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철학

법철학

다른 표기 언어 philosophy of law , 法哲學

요약 의 본질과 그 권위의 연원 및 사회에서 법의 역할 등을 해명하기 위한 개념과 이론을 만드는 철학의 한 분야.

영어사용권에서 법철학과 법리학(jurisprudence)은 거의 동의어로 사용된다.

설명의 편의를 위해 여기에서는 법철학이 분석적 법철학, 법사회학, 정의론(正義論)의 3가지를 포함하는 것으로 한다.

분석적 법철학은 공리(公理)를 해명하고 용어를 정의하며, 법질서를 조망하는 방법론을 제시했다. 이에는 존재론 차원에서 법철학의 과제인 '법의 일반이론'과 '법이론', 그리고 인식론·방법론 차원인 '법학방법론'과 '법논리학' 등이 속한다. 법사회학은 한국에서는 법철학과 별개로 취급되지만, 영미의 전통으로는 법리학의 일부이다. 이는 특정사회의 유지를 위해 개재되어 있는 여러 요소들에 법이 미치는 영향, 그리고 역으로 사회현상이 법의 실체적·절차적 측면에 미치는 영향에 관심을 가진다.

정의론은 법에 요구되는 이념이나 목적의 측면에서 법을 평가하고 비판하는 것이다. 흔히 '법가치론' 또는 '정법론'(正法論)이 이것을 다룬다. 이상의 법철학의 부문들은 상호관련되어 전체를 이루고 있으며, 무엇이 법철학인지를 구체적으로 가르쳐줄 수 있는 또 하나의 분과는 바로 법철학사이다.

여기에서는 서구법철학사의 조망을 통해 법철학의 구체적 내용들을 살펴본 후, 끝으로 한국의 법철학에 대해 살펴보았다.

고대 그리스는 정의에 관한 철학적이고 우주론적인 이념체계를 만들어냈지만, 일상의 문제에 지침으로 적용될 수 있는 것이라기보다는 민회(民會)에서 웅변가가 사용하기에 더 알맞는 것이었다(그리스법). 초기 그리스 우주론신법(神法 logos)이 인간관계에 표현된 것을 (nomos)으로 보았다.

소피스트들은 이러한 법의 절대적 가치를 거부하고, 법은 개별적·상대적·역사적으로 변화하는 차원에서 인간의 이성에 의해 창조된다고 생각했다. 플라톤은 자신의 이원론에 입각하여 정의의 본질이 폴리스의 법보다 항구적이고 절대적인 것이라고 보았으나, 후기에 와서 보다 현실적인 차선책으로서 철인의 지혜와 동등한 중요성을 법에도 부여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초월적 실재와 현실을 보다 밀접하게 관련지음으로써 초월적 지식이 아닌 실정법의 효력까지도 옹호할 수 있었다. 스토아 학파는 그리스의 자연법론을 일층 가다듬어 로마에 영향을 주었다.

그리스와 달리 철학자가 아니라 전문법률가와 정무관(특히 법무관) 등에 의해 체계적인 법이 발전한 로마는 스토아 사상을 받아들이고 로마 법의 학문으로서의 체계를 확립해, 협소한 시민법(jus civile)에서 자연법에 기초한 만민법(jus gentium)으로의 발전을 도모하기도 했다(프라이토르).

중세에 들어와서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신의 의지보다 신의 이성을 강조해 신의 이성이야말로 영구불변한 신법의 최고의 원천이라 했고, 신법·자연법·세속법(실정법)이라는 위계질서를 확립했다.

스콜라 학파의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러한 '이성'의 우위를 계승해 실정법을 공동선(共同善)을 위한 인간 이성의 창조물로 보았으며, 자연법을 위반한(즉 신법을 위반한) 실정법의 효력을 부인했다. 존 둔스 스코투스는 모든 존재의 독창성은 궁극적으로 신 의지의 독창성에 기인하는 것임을 강조했다. 그는 신법을 포함한 모든 규준(規準)의 근거는 '사랑인 하느님'(Love God)이며, 이성이 아닌 의지만이 이것에 접근할 수 있으므로 인간 이성이 이를 수 있는 자연법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르네상스의 선구자인 마키아벨리는 초월적 의지나 초월적 이성에서 탈피해 경험적인 있는 그대로의 삶을 중시함으로써 인간 입법자의 우월성을 확립했다(경험론). 이것은 프랑스와 영국에서 장 보댕과 토머스 홉스에 의해 계승되었다.

