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이스

브라이스

다른 표기 언어 James Bryce, Viscount Bryce (of Dechmo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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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838. 5. 10, 아일랜드 벨파스트
사망 1922. 1. 22, 잉글랜드 데번 시드머스
국적 영국

요약 브라이스는 미국 주재 대사(1907~13)로서 보인 뛰어난 활동과 미국헌법 연구의 고전 <아메리카 공화국>(3권, 1888)의 저자로 잘 알려져 있다. 1867년 변호사 자격을 획득했고, 1870~93년 옥스퍼드대학교에서 민법을 가르쳤다. 자유당 의원으로 있으면서 상무장관, 아일랜드 담당장관 등을 역임했다,
1870년 브라이스는 처음으로 미국을 방문했고, 1907년에 워싱턴 주재 대사로 미국에 파견되었다. 이미 그는 미국의 정계를 비롯해 교육계와 문학계에 많은 친구가 있었고, 미국 국민과 정부에 대한 찬사를 표현한 〈아메리카 공화국〉은 그곳에서 널리 읽히고 있었다. 미대사로 있으면서 미국과 캐나다 간의 관계개선에 주력하여 큰 성과를 이루었고, 영국과 캐나다 양국 관계를 개선시켰다. 제1차 세계대전 동안에는 벨기에와 프랑스에서 자행된 독일의 가혹행위를 재판하는 위원회를 이끌었다.

미국 주재 대사(1907~13)로서 보인 뛰어난 활동과 미국헌법 연구의 고전 〈아메리카 공화국 The American Commonwealth〉(3권, 1888)으로 잘 알려져 있다.

옥스퍼드대학교의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문학사(1862)와 민법박사(1870) 학위를 받았으며, 재학중에 〈신성 로마 제국 연구 The Holy Roman Empire〉(1864)로 상을 받았다. 1867년 변호사 자격을 획득했고, 1870~93년 옥스퍼드대학교에서 흠정교수로서 민법을 가르쳤다. 옥스퍼드에 재직하던 1885년에는 액턴 경과 함게 〈영국 역사학보 English Historical Review〉지를 창간했다. 자유당 의원으로 있던 1880~1907년 기간에는 외무차관(1886), 랭커스터 공작령 상서(1892), 상무장관(1894~95)으로 각각 일했다.

상무장관으로 있던 2년 동안에는 '브라이스 위원회'를 맡아 교육부의 설립을 권고했다. 이무렵 그는 보어 전쟁(1899~1902)을 초래한 영국의 팽창정책을 비판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이유로 역시 전쟁을 반대한 헨리 캠벨 배너먼 경이 1905년 12월 총리가 되었을 때 그는 아일랜드 담당장관으로 임명되었다.

1870년 브라이스는 처음으로 미국을 방문했고, 1907년 2월에는 워싱턴 주재 대사로 미국에 파견되었다. 이미 그는 미국의 정계·교육계·문학계에 많은 친구가 있었고, 미국 국민과 정부에 대한 찬사를 표현한 〈아메리카 공화국〉은 그곳에서 널리 읽히고 있었다. 미대사로 있으면서 미국과 캐나다 간의 관계개선에 주력하여 큰 성과를 이루었다. 이러한 성과는 어느정도는 캐나다 총독 및 각료들과의 사적 협의에 힘입은 것이다.

또한 그 과정에서 영국과 미국이 합의한 중재협의회 설치안을 캐나다로 하여금 수락하도록 함으로써(1908. 4. 4) 영국과 캐나다 양국 관계를 개선시켰다. 그는 1913년 4월 대사직을 사임했다. 1914년 1월 1일 자작작위를 받았으며, 같은 해 헤이그 국제사법재판소의 일원이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동안에는 벨기에와 프랑스에서 자행된 독일의 가혹행위를 재판하는 위원회를 이끌었으며, 이어 국제연맹의 설립안을 옹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