와 관련된 모든 논의를 거부하기 위해 남부 출신 의원들이 통과시킨 노예제도 반대 청원에 대한 '불채택' 결의 때문에 존 퀸시 애덤스가 제안한 개정안은 논의조차 되지 못했다(개그룰). 불채택 결의의 철폐와 노예제의 완화 또는 폐지를 위해 의회의 청원권을 얻기 위한 애덤스의 오랜 싸움은 의회 역사에서 가장 극적인 투쟁으로 꼽힌다. 북부 전지역에 걸쳐 모든 주의 개인과 집단들은 점차 청원을 애덤스에게 보냈고 그는 충실하게 이 청원들을 의회에 제출했다.

존 퀸시 애덤스는 불채택 결의가 제1차 연방헌법 개정안에 대한 직접적인 위반이라고 강력히 주장했으며, 그의 정적들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이 문제를 묵과하지 않은 채 불굴의 용기를 가지고 이 결의를 철폐하기 위해 노력했다. 해마다 노예제 반대를 주장하는 수많은 청원서를 받았으며, 그에 따라 애덤스가 의회에 제출한 청원서의 분량도 늘어갔다. 이 투쟁에 있어서 절정을 이룬 때는 아마도 1837년이었을 것이다. 그해에 애덤스는 22명의 노예가 보낸 노예제 반대 청원서를 의회에 제출했으며, 그에 대한 정적들의 심한 비난에 맞서 그 특유의 기민함과 재능으로 자기 자신을 방어했다.

회기마다 존 퀸시 애덤스에게 반대하는 사람들이 점차 줄어들어 1844년에는 21번째 불채택 결의가 하원에서 108 대 80으로 통과되지 못했다. 이로써 애덤스의 오랜 싸움이 끝났다. 애덤스가 노예제 반대에서 이룩한 또다른 위대한 공헌은 노예선 '아미스타드'에 실려온 아프리카인들을 위해 싸운 일이다(아미스타드 폭동). 이 노예들은 스페인 노예상인들에게 대항하여 폭동을 일으키고, 쿠바 해안으로 도망친 후 노예선을 타고 롱아일랜드 근처의 미국 해역으로 들어온 사람들이었다.

존 퀸시 애덤스는 대법원에서 1841년 노예들을 주인에게 돌려줌으로써 결국에는 그들을 죽음으로 몰아넣게 될 마틴 밴 뷰런 대통령 행정부의 정책에 맞서 흑인노예들을 자유인이라는 입장에서 옹호했다. 애덤스는 그들에게 자유를 찾아주었다. 의원으로서뿐만 아니라 사실상 전생애에 걸쳐 애덤스는 예술과 과학의 향상 및 지식의 보급에 힘썼다.

존 퀸시 애덤스는 영국인 괴짜 제임스 스미스슨의 많은 유산을 보존하여 스미스슨의 영지에서 나온 돈으로 미국에 스미스소니언 연구소를 설립했다. 애덤스의 생애에서 가장 극적인 사건은 그의 최후인 것 같다. 1848년 2월 21일 의회가 무력사용을 영예로운 것으로 허락함으로써, 자신이 '가장 부당한 전쟁'으로 생각했던 멕시코와의 전쟁 승인권이 장군들에게 넘어가자 이에 항의하는 과정에서 애덤스는 충격을 받아 의식을 잃고 쓰러져 2일 뒤 의사당 안에서 죽었다.

워싱턴과 고향 매사추세츠에서 거행된 존 퀸시 애덤스의 장례식은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행렬의 물결로 가득했다.

미국 공직사회에서 존 퀸시 애덤스보다 더 독립적이고 공공심을 가졌으며 능력 있는 사람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그러나 애덤스는 정치생활 전반에서 그가 풍기는 냉담성·엄격함·차가움이라는 성격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다. 이러한 애덤스의 성격은 국민의 상상력과 정서에 호소력을 가지지 못했다.

존 퀸시 애덤스는 친밀한 친구가 몇 명 있었지만 미국 역사상 생전에 정적으로부터 그처럼 적대감과 원한에 찬 공격을 받았던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