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젓

배젓

다른 표기 언어 Walter Bageh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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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826. 2. 3, 잉글랜드 서머싯 랭포트
사망 1877. 3. 24, 랭포트
국적 영국

요약 빅토리아 시대 중반 〈이코노미스트〉의 편집을 맡아 활동하면서, 당시 가장 유력한 언론인 중 한 사람으로 인정받았다.
배젓은 초기 빅토리아 시대의 엄격한 학교교육을 받았다. 학교를 졸업한 뒤 3년간 변호사 사무실에서 일했지만 결코 그 일을 좋아한 것은 아니었고, 오히려 그 기회를 이용해 문학에 몰두했다. 그가 직업적인 언론인이 된 것은 우연한 일이었다. 은행원으로 일하면서 경제학에 대한 글을 여러 편 쓴 적이 있었는데, 이 글들이 1843년 〈이코노미스트〉를 창간한 제임스 윌슨의 관심을 끌었던 것이다. 윌슨이 인도 정부의 재정개혁 임무를 맡고 인도로 갔다가 1860년 캘커타(지금의 콜카타)에서 죽자, 배젓은 그뒤를 이어 〈이코노미스트〉의 운영을 맡게 되었다. 그후 17년간 그는 주요논설을 쓰는 동시에 통계 및 재정 부문을 개선·발전시켜, 〈이코노미스트〉가 그후 100년 이상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경제·정치 잡지가 될 수 있었던 확고한 기반을 다졌다.

빅토리아 시대 중반 〈이코노미스트 The Economist〉의 편집을 맡아 활동하면서, 당시 가장 유력한 언론인 중 한 사람으로 인정받았다.

배젓의 아버지는 대대로 일반 상업에 종사한 상인 가문 출신이었던 데 반해, 어머니는 영국 서부에서 가장 큰 은행의 은행장을 지낸 빈센트 스터키의 딸이었다. 첫번째 결혼에 실패한 그의 어머니는 아주 미인이었으나 아버지보다 나이가 10세나 많았고, 나이가 들면서 정신이 약간 이상해지기 시작했다. 친척들에 의하면 배젓의 날카로운 정치적 감각은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것이고, 재치와 독창성은 어머니를 닮았다고 한다.

배젓은 초기 빅토리아 시대의 엄격한 학교교육을 받았다.

어린시절에는 시인 워즈워드의 친구가 운영하는 랭포트 그래머 스쿨에 다녔고, 13세부터는 영국에서 가장 좋은 학교로 꼽히는 브리스틀 칼리지에서 철학·수학·문학·고전 및 새로운 자연과학에 대한 기초 지식을 쌓았다. 당시 그는 오늘날의 영국 어린이들이라면 소화할 수 없을 정도로 높은 강도의 집중적인 학습을 받았다. 대학 진학은 확신을 갖고 런던 유니버시티칼리지를 선택했다. 그 이유는 그의 아버지가 유니테리언(Unitarian)파의 신자였고 당시의 옥스포드대학교와 케임브리지대학교가 독단적으로 영국국교회를 고집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브리스틀 칼리지 시절의 친구인 에드워드 프라이 경은 배젓을 "커다란 눈이 인상적이고, 아주 쾌활한 모습에 다리가 약간 가늘고 긴 호리호리한 청년이었다"고 묘사했다. 배젓은 약간 냉소적인 성격이어서 동기생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으나, 유니버시티 칼리지에서는 이후 오랫동안 사귀게 되는 많은 친구들을 만났다. 그 가운데 유명한 사람으로는 리처드 홀트 허튼, 윌리엄 로스코, 아서 휴 클러프, 헨리 크래브 로빈슨 등이 있다. 리처드 홀트 허튼은 19세기 후반 〈스펙테이터 The Spectator〉의 유명한 편집자였고, 윌리엄 로스코는 유명한 역사가인 메디치 가문의 자손이었다.

아서 휴 클러프는 시인이었고, 헨리 크래브 로빈슨은 좀 더 나이가 든 세대로서 괴테·쉴러·코울리지 등과 교분을 나누었으며, 나폴레옹 전쟁 때에는 〈타임스 The Times〉의 특파원으로 활약하기도 했다. 1846년 배젓은 건강이 나빠졌음에도 불구하고 수석으로 학부를 마쳤고, 1848년에는 윤리학과 지식철학 부문에서 역시 수석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학교를 졸업한 뒤 3년간 변호사 사무실에서 일했지만 결코 그 일을 좋아한 것은 아니었고, 오히려 그 기회를 이용해 문학에 몰두했다.

