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크빌

토크빌

다른 표기 언어 Alexis (Charles-Henri-Maurice Clérel) de Tocqueville
요약 테이블
출생 1805. 7. 29, 프랑스 파리
사망 1859. 4. 16, 칸
국적 프랑스

요약 프랑스 파리 출생으로 미국의 교도행정 개혁을 연구하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가 <미국의 민주주의>를 저술했다. <미국의 민주주의> 첫 부분으로 인해 정치학자로서 즉각적인 명성을 얻었으며, 1833년부터 영국을 방문, 철학자이며 급진개혁가인 존 스튜어트 밀과 교류했다.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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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요
  2. 초기생애
  3. 미국 방문
  4. 정치경력
  5. 1848년 혁명
  6. 정계 복귀
  7. 평가
토크빌(Alexis de Tocqueville)
토크빌(Alexis de Tocqueville)

개요

19세기초의 미국 정치·사회 제도에 대한 예리한 분석서인 〈미국의 민주주의 De la démocratie〉(4권, 1835~40)의 저자로 잘 알려져 있다(정치학).

초기생애

토크빌은 프랑스 혁명 당시 희생된 진보적인 귀족정치가 크레티앵 드 말제르브의 증손으로 태어났다.

토크빌은 어린시절 이 증조부를 정치인의 모범으로 여길 정도로 존경했다. 그는 키가 작고 예민한 감수성을 지닌 인물로 어려서부터 심한 우울증으로 고생했으며, 일생 동안 양친과 가깝게 지냈다. 유서 깊은 노르망디 귀족의 후예인 토크빌은 콧대가 높고 냉담했으나 가까운 사람들 사이에서는 깊고 지속적인 교우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말을 경청해주는 소수의 친밀한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 가장 편안함을 느꼈다.

자신의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에게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자신의 경험을 사회체제에 그대로 적용시켰던 토크빌은, 지방자치와 소규모 집단이 정치조직의 가장 우수한 형태라고 생각했다. 직업을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었던 토크빌이 자신의 적성에 가장 알맞는 직업을 정치로 선택한 것은 놀라운 일도 아니다. 허약한 신체에 목소리도 별로 좋지 않았고, 매일 의회에 출석하는 것도 싫어했으며, 오랜 기간 동안 질병과 신경쇠약에 시달렸던 토크빌은 공직에서 쫓겨날 때까지 자신이 선택한 정치인으로서의 직업에 집착했다. 그가 공직에 나서겠다고 결정할 당시에는 출세의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충성스런 왕당파였으며, 샤를 10세로부터 1827년 프랑스 귀족작위를 받았다. 그당시 젊은 토크빌은 견습 하급관리로 공직의 길에 손쉽게 들어설 수 있었다. 그는 공직에 있으면서 정계에 뛰어들 준비를 했고, 헌법 개정을 놓고 보수파와 진보파 사이의 갈등을 지켜보면서 진보파를 동정하는 입장을 취했다. 그는 귀족의 특권이 몰락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불가피하다고 주장한 역사가이자 정치가인 프랑수아 기조의 강연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그리고 마침내 왕정복고된 부르봉 왕가의 독재체제하에서 활동했던 진보주의 인사들의 방식을 좇아 정치발전의 모형으로 영국사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절친한 친구가 된 귀스타브 드 보몽과 함께 공직의 길로 들어섰다. 이 두 사람의 인생사는 문자 그대로 똑같다고 할 수 있다. 가문의 배경과 지위가 유사했던 이들은 미국·영국·알제리 등지를 함께 여행했고, 저작도 공동 집필했으며 궁극적으로는 의회에도 함께 들어갔다.

'시민왕'으로 알려진 오를레앙의 루이 필리프를 왕좌에 앉힌 1830년 7월혁명은 토크빌에게 하나의 전환점이 되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그는 프랑스가 완전한 사회적 평등으로 급속히 진전하고 있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구(舊) 진보세대와 결별하면서, 그는 더이상 프랑스를 영국의 입헌군주제와 비교하지 않고 미국의 민주제와 견주어보게 되었다. 보다 개인적인 일로서 그는 새로운 군주제에 대해 충성을 맹세했지만, 자신의 가문이 축출된 부르봉 왕가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었기 때문에 입장이 난처했다.

