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퍼슨 데이비스

제퍼슨 데이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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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808. 6. 3, 미국 켄터키 크리스천
사망 1889. 12. 6, 루이지애나 뉴올리언스
국적 미국

요약 미국의 정치가.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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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요
  2. 초기생애
  3. 남부연합 대통령 시절
  4. 감옥생활

개요

남북전쟁(1861~65) 때 남부연합대통령을 지냈다.

전쟁이 끝난 뒤 반역죄로 기소되었으나 재판에 회부되지는 않았다.

초기생애

독립전쟁에 참여했으며 웨일스계 이민 출신으로 조지아 주에서 농장을 경영하고 있던 새뮤얼 에머리 데이비스의 10명의 자녀 가운데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3세가 되던 해, 데이비스의 가족은 미시시피 주 우드빌에 있는 로즈먼트 농장에 정착했다. 7세 때부터 3년 동안 도미니쿠스 수도회 소년학교를 다녔고 13세에 트랜실베이니아 학교에 입학했다. 그뒤 육군사관학교의 4년 과정을 마치고 1828년 임관했다. 위스콘신 준주(準州)에서 중위로 복무하던 데이비스는 훗날 대통령이 된 재커리 테일러중령 휘하에서 '블랙호크 전쟁'에 참전했는데 1835년에는 테일러의 딸 새러 녹스와 결혼하게 된다.

그는 당시의 기록에 따르면 '미남에, 재기가 가득하고, 장난스러운, 한 마디로 매력적인 젊은이'였다. 20대의 데이비스는 장신에 짙푸른 눈동자를 가진 금발이었다. 1835년 데이비스는 군에서 제대했고 맏형 조지프가 마련해 준 미시시피 주 빅스버그 농장을 경영하게 되었다. 결혼한 지 3개월이 못되어 새러가 말라리아로 죽었다. 데이비스는 황무지를 개간하고 한편으로 헌법학 서적과 세계문학을 탐독하면서 슬픔에 젖어 7년 동안 은둔생활을 했다.

1845년 하원에 진출한 데이비스는 같은 해 18년 연하인 내처스 출신 귀족의 딸 버리나 하월과 결혼한다.

멕시코 전쟁이 일어나자 의원직을 사퇴하고 참전, 뛰어난 전술로 부에나비스타 전투를 승리로 이끌면서 국민적 영웅으로 떠올랐고 유럽에서까지 언론의 격찬을 받았다. 중상을 입고 귀향한 뒤 다시 상원에 복귀했으며 곧 군사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1853년 프랭클린 피어스대통령에 의해 국방장관으로 지명되자 군사력 증강과 연안방위강화에 치중했고 3차례에 걸쳐 대륙횡단철도 건설을 위한 사전지형답사(事前地形踏査)를 실시했다(피어스).

노예제 문제로 지역간의 분열이 심화되던 시기에 데이비스는 남·북부 전체를 통하여 큰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미국의 화합을 주장했다.

1860년 12월 사우스캐롤라이나 주가 최초로 연방에서 떨어져 나왔을 때 여전히 탈퇴를 반대하는 입장을 견지했지만 내심으로는 헌법이 원래의 연방협약을 취소할 수 있는 권한을 보장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데이비스를 중심으로 한 세력은 새로 선출된 에이브러햄 링컨대통령이 남부를 억압할 것이며 이로 말미암아 재난이 야기될지도 모른다고 우려했다(링컨).

남부연합 대통령 시절

미시시피 주가 연방에서 탈퇴한 12일 후 데이비스는 상원을 떠나면서 감동적인 고별연설을 했다.

그는 절박하게 동포애와 평화를 호소했다. 그가 브라이어필드 농장으로 돌아왔을 때 앨라배마 주 몽고메리에서 열린 남부연합회의는 데이비스를 임시대통령으로 지명했다. 취임식(1861. 2. 18)을 가진 뒤 데이비스가 행한 첫 조치는 무력충돌을 피하기 위한 평화사절단을 워싱턴에 보내는 일이었다. 링컨은 이들의 방문을 거절했으며 섬터 요새 탈환을 목적으로 사우스캐롤라이나 주 찰스턴에 군함을 파견할 채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링컨이 7만 5,000명의 지원자를 징집한 직후 버지니아를 비롯한 남부 4개주가 연방에서 추가로 탈퇴하게 된다.

데이비스는 일촉즉발의 위기에 처했다.

초대 대통령으로서 통치상의 전례를 갖지 못한 그는 전쟁 와중에 새로운 국가체제를 마련해야 했다. 북부의 1/4에 불과한 적은 인구와, 북부에 비하면 보잘 것 없는 공업력, 열악한 철도망, 자원이라고는 대농장의 목화와 남부인의 용기뿐이고 화약공장·해군력·조선소라고는 아예 없는 남부 농업지역으로서는 침공에 대항할 힘이란 애당초 없었다. 데이비스 대통령은 무기와 탄약을 확보하기 위해 유럽에 구매단을 보냈고 외교적 승인을 얻기 위해서 영국과 프랑스에 대표단을 파견했다.

