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보댕

장 보댕

다른 표기 언어 Jean Bod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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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530, 프랑스 앙제
사망 1596, 랑
국적 프랑스

요약 프랑스의 정치사상가.

장 보댕은 국왕과 의회가 상호균형을 이루며, 신법과 자연법에 근거한 입법권이 보장되는 이상주의적 군주제 이론을 전개했다.

15~16세 무렵 앙제의 카르멜 수도원에 들어갔으며 3년 뒤 전문교육을 받기 위해 파리의 수도원 학사에 진학했으나 1551년 서원을 파기하고 툴루즈대학교에 입학, 강사가 되었다. 1561년 법률강의를 그만두고 왕실변호사가 되었는데 그즈음은 로마 가톨릭과 위그노교도 사이에 내전이 촉발되려던 시기였다.

1571년 국왕의 동생인 알랑송 공(公) 프랑수아의 눈에 띄어 자문관 겸 청원담당관으로 임명되었으며 이를 계기로 왕실의 고위 행정·외무 관료들을 접할 수 있었다. 장 보댕은 1576년 블루아의 삼부회에 베르망두아의 제3신분 대표로 참석함으로써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공중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으나 공평무사한 자세로 말미암아 이내 국왕의 불만을 사게 되었다.

삼부회에서 장 보댕은 위그노교도들에 대한 무력제재 이전에 회유와 협상을 주장했으며, 왕실소유 영지의 양도조치는 장차 군주의 권위에 해를 끼치게 되는 빌미가 될 것이라고 역설했다. 보댕은 또한 양 특권계급의 권고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제3신분의 권리를 옹호하기도 했다.

1583년 알랑송 공이 사망하자 장 보댕은 랑의 칙임관으로 부임했고 사망시까지 이 지역의 사법과 행정을 감독했다. 보댕의 대표적인 저작은 영국의 토머스 홉스에게까지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한 〈국가론Six Livres de la République〉(1576)이라고 할 수 있다.

국가론(Six Livres de la République)
국가론(Six Livres de la République)

〈국가론〉에서 장 보댕은 이상적인 사회질서는 신민의 요구를 바로 알고 이를 존중하는 주권자 즉, 국왕에 대한 복종 위에 세워지며, 종교전쟁 과정에서 경험한 바와 같은 무정부상태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정부의 정책결정에 대한 절대적인 순응이 요구된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외에도 1566년 법의 일반원칙을 규명하기 위한 역사비평을 시도했고, 여러 종교들을 비교·검토해 그 공통적 본질이 십계명에 바탕을 둔 실천적인 윤리규범임을 밝혀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