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주의

평화주의

다른 표기 언어 pacifism , 平和主義

요약 분쟁을 종식시키는 방식의 하나로 전쟁과 폭력의 반대 개념.

이 원칙의 입장에서 보면 국가가 교전을 개시하거나 개인이 전쟁에 참가하는 행위는 어떤 경우에도 잘못된 것으로 판단된다.

고대 사회에서 일부 집단은 전쟁을 필요악이라고 생각한 반면 어떤 집단은 아예 악한 것이라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여러 나라에서 개인들이 전쟁의 사악함을 비난하고 나섰지만 인류 최초의 진정한 평화주의 운동은 불교에서 나왔다고 할 수 있다. 불교의 창시자인 석가모니는 추종자들에게 절대 살아있는 동물들에게 해를 입혀서는 안 된다고 가르쳤다. BC 3세기 석가모니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아소카 대왕은 전쟁을 포기한다고 선언했지만 그가 말한 전쟁은 정복전에 한정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뒤 불교는 불교가 도입된 나라의 군주들이 서로 전쟁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이렇게 된 것은 불교의 가르침이 개인의 완성을 강조한 것이므로 그 가르침을 그대로 따를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서양의 고전시대에 평화주의는 극소수 지식인들의 마음속에 살아 있는 이상에 불과했다. 스토아주의를 포함한 그리스의 평화관은 민족이나 왕국의 집단적 행동에 바탕을 둔 것이라기보다는 개인의 평화로운 행동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로마 시대에 평화란 국가나 왕국 간의 협약에 의해 얻어지는 것으로 정의되었으며, 이 협약에 의해 '공정한' 상황이 창조되고 또 쌍방간의 인지를 얻어낼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이같은 사법적 접근은 어디까지나 '문명사회'에만 적용되는 것이었다.

따라서 1, 2세기에 수립된 로마의 평화(Pax Romána)는 문명사회만을 대상으로 하고 야만인은 배제했으므로 전세계적인 개념은 아니었다. 게다가 야만인의 위협이 그칠 날이 없어서 로마인은 이 위협에 대비해 변방을 지켜야 했다.

복음을 전파한 그리스도교는 집단의 평화는 물론, 개인의 비폭력도 주장했다. 〈신약성서〉에 기록되어 있는 예수의 가르침은 일종의 평화주의적인 것이며 예수의 초기 급진적인 추종자들은 실제로 그렇게 해석했다. 예수가 말하는 '평화'는 종교적 윤리를 실천하는 소수민족이나 종파에게만 적용되는 것인 데 비해 그리스도교 교회는 전세계적으로 평화가 필요하다는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예수가 살아 있던 시절부터 군인의 존재(평화 추구와 전쟁수행 사이의 불일치)는 그리스도교도들에게 부담스러운 것이었다. 그러나 3세기초 복음서의 특정 구절을 들어 군대의 존재가 용인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악마와 싸우기 위해서 필요하다는 해석이 나왔다. 5세기초에 저술된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론 De Civitate Dei〉은 세속적 평화와 내세적 평화를 구분했다.

그는 세속적 평화란 그리스도교 법과 일치할 때만 용인될 수 있는 것이며, 현세의 국가들은 당연히 교회에 봉사하고 교회의 권위를 파괴하려는 자들로부터 교회를 보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같은 사상은 중세 내내 그 영향력을 발휘했고 종말론적인 황제들이 내세운 신화(神話)들과 빈번하게 결합되었다. 이들 황제들은 비신자들을 탄압하는 것이 세계의 평화를 가져오는 길이라고 믿었다.

당시에는 악마라고 간주되었던 비그리스도교도들로부터의 위협이 끊이지 않았으므로, 로마의 평화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교의 평화도 비그리스도교로부터 영원히 수호되어야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르네상스 이후 평화주의의 개념은 다양한 정치적 영향을 받으면서 발전해왔다. 17, 18세기의 주된 평화주의 사상은 정치권력이 군주로부터 일반대중에게로 이동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같은 사상에 따라 전쟁은 군주들의 왕조적 야망과 권력투쟁으로부터 일어나는 것이라고 생각되었으며, 따라서 군주들은 국가를 자신의 개인적 사유물로 생각하여 전쟁을 일으키는 반면 공화국은 평화를 사랑한다는 환상이 번져나갔다.