토크빌과 보몽은 불편한 정치적 입지에서 벗어나기 위해 별로 중요하지도 않고 문제가 되지도 않는 미국의 교도행정 개혁을 연구하기 위해 미국 유학을 청원하여 허가를 얻었다. 그들은 또한 프랑스의 정치적 미래를 형성해나가는 데 큰 도움이 될 미국 사회에 대한 지식도 많이 수집하여 돌아올 생각이었다.

미국 방문

토크빌과 보몽은 1831~32년의 9개월 동안 미국에 체재했고, 이때의 방문으로 공동 저작인 〈미국의 교도행정 체제와 그 체제의 프랑스 내 적용 여부 Du système pénitentiaire aux États-Unis et de son application en France〉(1833)가 나왔다.

보몽은 미국의 인종문제를 다룬 〈미국의 노예제도 Marie, ou l'esclavage aux États-Unis〉(1835)를 썼고, 토크빌은 〈미국의 민주주의〉의 첫 부분을 썼다. 자기 자신의 관찰, 여러 가지 자료의 섭렵, 여러 저명한 미국 사람들과의 토론을 바탕으로 하여 토크빌은 미국 사회의 본질에 접근하려 했고, 자신의 철학에도 잘 맞는 미국 사회의 특징인 '조건의 균등'이라는 측면을 강조하려 했다. 토크빌의 저작은 미국 민주주의의 생명력, 지나친 점, 미래의 잠재력을 분석한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그의 저작에는 어떤 사회든지 적절하게 조직되면 민주적 사회체제 내에서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토크빌의 신념이 잘 드러나 있다(민주주의). 〈미국의 민주주의〉의 첫 부분으로 인해 토크빌은 정치학자로서 즉각적인 명성을 얻었다. 이 시기가 그의 생애 중 가장 행복하고 자신감에 넘치는 한때였다. 당대의 몽테스키외(18세기의 유명한 철학자)로 존경받으면서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으며, 1838년 정신과학 및 정치과학 아카데미 회원, 1841년 아카데미 회원이 되었다.

그는 상금과 책의 인세를 가지고 노르망디에 있는 옛 조상의 성을 개축할 수도 있었다. 몇 해 안 되어 그의 책은 영국·벨기에·독일·스페인·헝가리·덴마크·스웨덴 등지에서 출판되었다. 미국에서는 이 책이 정치적 편견을 가진 자료를 인용하고 있다고 보는 견해도 있었지만 곧 고전의 지위에 올랐다. 그러나 가장 큰 영예는 영국에서 수여한 것이었다. 그는 1833년 무명인사로 영국을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자신의 책이 발간되고 난 뒤인 1835년 영국을 다시 방문했을 때는 고위 정계와 지성계의 환대를 받았다.

그는 영국에서 평생의 벗들을 사귀었고 영국의 정치적 분위기가 자신의 적성에 꼭 맞는다고 느껴 영국을 제2의 정신적 고국으로 삼았다. 1836년 영국 여인 메리 모털리와 결혼함으로써 토크빌의 친영(親英) 유대는 더욱 강화되었다. 영국 여행으로 인해 그는 공업화 문제에 대해서도 흥미를 느끼게 되었다.

또한 프랑스의 구체제에 대한 첫번째 논고는 토크빌이 영국의 철학자이며 급진개혁가인 존 스튜어트 밀과의 대담 결과 쓰게 된 것이었다.

프랑스로 돌아온 토크빌은 〈미국의 민주주의〉의 마지막 부분을 저술하는 데 4년을 보낸 뒤 그것을 1840년에 출간했다. 이 책의 내용은 토크빌이 당초에 의도했던 것보다 훨씬 더 폭넓고 많은 자료를 다루었으며, 훨씬 더 진지한 것이었다. 미국 사회라는 주제는 이제 뒷전으로 밀려나고 사회적 평등이라는 개념이 현대사회의 전반에 미치는 영향도(影響圖) 전체를 완성해내고자 했던 것이다.