한편 네덜란드의 후고 그로티우스 등은 신적 의지의 우월성, 그리고 인간이 거기에 참여한다는 것을 주장하여 자연법으로 가는 길을 다시 열었다. 그들은 자연법의 규범적 또는 도덕적 힘은 인간의 내적 본성(그 자체가 우주 본질의 일부)과 성향이 이상적이고 천부적으로 선하다는 사실에서 나온다고 여겼다.

그가 발견한 법은 스토아적 자연법이 로마 법과 그리스도교 신학 속으로 귀화한 것이었다. 그러나 홉스는 그리스의 소피스트들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본성이 그처럼 이상적이거나 선하지 않다고 여겼다. 사람들이 주권국의 법에 복종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야말로 자신을 타인으로부터 보호할 수 있게 하는 유일한 제도이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근대의 자연법은 두 갈래의 흐름으로 나뉘었다.

17세기에 들어오면서 자연법을 실정법의 유효성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삼는 생각은 사상가들의 테두리를 넘어 법원에까지 적용되기에 이르렀다.

영국의 에드워드 경은 1610년의 보넘 판결(Bonham's case)에서 "의회제정법이 일반권리 또는 이성에 반하거나, 모순되거나, 실행이 불가능한 경우에는 코먼 로(common law)가 그것을 통제하며 그러한 법을 무효라고 결정할 것이다"라고 했다. 또한 생명·재산 및 행복추구라는 자명한 권리를 단언하고 있는 18세기 미국의 독립선언은 자연법이 미국 헌법 발전에 지속적인 영향을 주는 시발점이 되었다(미국법). 사법부(법원)가 입법에 대해 성문헌법과의 저촉 여부를 '심사'하고 이를 무효로 선언할 권리(사법심사권)를 가지게 됨으로써 헌법은 자연법과 유사한 것이 되었다.

그러나 몽테스키외를 비롯한 초기 사회과학자들에 와서 자연법은 퇴조할 수밖에 없었다.

몽테스키외에 따르면, 어떤 인민의 법과 정의는 그들에게 작용하는 특별한 요인과 환경에 따라 결정되며, 당시의 자연법론이 주장하는 것처럼 시공을 초월한 불변의 것이 아니었다. 프랑스의 사회학자인 오귀스트 콩트에 따르면, 이상적 본질과 같은 추상적인 것에 대한 형이상학적 관념은 인간의 지적 발달 이전의 단계에 속했다. 또한 다윈의 진화론과 허버트 스펜서의 실증주의에서 그들 체계의 핵심을 이루는 것은 변화와 적응이지 항상성(恒常性)이나 불가침성이 아니었다.

인류학자인 브로니슬라프 말리노프스키가 문명의 발전을 이해하는 데 중요하다고 본 법이라는 말의 4가지 주요의미 속에는 자연법과 같은 관념은 결코 포함되지 않았다.

독일의관념론 철학자 칸트는 자연법과 결별한 또다른 사상의 줄기를 형성했다. 그의 윤리적·법적 사고의 기초는 모든 도덕관념이 선험적(先驗的) 관념에 기초를 두고 있다는 것이었다(선험적 지식). 이러한 전제로부터 칸트는 이상적 법의 본질을 도출해냈고, 이것은 정의의 이론 또는 표준을 함축하고 있었다.

그러나 칸트의 선험관념은 자연법 사상만큼이나 초월적이다(초절주의). 따라서 칸트의 관념론을 계승한 요한 피히테 등의 후기 사상가들이 신칸트주의 사상을 자연법의 틀에 맞추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러한 관념론들은 형식적으로나 철학적으로 '합리주의'와 자연법적 사고에 반대하고 있지만, 산업혁명기에 이들 관념론은 자연법이 중세의 교회와 정치·사회·경제 조직의 속박, 그리고 18세기의 전제주의에 맞서 꾸준히 세워놓은 개인주의 및 자유주의 경향을 강화시킨 것으로 보인다.