이러한 사상의 부산물로 19세기 유럽에 평화주의적 기구가 창설되었는데, 총체적인 무장해제나 국제간의 분쟁을 조절하기 위한 특별법정 같은 것이 여기에 해당된다. 이렇게 하여 평화주의라는 사상은 대중의 관심을 끌게 되었으며, 이 주제에 대하여 폭넓은 논저가 저술되었다. 이같은 사상은 후일 헤이그 국제사법재판소, 국제연맹, 국제연합(UN), 잠정적 군축회담 등으로 결실을 맺었으나 전체적으로 보아 그 효과는 아주 제한되어 있었다.

예를 들어 19세기에는 5개 강국이 서로 세력균형을 이루는 정치적 구도를 통해 비교적 안정된 평화가 얻어질 수 있었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와 2번의 세계대전, 핵 위협, 개발국과 개발도상국 사이의 끊임없는 갈등 등으로 인해 평화주의적 원칙과 실천이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

평화주의적 행동에는 일반적으로 2가지 접근방법이 있다.

첫째, 평화주의를 옹호하는 국가는 전쟁을 전면적으로 포기하는 정책을 채택해야 한다는 것, 둘째, 개인의 양심을 강조하는 것으로, 개인이 그 어떤 전쟁 또는 폭력행위에 가담하지 않겠다는 강한 확신을 가지고 움직여야 한다는 것이다. 평화주의를 국가정책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논지는 일반대중에게 잘 알려져 있는 편이다. 이들은 특히 전쟁의 공지된 폐해를 강조한다. 인명이 손상되고 경제적 피해가 오며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도덕적·정신적 타락이 오게 된다는 주장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핵무기가 내포하는 가공할 만한 파괴력이 거듭 강조되고 경계되었다. 하지만 평화주의를 지지하는 사람들도 세계가 하나의 단위로 조직되어 회원국인 각 나라들을 단속할 수 있는 힘이 생길 때까지는 전쟁포기가 국가정책이 될 수는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평화주의를 지지하지 않는 사람들 역시 전쟁의 폐해가 심각하고 국제적 단속기관이 필요하다는 것을 시인하지만, 이들은 평화주의자가 다음과 같은 사실을 간과했다고 주장한다. 즉 평화주의적 정책을 채택했다가 외부의 침략을 받았을 때 직면하게 되는 온갖 폐해를 어떻게 감당할 것이며, 외부의 침략자들이 대량 수감 또는 대량 학살을 저지르면서 평화주의자들의 가치관을 송두리째 파괴하고 평화주의적인 사람들을 전체주의적 체제에 종속시키면 어떻게 하겠느냐는 것이다.

평화주의자들은 이런 지적에 대하여 그런 억압을 받고서도 비폭력으로 대하면 가장 야만적인 침략조차도 무장해제시킬 수 있다고 말한다.

비폭력은 비폭력적인 저항을 의미하는 것인데 일반 대중들이 정복자나 압제자의 강권에 전혀 협력하지 않음으로써 이들에게 어려움과 불편함을 준다는 것이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와 일어난 여러 가지 사건들은 이런 평화주의적 대응이 침략자를 무장해제시키지 못할 뿐만 아니라 평화주의적인 사회까지도 보존할 수 없음을 보여주었다. 또한 중세에서 아돌프 히틀러의 나치 체제에 이르기까지 평화주의를 지지하는 그리스도교 세력들은 엄청난 박해를 받았다.

유대인들은 그들의 박해자에 대하여 평화주의적인 정책을 폈으나 수세기에 걸쳐서 더욱더 심한 박해를 받았을 뿐이다. 평화주의적 비폭력의 대응은 극단으로 치달을 가능성이 적은 정치권력과 그 권력 내부에 일부라도 평화주의를 이해하는 양심세력이 있을 때만 그 효력이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대부분의 비평화주의자들은 외부의 침략에 대해 전혀 저항을 하지 않는 나라는 곧 그 침략국의 제물이 되고 또 그 침략자는 더욱더 무자비하게 된다고 보고 있다.

국가 차원의 평화주의에 비해 개인 차원의 평화주의는 비교적 흔한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세계 여러 나라에서 소규모 그리스도교 세력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충실히 이행하여 군복무의 이행을 거부하고 그에 따르는 형사적·민사적 불이익을 기꺼이 감수해왔다. 양심적인 이유로 병역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모두 평화주의를 지지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들 중 상당수가 평화주의적 행동철학을 갖고 있다. 그러나 국가가 교전(交戰)중일 때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평화주의자들 사이에도 많은 의견 차이가 있다. 국가의 전시동원체제에 절대 응할 수 없다는 극소수의 사람에서부터 실제 총을 쏘는 전투에 참가하는 것 이외에는 모든 군사행동에 기꺼이 참가하겠다는 사람까지 다양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