프랑스의 사례가 점점 더 주된 내용이 되었으며 당시의 프랑스 상황으로 인해 책의 주제가 바뀌게 되었다. 토크빌은 1830년에 집권한 진보파들이 자유를 제한한 사실과 경제발전에 국가가 점점 더 심하게 개입한 사실에 주목했다. 그를 가장 가슴 아프게 한 것은 이같은 가부장제의 점증(漸增)에 직면하여 프랑스 시민들이 정치적으로 무관심해지고 그저 시키는 대로 묵종할 뿐이라는 사실이었다. 〈미국의 민주주의〉 중 민주적 개인주의와 중앙집권화를 다룬 부분에서 토크빌은 이같은 관측에 바탕을 둔 새로운 경고를 보여주고 있다.

그에게는 이제 온화하나 정체되어 있는 전제주의가 민주주의의 가장 위험한 적으로 생각되었다.

정치경력

이 시기는 또한 토크빌이 평생의 염원이었던 정치입문을 달성한 때였다.

1837년 프랑스 의회 진출을 위해 처음으로 입후보했던 그는 선거에서 실패했다. 그의 낙선 원인은 대체로 정부보조금을 받지 않았고, 또 시골 부르주아 유권자들의 환심을 사려는 체신 없는 선거유세전은 벌이지 않겠다는 결심 때문이었다. 그가 이런 결심을 하게 된 것은 혹시 그같은 행동을 하면 자신의 운신의 폭이 좁아지지는 않을까 하는 우려 때문이었다. 그는 곧 자신의 초연함과 귀족적 배경 때문에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서 갖고 있던 의혹을 불식시켰고 1839년의 선거에서 당선되었다.

마침내 토크빌은 자신의 선거구에서 엄청난 개인적 영향력을 구축했다. 그는 첫번째 당선 이후 70%의 득표율을 보이며 계속 재선되었고, 주의회(지방자치단체)의 의장이 되었다. 지방정치의 수준에서 그의 명성은 널리 퍼졌다. 그러나 그는 타협을 불용하고 너무 초연했기 때문에 프랑스 의회에서는 별 영향력이 없었다.

감옥제도·노예제도·식민정책 등과 같은 초당적(超黨的)인 주요사안에 대해서는 훌륭한 위원회 보고자의 역할을 했던 그는 그가 보기에 용렬하고 믿을 수 없는 정치가들과 끊임없이 흥정과 타협을 해야 하는 주고받기식의 정치행태에는 적응할 수 없었다. 그는 다른 사람의 지도력을 인정할 수 없었고 또 그의 웅변적 스타일도 지도자의 지위로 급부상하는 데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결과 루이 필리프의 재위 동안에는 이렇다 할 의정활동이 없었다. 1848년 2월혁명이 일어나기 수주일 전에 그는 혁명의 발발을 예언하는 연설을 했으나 아무도 귀담아 들어주지 않았다.

그의 〈회고록 Souvenirs〉(1893)에는 친구, 적, 자기 자신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 잘 기술되어 있는데, 그가 1848년 전후의 정치지도자들에게서 느낀 감정, 즉 그들이 대체로 우둔하다고 느끼는 감정을 잘 전달해주고 있다.

1848년 혁명

2월혁명은 프랑스와 토크빌에게 새로운 상황을 가져왔다.

토크빌은 수년 동안 정치적 무관심이 프랑스 정치의 가장 큰 위험이라고 지적해왔다. 혁명이 벌어지기 전부터도 그는 프랑스가 정치적으로 각성된 노동자계급의 문제에 직면해 있다고 느꼈다. 이 계급은 프랑스 정치를 사회주의와 혁명노선으로 몰고 갈 위험이 있는 정치세력이라고 보았다. 토크빌은 자신의 정신적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경제적 자립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그는 빈자(貧者)가 국가복지에 의존하고 실업자가 국가고용에 의존하려는 압력이, 모든 사회계급이 비굴하게 국가에 의존하는 보편적 현상의 첫 단계라고 보았다.

