핑크니

핑크니

다른 표기 언어 Charles Pinckn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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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757. 10. 26,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 찰스턴
사망 1824. 10. 29, 사우스캐롤라이나 찰스턴
국적 미국

요약 미국의 건국 시조, 정치지도자, 외교관.

핑크니 안(案)이라 불리는 그의 새 정부 구성안은 많은 부분이 1787년 제정된 연방 헌법에 반영되었다. 미국 독립전쟁 때 영국군에 붙잡혀 포로가 되었다. 1784~87년 3년 동안 제헌의회 의원으로 활동할 때는 연합헌장을 개정·강화하기 위한 국가협회의를 소집하는 데 지도적 역할을 했다.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제헌회의의 사우스캐롤라이나 대표로서 정부 구성에 관한 세부계획을 제출했는데, 그 초안은 남아 있지 않지만 많은 조항이 신헌법 속에 받아들여졌다고 한다. 핑크니는 연방 헌법의 양식·형태·내용을 결정하는 데 있어서 누구 못지 않게 커다란 역할을 한 것 같다. 고향인 사우스캐롤라이나에서 헌법의 비준을 위해 애썼고 1790년 사우스캐롤라이나 헌법을 개정하는 협의회를 주재했으며 1789~92년에는 사우스캐롤라이나 주지사로서 주정부와 연방정부의 조화를 꾀했다.

연방파로서 정치활동을 시작했으나 1791년 제퍼슨이 이끄는 공화파로 돌아섰다. 1792~96년과 1810~14년 주하원의원, 1796~98년과 1806~08년 주지사, 1798~1801년 연방 상원의원, 1819~21년 연방 하원의원을 지냈다. 그는 변경지방에게 더 많은 대표권을 주고 모든 백인 남자에게 선거권을 확대하도록 주 헌법을 개정할 것을 주장했다. 연방파의 정책에 반대하여 특히 1798년에는 적극적인 정치 활동을 벌이던 자신의 사촌 찰스 코티즈워스 핑크니와 토머스 핑크니를 이간시키기도 했다. 또한 그는 남부 출신으로서 미주리 타협(1820) 속에 포함된 노예제 제한조항을 격렬히 비난했다.

공화파에 대한 충성심 덕분에 그는 1801~05년 스페인 주재 대사로 임명되었다. 이곳에서 그는 스페인과 협정을 체결하여 훼기권(밀수, 전시 금수품 수송 등의 혐의가 있거나 적국선으로 의심이 가는 선박을 탈취할 경우 선박의 문서를 파기할 수 있는 권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합동재판소를 설치하고 뉴올리언스 항구에서 미국 선주들의 보관권(상품을 일시적으로 보관할 수 있는 권리)을 회복시켰다. 그는 또 나폴레옹이 미국에게 루이지애나를 매각하는 데 스페인의 동의를 얻어냈으나 미국의 플로리다 획득을 이루는 데는 실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