19세기초에 들어서자 칸트적 관념론과 자연법론에 대한 반작용이 나타났다.

산업혁명 초기에 달성된 실천적 성취에 반영된 당대의 과학적 분위기로 볼 때 선험체계로부터의 연역적 사고는 복잡한 사회문제를 해결하기에 비실용적 방법이었다. 그러한 문제는 현존하는 법과 제도를 철저히 분석함으로써 접근가능하며, 이 새로운 조류는 실증주의라고 불렸다. 영국의 분석적 실증주의는 제러미 벤담에서 시작되어 존 오스틴으로 이어졌다.

오스틴은 실정법을 주권자의 명령으로 정의했다. 실정법은 도덕적 원칙이나 다른 근거로부터 기원할 수 있지만 그것을 주권자가 명령할 때에 비로소 법이 될 수 있다고 보았다.

19세기의 역사법학(歷史法學)은 사변적 우주론, 선험, 자명한 원리 등을 배척하면서 경험적 관찰을 통해 법의 실체를 연구하는 새로운 방법을 열었다. 이것은 논리분석적 실증주의보다 더욱 구체적으로 사회의 모습을 기술했다. 역사법학파의 주도적 인물인 독일의 프리드리히 카를 폰 자비니는 법은 민족정신(Volksgeist)에 의거하며, 따라서 탁월한 법은 관습법이라고 했다.

그는 법적 변화에서 민족정신의 항구성을 고려할 필요를 강조해 다윈 이전에 '법의 진화'라는 관념을 제공했다. 영국의 법사학자인 헨리 메인 경은 비교법사학 연구를 통해 모든 법체계를 통괄하는 발전의 가설적 '법칙'을 찾아내고자 했다.

한편 마르크스주의적인 경제적 역사해석은 대부분의 사회과학에서와 마찬가지로 법사회학에서도 주도적 위치를 잡아가고 있었다.

이 입장은 법적·윤리적·경제적·심리적 연구 상호간의 밀접한 관련을 강조하면서도 특히 경제적 동인을 중요시했다. 마르크스주의 이론에 따르면 정치체계와 사법체계, 즉 국가와 법은 사회의 상부구조를 이루며, 그 본질은 경제적 토대, 즉 생산과 교환의 양식에 따라 결정되었다. 독일의 사회학자인 막스 베버는 사회경제적 변화와 윤리-법적 변화의 관련성을 연구함으로써 경제결정론의 구속에서 벗어났다.

그의 연구들에서는 특정한 사회(문명)의 독특한 요소 또는 그러한 요소들의 조합의 영향이 고려되고, 승인된 가치체계의 존재는 서구 자본주의체제의 등장에 결정적 영향을 끼친 것이 되었다.

19세기초의 역사법학은 법을 사회적 맥락에서 설명하려는, 발전하는 사회과학의 영향을 받았고 그결과 법사회학파가 출현했다. 독일의 루돌프 폰 예링은 이러한 사회학적 경향의 선구자였다. 그는 법이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인간들의 투쟁, 그리고 이 투쟁을 선도하는 힘들의 산물이라고 보았다.

또다른 역사법학자인 오토 폰 기르케는 법학에서 심리학적인 관심을 자극했고, 구속적인 사회규범의 연원으로 집단의 내적 생활과 활동이 갖는 역할을 강조했다. 올리버 웬들 홈스와 오이겐 에를리히는 이들의 영향을 받았다. 또한 20세기초에는 다양한 심리학적 가설이 법학에 영향을 주었는데, 특히 레스터 F. 워드, 지크문트 프로이트, 빌프레도 파레토, 막스 베버 등의 이론이 중요했다.

20세기에 와서 자연법은 확실히 부활을 경험했다.

나치의 경험과 같은 대규모 범죄행위는 자연법에 대한 새로운 열망을 자극했다. 이렇게 자연법이 재등장하게 된 데는 하나의 지적 움직임이 아닌 여러 방향에서 기여가 있었다. 독일의 루돌프 슈타믈러와 프랑스의 프랑수아 제니는 그 선구자들이었다. 에밀 뒤르켐의 실증주의 사회학의 영향을 받은 레옹 뒤기는 자연법을 공격하고 있지만, 결과적으로 자연법에 대한 은밀한 경의를 표하고 있었다.

