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큐메니즘

에큐메니즘

다른 표기 언어 ecumenism 동의어 교회 일치 운동

요약 범세계적인 그리스도교의 일치와 협력을 지향하는 운동이나 경향.

에큐메니즘(ecumenism)
에큐메니즘(ecumenism)

최근에 생겨난 이 용어는 그리스도교 교회들의 보편성을 강조한다.

'에큐메니즘'이라는 용어는 '오이쿠메네'(oikoumenē : '사람이 살고 있는 세계')와 '오이코스'(oikos : '집')에서 유래한 것으로, 그 기원은 예수의 명령·약속·기도에서 찾을 수 있다. 1910년 에든버러에서 국제선교대회가 열린 뒤 개신교도들은 선교·복음전도·봉사·연합세력 등의 모임을 표현하는 데 '에큐메니즘'이라는 용어를 쓰기 시작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65) 진행 기간과 폐회 이후 로마 가톨릭교도들은 교회 전반의 삶을 쇄신하여 '갈라져나간 교회들'에 대해서 더욱 책임을 지고 세계의 요구를 충족시키는 일을 가리키는 데 이 용어를 사용했다.

에큐메니즘 운동은 다양성 속의 일치를 추구한 초대교회의 사도 의식을 회복하려 하며, 현대 다원주의 세계의 좌절·곤경·모순들과 대결한다. 이 운동은 하나이며 거룩하고 보편적인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적인 교회의 역사적 근거와 지향점에 대한 생생한 재평가이다.

현대적인 의미에서 그리스도교의 에큐메니즘의 가능성은 다소 역설적이긴 하지만 17, 18세기에 증가했다.

이때 영국의 비국교도 분파들과 유럽의 경건주의 분파들은 복음전도·부흥운동·선교활동에 정력을 쏟았다. 이들의 활동은 같은 시기에 발생한 계몽주의 사상과 함께 분리된 교회 구조들을 떠받치고 있던 전통적인 토대들을 무너뜨렸다. 그밖에도 교회의 단일성에 대한 전통적인 관념이 무너지면서 19세기에 새로운 실험 가능성이 열렸다. 또한 미국에서는 교회와 국가가 분리됨으로써 많은 종교들이 공존하는 나라일 경우 종교적 권리들을 존중할 필요가 있음을 느끼는 계기가 되었다.

19세기초에 많은 선교사들이 파송되면서 국내에서 교파를 초월한 협력 가능성들이 나타났고, 아울러 해외에서 그리스도교 교파들 사이에 경쟁과 투쟁으로 인한 추문이 폭로되기도 했다.

20세기초 에큐메니즘은 ① 에든버러 대회(1910)에서 시작하여 '국제선교협의회'(International Missionary Council, 1921)라는 조직으로 모양을 갖춘 개신교의 국제선교대회, ② 로잔 대회(1927)에서 시작한 '신앙과 직제협의회'(Faith and Order Conferences : 교회 교리와 정책에 관한 모임), ③ 스톡홀름 대회(1925)에서 시작한 '생활과 노동협의회'(Life and Work Conferences : 사회적·실천적인 문제들에 관한 모임) 등 3가지 운동을 통하여 추진력을 얻었다.

1937년 '옥스퍼드 생활과 노동협의회'(Oxford Conference of Life and Work)에서 이 협의회를 '신앙과 직제협의회'와 연합하자는 제안이 상정되었다. 에큐메니즘의 자문과 협의 매체로서 민족적·교파적·지역적 신앙고백 단체들과 함께 활동하는 세계교회협의회(World Council of Churches/WCC)가 1948년 암스테르담에서 출범했고, 1961년 국제선교협의회가 WCC에 가입했다.

WCC의 지속적인 발전에 반대하는 개신교 운동들도 그들 나름대로의 에큐메니컬한 구심체를 형성했다. 이 구심체에 참가한 교단들은 스스로를 '복음주의'라고 했다. 미국에서는 1943년 전국복음주의협회(National Association of Evangelicals)가 결성되었는데, 이 협회가 결성된 것은 1908년에 시작하여 1950년 전국교회협의회(National Council of Churches)로 재조직된 연방교회협의회(Federal Council of Churches)에 맞서기 위함이었다. 복음주의 교단들은 구체적인 협력의 통로인 국제적인 차원의 조직들을 많이 갖고 있다.

1961년 교황 요한네스 23세는 '그리스도교 일치 증진을 위한 사무국'(Secretariat for the Promotion of Christian Unity)을 설립했고, 정교회는 '범(汎)정교회협의회'(Pan-Orthodox Conference)를 만들었다.

로마 가톨릭 교회, 정교회, 오순절교회, 개신교 교회들 간의 대화는 세례, 성찬, 목회의 본질 같은 쟁점들에 대해 일반적인 공감대를 형성시켜왔다.

