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로

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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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758. 4. 28, 미국 버지니아 웨스트모어랜드
사망 1831. 7. 4, 뉴욕 뉴욕 시
국적 미국

요약 미국의 제5대 대통령(1817~25).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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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요
  2. 초기생애
  3. 프랑스 공사 시절
  4. 루이지애나 매입
  5. 대통령 시절
먼로(James Monroe)
먼로(James Monroe)

개요

아메리카에 대한 유럽 제국의 외교간섭을 금하는 먼로 독트린(먼로주의)을 발표했다.

그의 통치기간은 미국의 정치사상 '화합의 시대'로 일컬어진다.

초기생애

먼로는 스코틀랜드계인 아버지와 웨일스 혈통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16세가 되던 해 윌리엄앤드메리대학에 입학했으나 1776년 독립전쟁 참전을 위해 학업을 중단했다. 1780년 당시 버지니아 주지사이던 토머스 제퍼슨으로부터 법률을 사사하면서 인연을 맺게 되는데, 후일 제퍼슨으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게 된다(제퍼슨). 1782년 먼로는 버지니아 주 하원에 진출했고 24세의 나이로 지사 자문위원이 되었다. 1783~86년 연합회의의 버지니아 주 대표로 활동하는 동안 스페인에 대해 미시시피 강에서의 미국의 운항권을 주장했으며 연합회의에 통상규제권을 부여함으로써(1785) 중앙정부의 주요결함 가운데 하나를 제거했다.

1786년 먼로는 엘리자베스 코트라이트와 결혼했고 그녀와의 사이에 두 딸을 두게 된다. 연합회의 대표직에서 물러난 뒤 프레더릭스버그에서 변호사 업무를 시작했으나 1787년 다시 주하원의원으로 선출되었고 이듬해에는 연방헌법 비준을 위한 주협의회에 참석했다. 1790년 제임스 먼로는 연방 상원의원으로 선출되었다. 상원에서는 대정부 비판가로서 이름을 떨쳤으나 1794년 조지 워싱턴대통령에 의해 프랑스 공사로 임명되었다(워싱턴).

프랑스 공사 시절

먼로와 같은 친프랑스계 인사를 외교사절로 파견한 행정부의 희망은 프랑스 정부로부터 호의적인 반응을 얻는 한편 미국 내의 프랑스 지지세력을 회유했으면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파리에 도착한 먼로는 스스로 공화주의자임을 자처함으로써 미국 내 연방파(알렉산더 해밀턴중심의 친영 정당)의 분노를 샀으며, 미국과 영국 사이의 통상·항해관계를 규제하는 '제이 조약'의 중재에도 성의를 보이지 않았다. 프랑스 정부는 제이 조약을 프랑스-미국 통상우호조약의 침해로 받아들였고, 별다른 설명도 없이 선전포고의 의사를 내비쳤다.

이에 대해 그는 조약은 결코 비준되지 못할 것이며, 이로 말미암아 워싱턴 정부가 붕괴되고 토머스 제퍼슨과 같은 새로운 대통령이 선출되면 보다 나은 조치들이 강구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대통령은 먼로의 술책을 알아채지 못했지만 그가 정부의 입장을 적절히 대변하지 못하고 있다고 판단하고 그를 소환했다(1796). 1797년 봄 미국으로 돌아온 먼로는 그해 12월에 500페이지 분량의 〈미국 외교사절의 처신에 관하여 A View of the Conduct of the Executive, in the Foreign Affairs of the United States〉를 발표했다.

추후 워싱턴과 제이에 대한 먼로의 평가에는 변화가 일어났지만 워싱턴 대통령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책략을 결코 용서할 수 없었다. 1799년 먼로는 버지니아 주 지사로 선출되었고 2차례 재선되면서 1802년까지 재임했다.

루이지애나 매입

1800년 10월의 '산일데폰소 조약'으로 스페인이 프랑스에 루이지애나를 반환하자 연방내 각 주에서는 비난의 여론이 들끓었다.

스페인의 지역행정관은 뉴올리언스에 대한 제주의 예금권을 철회시킴으로써 미국인들의 불안감을 증폭시켰으며 사태는 전쟁의 필요성이 거론되는 정도로까지 비화되었다. 제퍼슨 대통령은 평화적인 사태수습에 착수했고 1803년 1월 먼로를 특명전권공사로 임명, 로버트 R. 리빙스턴프랑스 공사와 찰스 핑크니마드리드 공사를 지원하도록 지시했다(리빙스턴,핑크니). 리빙스턴의 임무는 뉴올리언스 섬을 포함한 미시시피 강 어귀 지역을 매입하는 것이었고, 핑크니는 스페인 정부로부터 동·서 플로리다의 할양을 교섭하고 있었다.

같은 해 4월 18일 먼로는 영국 공사로 임명되었다.

4월 12일 먼로는 파리에서 리빙스턴 공사와 회동했고 협상은 별 어려움 없이 진행되고 있었다. 루이지애나 전역을 처분하려는 나폴레옹의 내심을 간파한 리빙스턴과 먼로는 훈령의 범위를 이탈해 5월 2일(혹은 4월 30일) 루이지애나 매입을 성사시키는 조약과 협정안에 서명했다.