이와는 달리 독일의 구스타프 라드브루흐는 민주적 법상대주의와 법실증주의에 크게 기여했지만 나치의 잔학성을 경험하면서 만년에는 자연법을 향하게 되었다. 그는 "정의를 추구하지 않고, 정의의 핵심인 평등을 실정법 제정에서 부정하는 경우, 그 법은 '정의롭지 못한 법'일 뿐 아니라 법의 본질 자체를 결여한 것이다"라고 명백히 선언했다.

프랑스의 모리스 오리우나 조르주 르나르처럼 법제도주의를 자연법과 연결시키는 입장은 또 다르다. 그들은 뒤기처럼 이러한 연결을 천명하지 않으면서도 토마스주의 입장에 대한 공감을 숨기지 못했다. 한편 베르너 마이호퍼와 같이 자연법과 실존주의를 연결시키려는 시도는 성공적이지 못했다.

한스 켈젠의 '법의 순수이론'은 자연법과 사회학에 대한 20세기 초기의 회의주의를 반영했다.

켈젠은 이 양자를 자신이 주장하는 방법의 순수성(즉 어떠한 가치의 오류로부터도 자유로운 방법)과 대립시켰다. 그는 규범의 단계구조를 설정했는데, 상위규범으로의 추급(追及)은 '근본규범'에 이르기까지 계속된다. 이 근본규범은 공동체의 충분한 최소한의 성원들이 동의했다는 사실을 조건으로 하여 그 효력을 얻는다고 한다.

미국의 올리버 웬들 홈스는 1897년에 '법원이 실제로 행하는 것'이 법이며, 판결의 '실제 근거'는 적시된 판결이유보다는 '불명확한 주요전제들'에 의존하는 것이라고 함으로써 20세기 법현실주의의 중요한 테마를 제시했다.

미국의 현실주의 법학자들은 특히 규범과 사실의 불명확성에 대한 연구를 법사회학과 공유하면서 크게 발전시켰다. 한편 스칸디나비아의 현실주의 법학자들은 기질적으로는 비슷했지만 방법론을 약간 달리하여 다소 거친 경험론을 전개하면서, 법이란 과학적 연구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스웨덴의 악셀 하예르스트룀은 법규칙을 명령으로 보는 생각이 사실과 맞지 않는다고 주장했으며, 그의 제자인 카를 올리베크로나는 이러한 잘못된 관념이 근대입법의 구문상의 명령형식에서 기인한다고 보았다(실재론).

20세기 중반 이후 현재의 상황에서는 분석-논리적, 정의-윤리적, 사회학적 방법 가운데 어느 하나만을 배타적으로 옹호하거나 반대하는 법학자는 없다.

현대법철학의 특징 중의 하나는 이른바 '형식주의에 대한 반란'인데, 이것은 법의 기술적이고 논리적인 측면에만 치중하는 것에 반대하는 것이다. 19세기초 자비니가 자연법에 대해 반발한 것, 예링이 독일의 판덱텐법학을 공격한 것, 메인 그리고 인류학자들과 초기 법사회학자들의 업적 등을 상기하면 이 말을 이해할 수 있다.

그들은 보다 광범하고도 심층적인 역사, 문화발전과정의 유기적 본질에 대한 인식, 사회적 행위 및 거기에 수반된 가치 선택 등에 대한 탐구를 강조했다. 한편 미국의 로스코 파운드와 유럽의 헤르만 칸토로비츠로 대표되는 법사회학에서는 가치와 사실 양자에 적절한 비중을 부여하는 방법론을 발전시키기 위해 애쓰고 있다.

한국의 법철학

한국의 법철학이 서양과 일본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아온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한국의 석학들은 그 가운데에서도 통찰력과 진지성을 바탕으로 한국 법철학의 토대를 닦았다. 여기에서는 몇몇 학자들의 업적을 중심으로 간략하게 한국 법철학의 현황을 살펴보았다.

