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주리 타협

미주리 타협

다른 표기 언어 Missouri Compromise

요약 미국 역사에서 북부와 남부 사이에 일어난 논란을 해결한 조치(1820).

이것이 연방의회에서 통과됨으로써 미주리는 미국의 24번째 주가 되었다(1821). 미주리 타협은 노예제 확대를 두고 이후 오랜 기간 지속된 지역 분쟁의 시작이었고 이 분쟁은 결국 미국의 남북전쟁으로 이어졌다.

미주리는 1817년 처음으로 새로운 주로서 연방 신청을 했으며 1819년초 연방의회는 미주리 주가 주헌법을 만들 수 있도록 하는 법률의 제정 여부를 검토했다. 그러나 뉴욕 주 하원의원 제임스 탤미즈가 이 법률에 노예제를 폐지하는 헌법수정안을 덧붙이려 하자 노예제와 노예제를 제한할 수 있는 정부의 권리에 대해 험악하고 악의에 찬 논란이 뒤따랐다. 텔미즈의 이 수정안은 미주리에 노예의 유입을 막고 미주리에 있는 노예들은 25세가 되면 해방시킨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 수정안은 수적으로 북부주들이 장악하고 있던 하원에서는 통과되었으나, 자유주와 노예주의 의석수가 똑같은 상원에서는 통과되지 못했다(→ 탤미즈 수정안). 결국 미주리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의회는 연기되었다. 1819년 12월 의회가 다시 열리자 메인이 주 가입을 요청했다. 이렇게 되자 상원은 메인을 자유주로, 미주리는 노예제에 대한 제한없이 연방에 들어오도록 허락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그뒤 일리노이의 상원의원 J. B. 토머스는 미주리를 노예주로 받아들이되 북위 36° 30′ 이북의 루이지애나 매입지에서는 노예제를 금지시키는 수정안을 첨가시켰다.

헨리 클레이 의원이 능숙하게 타협 세력을 이끄는 가운데 1820년 3월 3일 메인은 자유주로, 미주리는 노예주로 인정하고, 미주리를 제외한 36° 30′이북의 모든 서부 준주에서는 노예제를 금지하는 안이 하원에서 압도적 찬성으로 통과되었다. 그러나 미주리 주 제헌회의가 자유 흑인과 물라토(흑백 혼혈인)를 제외시키는 주 헌법을 만들자 새로운 위기가 일어났다. 많은 북부의원들이 이러한 인종차별 조항에 반대했고 헨리 클레이는 이들로부터 제2차 미주리 타협안 작성 요청을 받았다. 1821년 3월 2일 연방의회는 제외 조항이 미국 시민의 특권과 면제권을 박탈하는 의미로 해석되지 않아야 미주리가 연방에 들어올 수 있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미주리는 여기에 동의했고 1821년 8월 10일 미국의 24번째 주가 되었다. 메인은 앞서 3월 15일 주로서 승인받았다.

노예제는 이미 수십 년 동안 미국에서 불화를 일으키는 문젯거리였지만, 미주리 위기에서만큼 지역감정이 노골적이며 위협적으로 대립한 때는 없었다. 토머스 제퍼슨은 이 사태의 불안함을 "마치 한밤중의 화재경보같다"고 표현했다. 미주리 타협은 노예제 확대 문제를 해결한 듯했으나 이후 타협안이 1854년 캔자스-네브래스카 법에 의해 사실상 폐지되고 1857년 드래드 스콧 판결에서는 위헌으로 규정되자 지역 갈등이 커졌고 미국은 내란상태에 들어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