조약체결의 외교적 성과는 정치경력에 오점을 남기지 않는 수준에 그쳤을 뿐 먼로에게 큰 영예가 되지는 못했다. 먼로는 프랑스를 떠나 영국 공사의 직위에 복귀했으며, 이듬해 가을 플로리다를 할양받고 루이지애나의 지역경계를 확정짓기 위해 핑크니 공사와 합류했다. 1805년 5월 스페인과의 협상이 난항을 거듭하자 먼로는 런던으로 귀환했으며 미국 선원의 강제징집과 상선의 나포에 관한 협상을 재개했다. 협상은 영국정부의 기피적인 태도로 교착상태에 빠졌고 1806년 5월 토머스 제퍼슨 대통령은 메릴랜드의 윌리엄 핑크니를 런던에 파견했다.

1806년 12월 31일 마침내 체결된 조약에는 강제징집에 대한 언급도 화물과 상선의 포획에 대한 보상도 규정되어 있지 않았고, 서명에 부수하여 프랑스가 해상법령을 공포한다면 무제한적인 보복을 서슴지 않겠다는 영국의 단서조항이 붙어 있었다.

먼로와 핑크니는 이들 문제에 있어서 정부의 훈령을 무시했으며 제퍼슨 대통령은 조약을 인정하지 않고 영국정부에 조약의 개정을 요구했다. 먼로는 1807년 12월 귀국해 1810년 봄 버지니아 주 하원에 진출했다. 그해 겨울에는 다시 주지사로 선출되어 1811년 1월부터 직무를 수행했으나 같은 해 11월 제임스 매디슨대통령에게 발탁되어 1817년 3월까지 국무장관을 지내게 된다(매디슨). 먼로는 '미·영 전쟁'을 전후한 혼란한 시기에 미국의 외교정책을 담당했으며 1814년 9월 27일 영국군이 워싱턴 D. C.를 점령하자 육군장관에 취임함으로써 1815년 3월까지 두 직책을 겸임했다.

대통령 시절

1816년 먼로는 미합중국 대통령으로 선출되었고 1820년 재선되었다.

1820년의 선거인단 선거에서는 단 한 사람의 반대자가 있을 뿐이었다. 흔히 '화합의 시대'라 일컬어지는 재임기간 동안 발생한 주요사건으로 1817~18년의 세머놀 전쟁, 1819~21년의 플로리다 획득, 1820년의 미주리 타협, 1822년의 라틴아메리카 신생독립국 승인 등이 있지만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1823년 12월 2일 공표된 먼로주의 외교선언이었다.

먼로의 외교선언이 '먼로주의'라는 명칭으로 널리 통용되기 시작한 것은 1852년에 들어서였다. 연방의회에서 '먼로 대통령의 원칙'이라고 지칭되었던 이 선언은 유럽 열강의 식민지 확대금지, 유럽 대륙에 대한 미국의 불간섭, 아메리카 대륙에 대한 미국의 불간섭이라는 3가지 항목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제4항이라 할 수 있는 기존 식민지에 대한 유럽 열강의 소유권 쟁탈금지는 대통령의 연두교서 발표 이전에 외교서한의 형식으로 공표되었으나 1869년에 가서야 먼로주의 원칙의 하나로서 받아들여졌다.

통설에 의하면 먼로주의의 기초자는 국무장관 존 퀸시 애덤스였다(애덤스). 반식민주의 원칙은 애덤스의 독창적인 발상이었고 유럽 문제에 대한 불간섭은 독립 이후 고수되어온 정책기조를 그가 정리한 것이며 아메리카에 대한 유럽 제국의 간섭금지는 국무회의에서 애덤스에 의해 주장되었다.

그러나 국무장관은 이러한 외교원칙을 대내외에 천명할 생각을 하지 않았고 따라서 교서에 이들을 구현할 책임은 대통령에게로 돌아갔다. 현대 사가들의 평가는 '먼로주의' 명칭이 갖는 의구심을 불식시키고 있다.

임기가 만료된 먼로는 워싱턴 D. C.를 떠나 오크힐의 가족들에게 돌아갔다. 먼로는 1826년 버지니아대학교 이사회장으로 추대되었고 1829년에는 주 헌법개정회의에 참석했다. 자신을 돌보지 않고 외교사절의 직무를 수행했던 그는 연방의회에 공직재임시의 개인지출을 변상해주도록 요청해야만 했다.

1826년 의회는 3만 달러의 보상을 승인했고 그가 사망한 뒤에는 상속인들로부터 그의 저작들을 사들이기 위해 약간의 예산을 책정했다. 먼로는 1831년 딸의 집을 방문하던 중 뉴욕 시에서 사망했으며, 그의 유해는 1858년 인상적인 기념행사가 진행되는 가운데 버지니아 주 리치먼드로 이장되었다. 제퍼슨, 매디슨, 애덤스 등 당대의 탁월한 정치가들이 먼로의 능력과 인품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지만 정작 먼로 자신은 이들과 비교되는 열등감에 사로잡혀 고통스런 나날들을 보내야 했다.

그들의 걸출함에 비견될 수는 없을지라도 먼로는 애덤스의 표현과 같이 "건전한 이성과 확고한 결단력을 갖춘" 위대한 정치가였음에 틀림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