혁명이 발발하기 전 혁명가에 대해서 냉담하고 사회주의자를 경멸했던 토크빌은 1848년 6월 파리 노동자들의 요구사항을 들어주지 말아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1848년 6월에 벌어진 노동자 봉기는 군사독재자 루이 카베냐크 장군에 의해 유혈 진압되었고 1848년 헌법에 대한 논의도 중단되었다. 1848년의 사건으로 인해 토크빌의 철학에 어떤 변화가 있었다면, 그것은 그가 사회주의 이념이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고 자본주의 사회가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식한 정도였다.

그는 〈미국의 민주주의〉에서 귀족제를 자유민주주의와 접목시키려고 한 바 있지만, 1848년에 나타난 사회민주주의는 자유민주주의와 양립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하여 배척했다.

2월혁명으로 인해 토크빌의 정치적 입지는 한결 개선되었다. 남자에게 보통선거권이 주어지게 되자 그의 선거구는 선거인이 700명에서 16만 명으로 늘어나게 되었다. 보수공화파인 그는 79%의 득표율을 보이며 제헌의회에 당선되었고, 1849년 87% 이상의 득표율을 보이며 재선되었다.

보몽과 함께 제2공화국의 헌법제정위원으로 임명되었고 그 다음해에 의회의 부의장이 되었다. 1849년 6~10월에 외무장관을 역임했다. 그는 짧은 장관 재임기간중에 유럽의 세력균형을 유지하고, 프랑스의 지나친 해외 개입을 방지하려는 조심스런 노력을 보였다. 그의 연설은 성공을 거두었고, 그의 자신감도 그에 비례해 커졌지만 결과적으로 그는 루이 필리프의 7월왕정 아래서 그가 거두었던 것 이상의 지속적인 만족을 얻지는 못했다. 1849년 6월 로마 교황의 권위를 회복시키기 위해 프랑스 정부가 무력 개입하게 되어 정부 내에 위기감이 고조되자, 이를 계기로 토크빌은 비록 짧은 기간이지만 외무장관에 임명되었다.

1849년 10월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대통령에 의해 외무장관직에서 해임되자 그는 신체적 피로를 못 이겨 쓰러졌다. 오랜 회복기간을 거쳐 그는 프랑스 제2공화국을 위한 마지막 봉사를 하게 되었다. 헌법개정위원회의 기록자로서 그는 대통령과 입법부 간의 최종 대결을 피해보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그 대결은 행정부가 독재권을 장악하는 것으로 끝났다.

헌법개정위원회
헌법개정위원회

1851년 12월 2일에 일어난 루이 나폴레옹의 쿠데타에 반대하다가 잠시 투옥된 뒤에 토크빌은 신(新)체제에의 맹세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모든 공직을 박탈당했다. 그는 정치적 동지·동료들로 구성된 소규모 집단 내에서만 활동하게 되었고 전보다 더 심한 소외감과 정치적 비관주의를 느끼게 되었다.

정계 복귀

정계에의 재진출을 추구하면서 그는 젊었을 때의 전략을 새롭게 활용했다.

즉 자유와 평등이라는 근본적 주제에 대한 책을 한 권 펴내는 것이었다. 이번에는 프랑스 혁명을 주제로 해서 1856년에 〈앙시앵 레짐과 프랑스 혁명 L'Ancien Régime et la Révolution〉이라는 책을 출판했는데, 이 책은 수년 간의 조사와 간헐적인 와병 끝에 그의 연구조사 작업의 첫 부분으로 작성된 것이었다. 이 책에서 토크빌은 프랑스의 정치행태와 태도에는 연속성이 있다는 것을 논증하려고 했다.

이같은 연속성 때문에 프랑스 혁명 후의 프랑스 사회는 구체제의 전제주의와 유사한 전제주의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이 최종 연구서는 1848~51년의 충격적인 사건들에서 많은 영향을 받은 것이 분명하다. 이때문에 토크빌은 프랑스 역사상 권력의 중앙집중화와 계급갈등이 지속적인 현상이었다고 주장했다. 프랑스는 일찍이 그가 미국에서 발견했던 미래의 민주사회를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화려한 과거의 포로가 되어 있는 것 같았다. 〈앙시앵 레짐과 프랑스 혁명〉은 프랑스의 정치적 행태와 경향에 대해서는 비관적으로 분석한 데 반해 영미권(英美圈)의 자유주의적 전통을 재확인하는 것이었다.

