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부연합

남부연합

다른 표기 언어 Confederate States of America , 南部聯合

요약 미국 남북전쟁 초기인 1860년부터 1861년 사이에 연방으로부터 탈퇴한 남부 11개 주 정부.

남부연합(Confederate States of America ) 국기
남부연합(Confederate States of America ) 국기

1865년 봄 패배할 때까지 전쟁을 지휘하고 하나의 개별정부로서 모든 업무를 자치적으로 수행했다.

노예제에 기반을 둔 생활방식을 고수하던 남부인들은 에이브러햄 링컨이 대통령으로 당선되자(1860. 11) 강한 위기의식을 느꼈다. 몇 달 후에는 디프사우스(Deep South)의 7개 주(앨라배마·플로리다·조지아·루이지애나·미시시피·사우스캐롤라이나·텍사스)가 연방에서 떨어져나갔고, 섬터 요새에서의 교전으로(1861. 4. 12) 전쟁이 급진전하자 어퍼사우스(Upper South)의 4개 주(아칸소·노스캐롤라이나·테네시·버지니아)가 이에 합류했다.

1861년 2월 앨라배마 주 몽고메리에 세워졌던 임시정부는 1년 후 버지니아 주 리치몬드에서 연방정부와 유사한 체제를 갖춘 정식 정부로 출범했으며, 대통령에 제퍼슨 데이비스, 부통령에는 알렉산더 H. 스티븐을 내세웠다(데이비스). 곧이어 '별과 막대들'로 알려진 깃발과 자체 우표 등 주권국가임을 나타내는 여러 가지 상징들을 갖추었다.

제퍼슨 데이비스(Jefferson Finis Davis)
제퍼슨 데이비스(Jefferson Finis Davis)

남부연합의 주된 관심사는 군대를 편성하고 군비를 마련하는 일이었다.

남부 의회는 우선 40만 명 규모의 자원부대 설치안을 가결시켰으나 1862년 4월부터는 징병제가 실시되기 시작했다. 그결과 모집된 병력의 총수는 75만 명 정도였는데, 이것은 북부 연방군의 1/2에 불과했다(남부연합의 인구는 백인 550만, 흑인 350만 정도였고 북부는 2,200만 명을 기록하였음). 철도의 경우 공업지대인 북부의 35만 2,000㎞에 비해 남부는 겨우 1만 4,400㎞ 정도를 확보하고 있었다.

남부연합은 재정확보를 위해 우선 통화발행과 현물상환이 가능한 채권발행에 힘썼으나 화폐주조의 결과 고도의 인플레이션이 유발되었다.

남부 항구에 대한 연방의 봉쇄조치 때문에 관세 수입이 격감하자 1863년 일반조세법안이 통과되어 면허·직업세·이윤세가 신설되었고 현물로 징수되는 농산물에는 10%의 세금이 가중되었다. 이윤 높은 사적 밀수업은 1864년 엄격한 감독을 받게 되었으며 군대에 납품되는 농산물의 가격도 더이상 부당이익을 남길 수 없도록 책정되었다. 외교에 있어서 초기에는 면화왕(King Cotton)의 힘과 영향력에 대하여 낙관적이었다(면화왕). 면화는 남북전쟁 이전에 합중국 수출액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중요한 작물이었고 남부인들은 면화의 중요성 때문에 연방정부와 유럽 각국으로부터 쉽게 외교적 승인을 얻어낼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1861년 파견된 특사도 뒤이어 보낸 전권공사도 영국·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열강들로부터 외교적 승인을 얻어낼 수 없었다. 그렇지만 상당한 전쟁물자를 사들일 수 있었고 공해상에서 연방 상선들을 괴롭혔던 쾌속정도 여러 척 구입할 수 있었다.

데이비스 대통령은 군사정책과 주요전략을 수립하는 데 적극적이었지만 전장의 위대한 지도자는 로버트 E. 장군이었다(리). 초기 2년간의 군사적 승리에 도취되어 남부는 최후의 승리까지 장담하고 있었다.

그러나 1863년 7월 게티즈버그와 빅스버그에서 연방군이 잇달아 승리를 거두었을 때 환상은 깨어졌다. 동부전선에서의 리 장군의 뛰어난 전술이나 서부전선의 조지프 E. 존스턴장군의 역량도 막강한 북군의 공세를 저지할 수는 없었다.

1865년 4월 9일 버지니아 주 애퍼매턱스에서 굶주림에 허덕이던 리 장군의 부대가 항복하게 되자 남부연합은 곧바로 붕괴되었다(애퍼매턱스코트하우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