한국 최초로 체계적인 법철학 저술을 내놓은 것으로 평가받는 이는 이항녕이다. 1955년 발간된 〈법철학 개론〉은 그 내용과 골격의 방대함과 웅장함이 읽는 이를 압도한다. 이항녕의 궁극적 관심사는 분열·대립하고 있는 세계질서의 조화와 종합을 위한 이념을 찾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우선 전세계를 동방(東方)·중방(中方)·서방(西方)으로 나눈 후, 각각에 대해 독자적인 생활유형, 즉 '풍토'(風土)를 인정하는 3원적(三元的) 세계관을 주장했다. 또한 그의 법철학의 근본이 되는 것은, 관념론과 유물론을 지양(止揚)하는 유기론(唯氣論)이다. 한편 법개념론에서도 특유의 종합적 사고가 잘 나타나는데, 법을 다른 규범과 분리하지 않고 그 공통성을 강조하며 입체구조로 파악하여 생활유형·사회규범·보장규범을 모두 포괄하는 것으로 한다.

법개념의 이러한 3가지 요소는 각기 종교적 법규, 도덕적 법규, 실정법률과 상응하며 다시 동방·중방·서방의 생활유형의 특징을 이룬다. 관념론이나 유물론에 치우치지 않으려는 그의 노력은 경제와 법, 그리고 정치와 법의 관계를 보는 데에서도 잘 나타난다. 우선 법과 경제의 상관성이 강조되고, 경제의 자유란 법으로부터의 자유가 아니라 법이 인정하는 자유가 된다.

나아가 소유권의 자유와 계약의 자유도 다만 법률상의 효과를 발생시키기 위한 요건이 당사자의 의사에 위임되었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고, 일정한 요건을 갖춘 이상 그 효과는 법에 의해 사전(事前)에 확정되어 있다고 한다. 법과 정치의 관계에 있어서도 법치주의와 정치주의를 고루 인정하고 종합하려는 시도가 보인다. 정치가 자기 이념만을 고집하여 법의 정신을 무시하면 결국 정치 자체가 파탄할 것이고, 법이 자기 이념에만 집착하여 정치의 새로운 동향에 무관심하면 결국 법의 사회질서 유지력이 상실된다는 것이다.

법치주의의 한계에 대한 그의 태도는 확신범(確信犯)에 대한 평가와 연결된다. 즉 부정법(不正法)과 비극적으로 충돌·상극하는 '확신범'의 존재는 법질서에 있어서 가장 큰 맹점인 동시에 사회진화의 광휘 있는 일면이 된다. 대개 구질서는 이들에 의해 붕괴되고 신질서는 이들에 의해 성립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종합적 사유는 법의 근본요소라고 할 수 있는 권리와 의무 개념까지도 넘어서고 있다. 즉 종래의 권리와 의무라는 상반 개념만으로는 현대의 법질서, 특히 사회법 분야를 제대로 해명할 수 없다고 보고, 그 양자를 공존·통합한 새로운 법개념이 요청되는데 이것이 바로 직분이라고 한다.

예컨대 친권(親權)에서 친권과 친의무(親義務)를, 노동권에서 노동의 의무와 노동의 권리를 별개로 생각하는 것은 그 법의 진정한 의도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따라서 직분이라는 종합적 법률개념이 요청되며, 비록 이것이 권리와 의무보다 미숙하고 생경한 개념이나, 미래의 법률세계에서 왕자(王者)가 될 날이 있을 것이라고 한다. 이 직분론은 자유와 평등을 공존시키는 '평화'라는 법이념과 상응하고 있으며, 특히 동양 유교의 '분'(分) 사상에 의존하는 바가 크다.

이처럼 장래 법질서의 모습을 동양적 세계관에서 찾고자 하는 그의 소망은 또한 법효력론에서도 나타나서, 법효력의 근거로서 보통 논의되는 법의 정당성, 실력성, 수범자의 승인 외에, 위정자의 책임감과 이에 대한 인민의 신뢰감이 내세워진다.