한국의 에큐메니즘

한국에서는 8·15해방 후 현대 에큐메니즘 신학이 본격적으로 소개되었고, 나아가 단순한 교회연합사업이 아닌 신학적 배경을 가진 일치운동이 소개되기 시작했다.

1948년 8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20세기 에큐메니컬 운동의 본산인 WCC 창립총회가 개최됨에 따라 한국대표단이 참석하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한국에서 에큐메니컬 운동이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이에 앞서 한국 교회에서는 8·15해방 후 교파 환원작업과 함께 1946년 한국기독교연합회(NCC)의 조직 작업이 추진되었고, 이어 1946년 9월 장로교·감리교·성결교·구세군 등의 교파와 선교회 및 연합기관이 여기에 참여하게 되었다.

WCC가 세계 교회 일치운동의 주체로 부상하고 NCC의 가입 교회들이 역시 WCC와 관련을 맺기 시작하면서 에큐메니즘 신학 자체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여 에큐메니컬 운동 자체에 대한 찬반 시비가 한국 교계에 파문을 일으켰다. 일치운동의 신학적 규명 없이 단순한 교회연합사업의 지향에만 치중하던 선교 초기나 일제강점기에는 연합운동 자체에 대한 반대의사나 오해는 적었다.

그러나 하나의 신학적 배경을 가진 에큐메니컬 운동의 유입은 한국 교회를 적극적인 수용과 반대로 양분했다. 이에 대한 혼란의 단적인 예로 1954년 WCC 제2차 총회에 이미 기독교장로회와 분열한 예수교장로회측이 탈퇴하여 옵서버로 참석했고, 뒤이어 예수교장로회는 WCC 참가 여부를 놓고 한차례 진통을 겪게 되었다. 1959년에 진행된 합동측과 통합측(이후 가입)의 분열이 그것이다. 이때 한국 교계에는 에큐메니컬 운동의 성격을 의심하고 이를 배격하는 단체로 복음주의협회(NAE)가 대두되었고, 한국 교회 전체가 NAE냐, NCC냐로 양분되어 논쟁이 진행되었다.

NCC측은 에큐메니컬 운동이란 그리스도를 믿는 형제들끼리 비록 그 믿는 형태·조직·교회가 다르다고 해도 복음증거를 위해 협조와 화해의 정신으로 공통된 신앙을 다함께 증거하고 봉사하려는 운동이라고 했고, NAE측은 에큐메니컬 운동을 추진하는 집단을 신(新)신학 집단이요, 교회일치를 부르짖으면서 세계 단일교회를 형성하려는 집단이요, 용공단체이며, 세속적 집단이라고 맹공했다.

그 비난 중에서도 용공시비는 양측의 가장 큰 논란의 대상이 되었으며, 그 파급효과도 컸다. 이 논쟁은 장로교뿐 아니라 성결교회마저도 기독교성결교와 예수교성결교로 분열되는 결과를 낳았다. 이러한 분열상 속에서도 NCC측은 WCC와 관계를 유지하면서 한국 교회의 제반 대사회적 문제와 연합사업에 주력했으며, 반에큐메니컬 측은 NAE 등 연합된 세력권을 형성, NCC를 통렬히 공박하는 등 한국 교계에는 양극화 현상이 빚어졌다.

이와 함께 한국 교계는 국제기독교연합회(ICCC)라는 보수 조직체의 영향으로 말미암아 더욱 혼란을 겪으면서 분열되지 않는 교파가 없을 정도였다.

세계 교회사상 한국 교회와 같이 에큐메니컬 주동측과 반대측이 격렬한 대립을 보여온 곳은 드물다. 그러나 1960년 이후 이러한 대립에 대한 반성이 제기되면서 화해와 반성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특히 1964년 종교개혁 이후 수백년사에 획기적인 전환점인 제2 바티칸 공의회를 기점으로 가톨릭측은 개신교와의 화해를 모색하게 되었다.

즉 개신교와 가톨릭 지도자들은 사회문제에 대하여 공동토론을 하면서 서로의 이해와 접근을 모색했다. 신구교 일치운동의 최대의 업적은 성서 공동번역사업이라고 할 수 있다. 신구교는 최근에 이르러서 그 공식협의체인 한국교회 사회 선교협의회를 통해 정치·사회 문제에 있어 공동 보조를 취하고 있다. 이러한 신구 교회간의 화해 분위기에 못지않게 개신교 교파간에도 협조 노력이 계속되었다. 1947년부터 시작된 부활절 연합예배가 1962년부터 장로교 통합측과 합동측의 분열의 파급으로 갈려 진행되다가 1973년부터 통합행사로 이루어지고 있다.

그밖에도 빌리 그레엄 전도집회, 엑스폴로 대회, 민족복음화 대성회 등 대규모 대중집회가 교파 차이를 극복하고 연합사업 형태로 추진되어 새로운 가능성을 보였고, 이를 바탕으로 하여 그리스도교 100주년 기념사업을 보수·진보 양측이 협력하여 진행함으로써 한국 교회 일치운동의 역사적 전기를 마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