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인홀드 니부어

라인홀드 니부어

다른 표기 언어 Reinhold Niebuh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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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892. 6. 21, 미국 미주리 라이트시티
사망 1971. 6. 1, 매사추세츠 스톡브리지
국적 미국

요약 1920년대에 널리 퍼져 있던 자유주의 신학을 비판하여 미국 개신교 안의 지적 분위기와 정치사상에 큰 영향을 주었다. 예일대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한 라인홀드 니부어는 디트로이트에서 목사로 일하는 동안 노동문제에 관심을 가져 미국 산업사회의 문제점들을 폭로하고 사회주의를 옹호하게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때는 그리스도인들을 설득하여 대 히틀러 전쟁을 지원하도록 촉구하기도 했다. 니부어는 에큐메니컬 운동에 영향을 끼친 최초의 그리스도교 신학자로서, 그리스도인들이 유대인들을 자신들의 신앙으로 개종시키려 한 것이 부적절했다는 견해를 개진했다. 니부어는 신학을 포함해 어느 특정 학문의 전문가도 아니었지만, 폭넓은 학식과 독창적이고도 예리한 사상에 힘입어 많은 논문과 학구적인 글을 썼으며, 많은 분야의 학문과 사상에 발전적인 영향을 주었다.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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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요
  2. 초기생애
  3. 목사 겸 신학자
  4. 정치활동
  5. 평가

개요

라인홀드 니부어는 정치사상에도 큰 영향을 끼쳤고, 1920년대에 널리 퍼져 있던 자유주의 신학을 비판하여 미국 개신교 안의 지적 분위기에 영향을 주었다.

디트로이트에서 목사로 일할 때 미국 산업사회의 문제점들을 폭로하고 한동안 사회당에 몸담아 활동했다. 한때 평화주의자였지만 그리스도인들을 열심히 설득하여 대(對) 히틀러 전쟁을 지원하도록 했고, 제2차 세계대전 뒤에는 미국 국무부 안에 상당한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 가장 뛰어난 신학 저서 〈인간의 본성과 운명 The Nature and Destiny of Man〉은 르네상스의 통찰력과 종교개혁 신학을 종합하려는 의도에서 썼다.

초기생애

젊은 나이에 독일에서 미국으로 이민한 구스타프 니부어와 리디아 니부어의 아들로 태어났다.

구스타프 니부어는 '복음주의 북아메리카 노회' 소속 목사였다. 이 교단은 1934년 '복음주의 개혁교회'에 들어온 독일 루터파 개혁주의를 배경으로 삼고 있었고, 오늘날은 '연합 그리스도의 교회'(United Church of Christ)에 소속되어 있다. 라인홀드 니부어는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이어 목사가 되기로 결심하였다. 일리노이 주에 있는 자기 교단 소속 엘름허스트대학(1910)과 미주리 주 세인트루이스에 있는 에덴 신학교(1913)를 졸업하였으며, 마지막으로 예일대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해 신학사(1914)와 문학석사(1915) 학위를 받았다.

1915년에는 '복음주의 시노드'의 목사가 되었다.

목사 겸 신학자

1915~28년 디트로이트에 있는 벧엘 복음주의교회 목사로 일했다.

이 교회에서 얻은 경험을 통해, 특히 노동이 노동조합과 사회법으로 보호받지 못하던 시대의 미국 산업사회, 특히 자동차 산업이 안고 있는 문제들을 폭로하는 가운데 급진적인 자본주의 비판가가 되었고, 사회주의를 옹호하게 되었다. 디트로이트 시절을 적은 〈길들여진 한 냉소가의 노트에서 추린 몇 편의 글 Leaves from the Notebook of a Tamed Cynic〉(1929)에는 라인홀드 니부어가 평생 지녔던 사상과 정신의 경향이 잘 나타나 있다.

라인홀드 니부어는 또한 이 책에 잘 표현되어 있는 바와 같이 신자 개인에 대한 목회자로서의 관심을 잃지 않고 살았다. 글을 쓸 때나 공적인 일에서는 대단한 논쟁가였지만, 개인적으로 학생들을 대할 때는 따뜻하고 친절한 사람이었다. 신학이나 궁극적인 철학적 견해에 대한 문제로 니부어의 비판의 대상이 되었던 사람들도 사회문제나 정치문제에서는 동료로 일했던 경우가 많았다.

1928년 목회사역을 그만두고 뉴욕 시에 있는 유니온 신학교 교수가 되어 1960년 은퇴할 때까지 이 학교의 지적·인격적 기둥 역할을 했다.

신학자로서는 인간의 삶에 깊이 뿌리박힌 악을 강조한 '기독교 현실주의'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 Moral Man and Immoral Society〉(1932)에서 국가와 계급들의 이기주의와 자만심 및 위선을 비판하였다. 그뒤 이런 것들은 결국 유한한 인간의 지나친 자기방어와 불안의 산물이라고 보았으며 바로 이것을 '원죄'라고 했다.

또 죄는 인간성취의 모든 단계에서, 특히 종교적으로든 정치적으로든 완전성이 주장되는 곳에서 파괴적인 교만의 형태로 나타난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진보에 대한 희망과 급진적인 유토피아에 대한 희망을 확신하는 자유주의 신념에 대해 신랄한 논쟁을 벌였는데, 이때문에 라인홀드 니부어의 다른 가르침, 즉 모든 사람 안에는 죄가 완전히 파괴시킬 수 없는 하느님의 형상이 있다는 가르침과, 공인된 그리스도교의 구원과는 별개로 개인이나 집단의 삶 속에 '보편적인 은총'이 존재한다는 등 보다 희망적인 가르침은 세간의 주목을 끌지 못했다. 니부어는 낙관적인 정치적 행동주의자였고 자만심을 극복하면 선을 얻을 수 있음을 강조했다.