이항녕과 거의 동시대인으로서 한국 법철학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이는 황산덕(黃山德)이다. 1950년 이래 재판을 거듭해온 그의 〈법철학 강의〉에는 서양의 법철학이 망라되어 그 요점이 간명하게 정리되어 있다. 그러나 그의 결론은 유구한 서양법철학 전통에 대한 전면적 비판이다.

자연법론이나 법실증주의, 또는 마르크스주의를 비롯한 서양의 제반 법이론은 모두 법의 본질을 탐색하는 것이었고, 이것은 한낱 헛수고에 지나지 않는다고 본다. 즉 '법의 본질'의 문제는 하나의 '가상문제'로 치부된다. 예컨대 자연법론이 주장하는 불변의 원리들은, '그의 것은 그의 것이다' 혹은 '선한 것은 선한 것이다'와 같은 동어반복에 빠지고 만다고 한다. 법실증주의의 대표자인 한스 켈젠이 주장하는 강제규범으로서의 법개념론도 "납세하지 않은 자가 처벌되는 것은 납세하지 않은 자는 처벌되도록 실정법에 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라고 하는 설명에 그친다고 본다.

이와 같은 과감한 주장을 보다 잘 이해하려면 그의 불교철학을 살펴보아야 한다. 그는 대승불교, 특히 원효의 사상에 정통하여 여러 저술을 펴내기도 했을 뿐 아니라 자신의 법철학에 토대로 삼고 있다. 그는 크게 감화를 받은 불교의 가르침을 통해, "폐쇄적인 인간의 사유를 가지고 개방적인 우리의 현실을 지적으로 규정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하며, "언어는 사물의 편에 붙어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생활 쪽에 밀착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서, 동형대응(同型對應 isomorphism)의 존재론을 거부했다.

나아가 사물의 실상은 지적 규정의 대상이 아니고, 오직 구체적 실천을 통해서 실현 또는 '증득'(證得)될 수 있을 뿐이며, 우리의 현실과 우리를 연결시켜 주는 것은 사유가 아니라 오직 우리의 실천뿐이라고 한다. 결국 그의 철학의 완성은, "우리에게 참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에 관해 알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주어진 문제를 '어떻게' 풀어 나갈 것인가"하는 질문이다.

따라서 법에 관해서도 "법이 무엇인가"하면서 법의 본질을 찾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고, "법생활을 어떻게 해 나갈 것인가"를 따져보아야 한다고 충고한다. 다시 말해 앞뒤가 잘 맞는 실정법규를 제정하고 상황의 변화에 따라 수시로 그것을 개정하여 필요가 생기면 그것을 적절하게 도구로 사용하는 것, 이것이 법률가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가 되므로 그밖에 법의 본질과 같은 가상문제에 말려들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한편 국민이 법의 보호를 제대로 받기 위해서는 그 법을 충분히 활용할 수 있을 만큼 국민의 능력이 향상되어 있어야 하고(民强說), 국민이 얼마만큼 능력이 있고 강한가에 따라 소위 민주주의와 법치주의의 정도가 정해진다고 한다. 민주주의는 부여되는 것이 아니라 쟁취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황산덕은 "법의 본질같은 가상문제에 말려들지 않도록 교통정리를 하는 것"이 법철학의 임무이며, 이것은 미혹(迷惑)에서의 해방을 의미하므로 참된 법철학자는 마치 의사와 같다고 보았다.

한편 이태재(李太載)는 켈젠의 이론이 풍미하던 학계에 경종을 울리면서 〈자연법론〉(1962)을 발간한 이래, 1984년에는 그 상론(詳論)인 〈법철학사와 자연법론〉을 발표하여 자연법론의 고상함을 잘 보여주었다.