1861년 6월 남부연합의 수도가 몽고메리에서 버지니아 주 리치먼드로 바뀌고 성급하게 공격을 감행하려던 북군은 7월 21일 머내서스에서 격퇴되어 포토맥까지 밀려났다.

그러나 데이비스 대통령의 고민은 커져만 갔다. 의회는 쓸데없는 논쟁으로 일관했고 부통령과는 의견이 일치되지 않았으며 주지사 2명은 징용법에 반대했고, 데이비스의 배려로 원칙상 검열을 받지 않게 된 신문들은 악의에 찬 논설을 계속했다. 전투에서의 패배와 끊임없는 불안감, 터무니없이 부족한 병력과 무기, 극심한 인플레이션 등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은 총사령관 로버트 E. 장군의 보좌를 받는 가운데 항전의사를 버리지 않았다(리). 1864년 9월 북부의 한 작가는 〈애틀랜틱 먼슬리 Atlantic Monthly〉지에 다음과 같은 기사를 낸다.

"우리가 그와 인터뷰를 가졌을 때 재력이 이미 바닥나고, 주요 도시들은 거의 전부 함락되었으며, 수적으로나 장비면에서 엄청난 열세에 있는 남부연합이 어떻게 그토록 오랫동안 버틸 수 있었는가에 대하여 비로소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제퍼슨 데이비스의 정열과 명민함 그리고 불굴의 의지 때문이었다."

감옥생활

리 장군이 대통령 승인도 없이 북군에 항복하자 남부연합 정부는 상황이 호전될 때까지 트랜스미시시피 지역에서 항전을 계속하기로 결정했다.

1865년 5월 10일 저녁 데이비스 남부연합 대통령은 조지아 주 어윈빌 근교에서 체포되었고 족쇄가 채워진 채 버지니아 주 먼로 요새의 습습한 골방에 갇혔다. 2명의 간수가 밤낮으로 감시했으며 침대 곁의 램프는 꺼질 줄을 몰랐다. 이러한 사실을 전해 듣고 분노한 북부인들은 데이비스의 보다 나은 처우를 요구했지만 그는 이로부터 2년을 더 감옥에서 보내야 했다. 데이비스는 1867년 5월 병보석으로 풀려났고 요양차 캐나다로 건너갔다.

그가 소망한 대로 몇몇 명망있는 북부 변호사들이 변론을 자청하고 나섰으나 그의 신변처리문제가 법정에까지 비화되지는 않았는데, 개별 주의 연방탈퇴를 허용하는 헌법판례를 남기지 않기 위해서였다. 1868년 12월 25일 마침내 제퍼슨 데이비스에 대한 공소취하(公訴取下) 결정이 내려졌다.

데이비스는 건강을 회복하고 한편으로는 영국 회사의 대리인 자리를 얻을 목적으로 5차례에 걸쳐 유럽을 여행했다.

남부의 3개 대학에서 총장으로 영입하겠다는 제의가 있었지만 그 수입은 아내와 4명의 자녀를 부양하기에 벅찬 것이었다. 데이비스는 몇 년 간 테네시 주 멤피스에 있는 보험회사 사장으로 일하다가 후원자가 마련해준 미시시피 주 벌락시 근교의 보부아르 농장으로 은퇴했고 여기에서 〈남부연합의 흥망 Rise and Fall of the Confederate Government〉을 썼다. 상원에 복귀할 것을 촉구하는 사람들이 많았으나 스스로 불의를 행했다고 생각하지 않은 까닭에 의원이 되기 위한 대사(大赦)를 요청할 의사는 없었다.

그는 평생 시민권을 회복하지 못했지만 자타가 공인하는 남부의 지도자로 남았다.

데이비스는 민주주의의 신봉자였지만 천성적으로는 자비심 많은 귀족이었다. 외교적인 수완도 갖추었으나 정치가의 교활함을 갖고 있지는 않았다. 엄격한 기품과 함께 너무나도 따뜻한 성격의 소유자로서 가족과 친지들의 존경뿐 아니라 거느리던 노예들로부터도 사랑을 받았다.

전쟁기간에도 북부의 오랜 친구들을 잊지 않았으며 수많은 저명인사들이 서슴지 않고 제퍼슨 데이비스에 대한 애정을 표시했다. 어떤 교회에도 속하지 않았던 그는 50세가 넘어 감독교회의 신자가 되었다. 데이비스는 여생 동안 신의 은총이라는 순수한 신앙에 의지했다. 젊어서는 군대와 의회에 깊은 영향을 미쳤고, 만년에 이르러서는 남·북 두 지역의 화해를 호소했다.

데이비스가 뉴올리언스에서 기관지 질환으로 사망하자 남부사상 최대의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애도의 물결이 줄을 잇는 가운데 1893년 5월 31일 리치먼드의 할리우드 묘역에 영구 안치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