라인홀드 니부어의 견해는 다음과 같은 그의 말에 잘 나타나 있다. "성자들은 은총이 계속 풍성하게 내려질 것이라고 보고 싶어 하는 반면에, 죄인들은 인간 관계를 좀더 견딜 만하고 공정하게 만들기 위해 고생하면서 땀흘린다." 인간이 역사적인 문제들을 스스로의 힘으로 완전히 해결할 수 있다고 착각하지 않는 한 역사 속에는 인간의 '형체가 정해지지 않은 가능성'이 있다고 늘 믿었다. 비록 죄와 은총을 강조하여 종교개혁 신학(이른바 신정통주의)이 되살아나도록 많은 격려를 했지만 니부어의 대표적 신학저서 〈인간의 본성과 운명〉은 종교개혁과 르네상스의 시각을 종합하려는 계획에서, 특히 르네상스적 문화의 성취를 기대하면서 썼다.

라인홀드 니부어가 너무나 그리스도 중심적인 형태를 띤 프로테스탄트 신정통주의와 거리를 두었다는 사실은 유대교 공동체를 보는 그의 독특한 시각에서 볼 수 있다.

라인홀드 니부어는 에큐메니컬 운동에 영향을 끼친 최초의 그리스도교 신학자로서, 그리스도교와 유대교의 관계에 대한 연구를 통해 그리스도인들이 유대인들을 자신들의 신앙으로 개종시키려 한 것이 부적절했다는 견해를 개진했다.

정치활동

초기 정치활동은 자신이 품었던 사회주의 신념에 영향을 받아(그는 '사회주의 그리스도인 동지회'의 창설자였음) 사회당 후보자로 여러 차례 공직에 출마했다.

1930년대에 사회당이 외교정책에서 평화주의 내지 불간섭주의 정책을 취한 데 불만을 느껴 탈당하고 1940년대에는 '반공민주당'의 좌파 당원이 되었다. '민주주의 실천을 위한 미국인들의 모임'을 만들고 한동안 의장직을 맡았으며, 뉴욕 주에 있는 자유당 부의장직을 맡기도 했다. 1930년대에는 마르크스주의 이론에 큰 영향을 받았으나, 마르크스주의의 절대화를 거부하고, 미국 공산주의자들의 정책과 소련 스탈린주의를 모두 반대했다.

라인홀드 니부어는 평화주의에 영향받은 그리스도인들을 설득하여 대(對) 히틀러 전쟁을 지원하도록 하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라인홀드 니부어 자신도 제1차 세계대전에 혐오감을 느낀 평화주의자였지만, 1930년대에는 정치문제를 해결하는 데 보편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비폭력적인 해결책만을 주장하는 일체의 평화주의에 대해서 강하게 반대하는 신학자가 되었다. 니부어는 자신을 독일 안에 있는 대(對) 히틀러 저항세력과 동일시하고 적대적 평화를 반대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국무부 정책입안자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으며, 유럽에서 소련의 정치적 팽창을 막는 냉전을 강력히 지지했다.

라인홀드 니부어의 정치활동은 냉전의 초기단계에 끝났지만, 그의 후기 사상은 이 시기의 견해를 뛰어넘는 능력을 보여주었다. 저서 〈미국역사의 아이러니 The Irony of American History〉(1952)에서는 미국의 반공정책을 정당화하는 반면, 미국 메시아주의를 비판하고 미국인들이 자신들을 정당화하는 십자군운동 같은 것을 벌이려는 데 반대했다. 니부어는 언제나 미국인들의 도덕적 우월감을 비판했다.

일찍이 미국은 중국 본토를 인정하는 데 찬성했고, 월남전은 처음부터 반대했다. 제2차 세계대전 뒤에 생겨난 신생국가들의 문제를 미국이 떠맡으려는 시도는 그릇된 일로 여겼다.

종교적 평화주의와 사회주의 성격을 띤 잡지 〈월드 터모로우 The World Tomorrow〉, 광범위한 사회와 종교적 관심사를 다룬 격주간지 〈그리스도교와 위기 Christianity and Crisis〉, 지금은 폐간되었지만 〈급진적인 종교 Radical Religion〉로 출간되다가 나중에는 〈그리스도교와 사회 Chrisianity and Society〉라는 명칭으로 바꾼 계간지의 편집인이었다.

1931년 어셀러 M. 케펄 컴프턴과 결혼했는데 부인은 뉴욕 시에 있는 버나드대학에서 종교학을 가르쳤으며, 이 부부는 서로 긴밀히 협조하면서 일했다.

1952년부터는 건강이 크게 나빠져 공적인 활동을 하는 데 큰 어려움이 있었지만, 강의와 집필활동은 계속할 수 있었다.

평가

유명한 정치학자 한스 J. 모건소는 라인홀드 니부어가 교회 안팎의 정치사상에 끼친 큰 영향을 염두에 두고 그를 '현존하는 미국인들 가운데 가장 위대한 정치철학자'라고 평가했다.

라인홀드 니부어는 1920년대초부터 1950년대초까지 대학교회에서 가장 인기있는 설교자로 꼽힌다.

라인홀드 니부어의 설교로 많은 현대 그리스도교인들은 그리스도교가 의미를 갖고 있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니부어는 신학을 포함해서 어느 특정 학문의 전문가도 아니었지만, 폭넓은 학식과 독창적이고도 예리한 사상에 힘입어 많은 논문과 학구적인 글을 썼으며, 많은 분야의 학문과 사상에 발전적인 영향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