그의 이론은 토마스주의에 바탕을 두고 있어서 국민주권을 인정하면서도 교회의 권위, 즉 국가법에 대한 교회법의 우위를 수용하고 있다. 그는 현대의 자연법적 원리들을 조목조목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으며, 이것은 인간의 존엄과 인권으로 시작하여 인류공동체의 평화로 종결된다. 구체적으로는 생명·생존의 권리와 의무, 사회인으로서의 연대성, 공동선(共同善), 혼인의 원리와 자녀교육의 의무, 기타 여러 사회문제에 대한 해결원칙에 이르기까지 두루 검토된다. 특히 사유재산제를 긍정하면서도 그 운용은 "재화라는 것이 모든 인류를 위해 창조된 것"이라는 뜻에 따라 그 혜택이 두루 돌아가도록 해야 한다는 주장, 그리고 "노동임금의 기준을 기업이윤에 둘 수 없다"는 소론(所論)에서는, 로마 가톨릭 교회처럼 자본주의 내에서의 사회개량을 위해 노력하는 정신이 엿보인다.

그는 "존재론적 자연법론은 개인·가정·국가·인류공동체가 함께 완성되는 전체적이고 균형있는 인간질서를 그 내용으로 하며, 그 질서를 통하여 인간이 신의 창조의사에 부합하려는 것이다"라는 말로써 자신의 법철학을 요약하고 있다.

또한 김병규(金秉圭)는 〈법철학의 근본문제─동서비교서설(東西比較序說)〉(1988)에서 사물의 본성을 유교적으로 설명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동양의 법철학의 줄기를 서양 법철학의 개념과 비교·조응하여 밝히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서양 법철학에서 중요개념의 하나인 '사물의 본성'에 동양의 '사물지리'(事物之理)가 대응되는데, 사물지리는 〈대학〉의 8조목 중의 격물·치지(格物致知)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그 이치는 다시 소이연지고(所以然之故)와 소당연지칙(所當然之則)으로 나뉜다. 물론 그 대강(大綱)은 주자(朱子)·이황·이익의 사상을 따르고 있다. 한편 그 소이연(所以然)과 소당연(所當然)은 서양의 방법이원론상의 존재·당위와 관계되는데, 소이연에서 소당연이 나오는 것으로 파악하는 일원론이 피력된다. 즉 당위는 법적 사실로 존재하는 것이다.

또한 서구의 황금률(黃金律)은 공자(孔子)의 충서(忠恕)나 혈구지도와 비교되고 있으며, 정의(正義)는 의(義)와 분(分)으로 설명된다. 한편 의는 실천이성의 합리성에, 그리고 분은 '각자에게 그의 것을'(suum cuique)에 대응되고 있다. 동양의 특유한 관념인 예(禮)는 도덕과 법과 관습의 기준으로 규정된다. 요컨대 김병규는 헤겔이나 베버 등의 일면적이고 편파적인 동양관에 대해 비판적인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

끝으로 심헌섭(沈憲燮)은 무엇보다도 학적(學的) 엄밀성을 중시하는 것을 자신의 법철학의 한 특징으로 삼고 있다.

그 엄밀성은 논리학과 분석철학에 기초하고 있다. 한국 법철학은 그의 연구를 통해 '규범논리'의 새로운 장을 맞이했고, 분석법철학(分析法哲學)을 그 한 부문으로 수용했다. 규범논리의 연구에 있어서 그의 기본적 소망은 법적용의 영역에서 추론의 타당성 문제와 전제 자체의 정당성 문제를 동일시하여, 법적용의 연역적 요소를 보지 못하는 오류를 피하자는 것이다.

그는 여러 논문을 통하여 법적 추론의 논리적 타당성을 교육하고 있다. 그러나 추론의 전제 자체, 즉 규범의 정당성 문제에 대해서는 상대주의를 넘어서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은 가치상대주의에의 안주가 아니다. 그는 가치상대주의를 출발점으로 하는 법실증주의에 대항하여 비판적 법실증주의를 표방하며, 법은 '궁극적인 인간다운 평화질서' 이외의 것에로 지향될 수는 없다고 고백한다. 한편 그의 박사학위논문인 〈존재와 당위〉는 분석적·논리적 탐구의 좋은 예이다.

여기에서는 존재-당위 이원론이 치밀하게 논증되어 있는데, 존재와 당위의 논리적 균열이 양자 사이의 사실적 분리를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한다. 그의 분석적 방법은 〈법철학 Ⅰ〉(1982)에서 '법개념'과 '법효력'을 논의하는 가운데서도 잘 나타난다. 현재 그는 법이념론, 특히 정의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으며 그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