이 책에 쏟아진 찬사는 그의 만년의 우울을 잠시나마 완화시켜주었고, 다시 한번 그에게 공인(公人)으로서의 명성을 가져다주었다. 1857년 영국을 다시 방문하여 빅토리아 여왕의 부군을 알현한 것이 그의 생애에서 마지막 영예였다. 그는 다시 저작에 착수했으나 혁명에 대한 연구를 완수하지 못하고 쓰러졌다.

평가

19세기에 토크빌의 명성은 사후 10년 동안, 즉 유럽 강대국들이 보통선거권을 받아들인 시기에 최고조에 달했다.

그는 프랑스에서 자유주의가 다시 살아나기 직전에 죽었다. 보몽이 편집하여 9권으로 발간한 그의 전집(1860~66)은 자유를 위해 순교한 사람의 유작으로 받아들여졌다. 그의 이름은 영국에서는 1860년대 선거권 개혁 논의시에 거명되었고, 독일에서는 비스마르크에 의해 탄생된 제국의 성립 이전에 자유화와 연방화에 대한 논의가 있을 때 늘 거명되었다. 1870년 이후 그의 영향력은 감퇴하기 시작했다. 1893년 토크빌의 〈회고록〉이 간행되었고 그의 친구이며 외교관·철학자인 아르튀르 드 고비노와의 서간집이 발행되었지만, 인기 퇴조현상을 크게 되돌릴 수는 없었다.

20세기초가 되면서 그는 거의 잊혀진 인물이 되었고 그의 저작은 시대에 뒤떨어진 고전으로 널리 간주되었다.

사실이 확인된 지식만 인정하는 세대에게 토크빌의 저작은 너무 추상적·관념적으로 여겨졌다. 더욱이 민주주의가 계층간의 갈등을 완화시키는 거대한 균형력을 갖춘 힘이라는 토크빌의 예언은 빗나간 듯이 보였다. 공업화가 가져온 새로운 불평등과 갈등, 그리고 유럽의 민족주의와 제국주의가 가져온 불평등과 갈등을 토크빌이 미리 예측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유럽에는 계급 없는 사회가 출현하지 않았고, 미국은 계급 없는 사회가 되기는커녕 민족주의와 제국주의를 추구함으로써 유럽적인 나라가 되었다.

프랑스에서 토크빌의 이름은 제3공화국에 들어와 급속히 영향력을 잃은 협의(狹義)의 자유주의 전통과 너무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다. 그의 저서들은 독창적인 역사가의 소산이라는 평가를 얻고 있었지만, 정치학자로서 그의 사상과 명성이 회복된 데는 미국·영국·독일 학자들의 공로가 컸다는 점이 의미심장하다.

20세기에 들어와 2번의 세계대전을 거치고 또 1930년대에 대공황을 겪게 되면서 자유민주적 제도에 대한 전체주의의 도전이 거세어졌고, 이로 인해 '토크빌 르네상스' 현상이 벌어지게 되었다.

그의 책의 가치는 공직에서의 자유를 유지하고 잠재되어 있는 사회적 경향을 분석하는 전략에 나타난 정치철학에 있기 때문에, 그 책에서 인용된 낡은 통계자료는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의 저작은 다양하고 유익한 철학적·사회학적 가설을 풍부하게 담고 있다. 일반대중의 수준에서 보면 1945년 이후 유럽의 사회민주주의가 다시 부상하게 되고 여기에 냉전에 의해 세계가 양극화하는 현상까지 겹치게 되자, 서방세계에서는 사회개혁의 예언자로서 마르크스에 맞설 수 있는 인물로 토크빌을 내세우는 견해가 생겨나게 되었다.

1850년대 후반과 1860년대처럼 다시 한번 토크빌의 인기가 최고조에 달했다. 사회적·지적 풍속도가 또다시 일변하여 그의 인기가 다시 하락할지는 두고 보아야 할 일이다. 그러나 정체된 독재사회를 경멸하고, 계급차별이 마침내 사라질 것이며 자유가 최종적인 정치적 가치라고 믿는 사람들에게 토크빌은 권위와 영감의 원천으로 늘 인용될 것이 확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