1851년말 루이 나폴레옹이 쿠데타를 일으켰을 때, 우연히 파리에 머무르고 있었던 그는 당시 유니테리언계의 유력한 주간지에 일련의 글을 연재해 쿠데타를 직접적으로 묘사하면서 나폴레옹을 지지했다. 당시 영국 내에는 쿠데타를 비난하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그의 글은 많은 논쟁을 불러있으켰다. 그러나 그에게는 이때의 경험이 집필활동을 계속하게 자극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6~7년간 배젓은 외삼촌 스터키의 은행에서 일하면서 밀턴, 셰익스피어, 기번, 월터 스콧 경, 피에르 장 드 베랑제 등에 관한 일련의 문학 논문을 썼다.

동시에 지난 세기 정치지도자로 활약했던 헨리 세인트 존 볼링브로크, 윌리엄 피트, 로버트 필 등을 비롯한 여러 인물들을 연구했는데, 이 연구 결과들은 지금도 널리 인용되고 있다.

그가 직업적인 언론인이 된 것은 우연한 일이었다. 은행원으로 일하면서 경제학에 대한 글을 여러 편 쓴 적이 있었는데, 이 글들이 제임스 윌슨의 관심을 끌었던 것이다. 제임스 윌슨은 1843년 〈이코노미스트〉를 창간한 사람으로서, 당시 영향력있는 하원의원이자 파머스톤 내각의 재무장관직을 맡고 있었다.

윌슨은 배젓에게 같이 일하기를 요청했고, 배젓은 바로 윌슨의 장녀인 엘리제와 사랑에 빠졌다. 두 사람은 1858년 4월에 결혼했으나 자녀는 없었다. 배젓은 스터키의 은행으로 돌아가 브리스틀 지사의 운영을 맡았다. 그러나 1년 뒤 윌슨이 인도 정부의 재정개혁 임무를 맡고 인도로 갔다가 1860년 캘커타(지금의 콜카타)에서 죽자, 그는 그뒤를 이어 〈이코노미스트〉의 운영을 맡게 되었다. 그후 17년간 그는 주요논설을 쓰는 동시에 통계 및 재정 부문을 개선·발전시켜, 〈이코노미스트〉가 그후 100년 이상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경제·정치 잡지가 될 수 있었던 확고한 기반을 다졌다.

뿐만 아니라 배젓은 사회문제에 보다 많은 관심을 기울여 이 잡지의 정치적 접근에서도 인간적인 측면을 강조했다. 이와 관련해 미국의 정치학자 월트 로스토는 "〈이코노미스트〉가 단순히 중기 빅토리아 시대의 자본가만을 철저히 옹호한 것만은 아니다"라고 평했다.

배젓은 자신의 입장을 보수적 자유주의 또는 정치적 중립이라고 표현했다.

많은 자유주의자들과 달리 그는 외진 시골에서 자랐으며, 급속한 산업화와 도시화의 영향으로 발생한 영국의 사회문제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또 그는 국제문제 역시 날카롭게 관찰해, 프랑스에는 호감을 나타내는 반면 오토 폰 비스마르크의 독일에는 불신감을 표시했다. 배젓이 〈이코노미스트〉를 맡은 초기에 미국에서는 남북전쟁이 일어났다. 그는 남북전쟁에 관해 거의 20편에 달하는 논설을 썼는데, 당시 대부분의 영국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 역시 본능적으로 남부 연방을 지지했다.

그러나 이성적으로는 링컨을 지지했던 그는 링컨의 암살 소식이 영국에 전해졌을 때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 "우리는 역사 속에서 링컨처럼 한 사람의 통치자가 지혜롭게 스스로를 발전시켰던 예를 알지 못한다. 그는 권력과 책임을 갖게 되면서 보다 넓은 마음과 높은 인격을 보여주었고, 어려움에 처할 때에도 다른 사람들처럼 화를 내기보다는 오히려 인내에 대한 믿음을 키웠다.

또 무수한 반대에 직면하는 경험을 통해 그는 부패하지 않으면서 더 많은 관용과 결단력을 키워나갈 수 있었다."

