갤러틴

갤러틴

다른 표기 언어 (Abraham alfonse) Albert Gallatin
요약 테이블
출생 1761. 1. 29, 제네바
사망 1849. 8. 12, 미국 뉴욕 아스토리아
국적 미국

요약 미국의 4대 재무장관(1801~14 재임).

제퍼슨이 이끄는 공화당이 정권을 잡았을 때 정부가 안정된 재정정책을 계속 펴 나갈 것을 강력히 주장했고, 미·영전쟁(1812~14)을 끝내기 위해 영국과 협상을 했다.

갤러틴은 19살에 뉴욕으로 이민한 뒤 사업과 공직생활에 뛰어들었다.

펜실베이니아에 자리잡으면서 그 지역에서 연방주의자들에 반대하는 사람들 가운데 중심인물이 되었고 1795년에 하원의원으로 뽑혔다(→ 반연방주의자). 하원에서 그는 하원의 재무부문 위원회를 만들었는데 이 것은 뒤에 강력한 '재무위원회'로 커나갔다. 1797~98년에 그는 연방주의자들이 프랑스와의 전쟁을 위해 의회에 요구한 경비를 줄이는 데 개입했다. 그는 의회에서 연방주의자들로부터 신랄한 비난을 받았기 때문에 1798년 외국인 및 치안단속법이 의회에서 통과되었을 때 제퍼슨은 연방주의자들이 얼마간은 갤러틴을 몰아내기 위해 이 법을 통과시켰다고 생각했다.

제퍼슨 대통령 밑에서 재무장관을 지내면서 정부 규모를 간소화하는 일과 국채를 갚는 일에 중점을 두었다. 엄청난 해군 경비와 1,500만 달러의 루이지애나 매입(1803) 비용에도 불구하고 그는 8년 동안 국채를 2,300만 달러나 줄일 수 있었다. 그러나 미국이 1812년 영국과 전쟁을 선포하자 갤러틴이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재정삭감계획은 물거품이 되었다.

그는 전쟁이 국가 번영과 발전에 가장 큰 장애가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국가재정문제를 최우선에 두고 조기 평화를 이루기 위해 노력했다. 러시아가 평화중재안을 제시하자 그것을 검토하기 위해 1813년 5월 유럽으로 건너갔다.

그러나 영국이 미국과 직접 협상하고 싶다는 의향을 비쳐 마침내 두 나라 대표들이 1814년 8월 겐트에서 만나게 되었다. 협상이 오래 계속되는 동안 갤러틴은 평화원칙을 고수하며 논의를 이끌었고 외교관으로서 확고한 명성을 얻게 되었다. 결국 1814년 12월 24일 겐트 조약이 체결되어 전쟁은 끝이 났다.

유럽에 있는 동안 프랑스 공사(1816~23)를 지낸 뒤 미국으로 돌아왔으나 치열한 당파싸움에 말려들었다. 1824년 부통령 후보로 지명되었으나 외국 태생이라 당선될 가능성이 적다는 이유로 10월에 후보직을 포기했다. 잠깐 동안 영국 공사(1826~27)를 지낸 뒤 공직에서 물러나 뉴욕 시 국립은행(뒤에 갤러틴은행으로 바뀜) 은행장(1831~39)을 맡았다.

북아메리카 인디언 부족에 대해 공부하기도 했던 그는 1842년 뉴욕에 미국인류학협회를 세웠다. 그래서 '미국 인류학의 아버지'로 부르기도 한다. 그의 전기 가운데 헨리 애덤스가 쓴 〈A. 갤러틴의 생애 Life of A. Gallatin〉(1879)는 고전으로 꼽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