1867년 배젓은 〈영국의 헌법 The English Constitution〉을 펴냈다. 이 책에서 그는 왕·상원·하원 등 겉으로 나타나는 영국의 정부조직 속에 감춰진 면을 찾아내, 영국 정부가 실제로 어떻게 운용되고 누가 실질적인 권력을 가지고 있는가를 밝히려고 시도했다.

그는 하원에서 과반수를 차지한 정당의 내각이 장악하고 있는 압도적인 권력을 처음으로 꿰뚫어 본 사람 가운데 하나였다. 배젓은 또 많은 정치인들과 직접 친분을 나누기도 했다. 특히 잘 알려져 있는 인물로는 1868년 자유당의 초대 총리를 지낸 윌리엄 에와트 글래드스톤, 영국령 북아메리카 법과 캐나다 헌법을 제정한 보수당의 카르나본 경, 영국 최초의 학교교육법을 제정한 윌리엄 에드워드 포스터 등이 있다. 그러나 배젓 자신이 정치에 입문하려 했던 시도는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다.

맨체스터와 부정부패로 악명이 높았던 고향 서머싯 근처의 브리지워터를 거쳐, 1867년에는 런던대학교에서도 출마를 시도했으나 언변이 부족했던 그는 매번 실패했다.

1872년 배젓은 〈물리학과 정치학 Physics and Politics〉을 펴냄으로써 인류학의 새로운 발견들을 사회와 국가의 발전에 적용시키려 했다. 이와 같은 접근방식은 20세기 들어 카를 마르크스와 막스 베버의 지배적인 영향력하에 사회학 연구가 활동력을 요구하기 시작하면서 거의 대부분 잊혀졌다.

그러나 이 책의 핵심 논점 가운데 하나인 '무의식적 모방과정'에 대한 연구는 윌리엄 제임스, 그레이엄 월러스 등의 철학적 사회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국가의 발달과정에서 그 틀을 형성하는 힘은 곧 무의식적 모방과정이라고 보고 국가를 '관습의 덩어리'라고 표현했다. 그동안 배젓은 아내와 함께 줄곧 런던에 거주하면서 한 유망한 주간지의 편집일을 맡았다. 40대 들어 차츰 몸이 약해지기 시작한 그는 자신이 지니고 있던 모든 열정을 전문적인 경제학 연구에만 전념했다.

1873년 그는 〈롬바드가(街) Lombard Street〉를 발행했다. 이 소책자에서 그는 준비금을 중앙으로 집중시켜 보다 많은 양을 잉글랜드은행이 보유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오늘날 전개되고 있는 중앙은행 및 환관리에 대한 이론의 기초가 되었다. 그는 일련의 중요한 경제이론들을 연구하던 도중 51세의 나이에 폐렴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2세대가 지난 뒤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경영의 심리적인 면을 파악한 그의 뛰어난 통찰력에 찬사를 보냈다. 그러나 배젓의 생생한 문체, 인간성, 통찰력 등에 대한 최대의 찬사는 무엇보다도 그의 저서들이 계속 읽혀지고 거듭 재발행되면서, 사후에도 지속적으로 연구 대상이 되어 왔다는 사실이다.

그는 언젠가 토머스 매콜리를 향해 사후의 명성을 꾀한다고 조롱했으나, 결국 그 자신이 상당한 사후 평가를 받게 되었다. 배젓은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에서 가장 다재다능한 천재로 묘사된다. 그가 집필한 일련의 논문들은 20세기 전반에 걸쳐 계속 재발행되어 널리 읽혀져 왔고, 영국의 정치에 관한 고전으로 인정받았을 뿐 아니라 진화의 개념을 사회에 적용한 최초의 사회학 연구서로 꼽히기도 한다.

이밖에도 그는 중앙은행에 관한 이론을 발전시키는 데 크게 공헌했다. 과거 미국의 대통령 우드로 윌슨은 "내게 인류 문명을 지배할 능력이 있었더라면 국민들을 교육하고 고무시키기 위해 기꺼이 인간과 사회현상에 대해 분별력 있고 현명한 비평가였던 월터 배젓 같은 사람을 여럿 길러냈을 것"이라는 기록을 남겼다. 또한 〈미연방 The American Commonwealth〉의 저자이자 워싱턴 주재 영국 대사를 지낸 브라이스 경은 "그를 아는 행운을 가졌던 사람들은 아마 아직까지도 그를 당대의 가장 진정한 지성인으로 기억할 것"이라고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