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로티우스

그로티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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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테이블
출생 네덜란드 델프트, 1583. 4. 10
사망 1645. 8. 28, 메클렌부르크슈베린 로스토크
국적 네덜란드

요약 그의 법률대작인 〈전쟁과 평화의 법〉(1625)은 근대국제법에 최초로 큰 영향을 끼쳤다. 15세 때 프랑스 왕 앙리 4세에게 사절단으로 가는 요한 반 올덴바르네벨트를 수행하면서 간 오를레앙에 머물러 법을 공부했다. 그해에 1598년의 정치상황을 독백형식으로 종합한 6권의 〈로마의 신관〉를 펴냈다. 1599년 네덜란드로 돌아와 헤이그에서 옛 스승인 오이텐보하에르트 집에 잠시 머물면서 변호사로 일했다. 그로티우스는 점점 네덜란드 정치에 연루되기 시작했다. 1609년 논문에서 그로티우스는 모든 나라는 자유롭게 해양을 이용할 권리가 있음을 주장했는데, 이 주장은 이후 널리 유포되었다. 그가 쓴 네덜란드 법제에 관한 입문서는 1631년에 출판되었는데, 그중 일부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1859~1901년에 법률로 통용되었다. 그는 말년에 프랑스에서 망명생활을 하면서 <전쟁과 평화의 법>을 썼다.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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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요
  2. 어린시절과 교육
  3. 정치연루
  4. 파리 생활
  5. 그로티우스에 대한 평가

개요

그의 법률대작인 〈전쟁과 평화의 법 De Jure Belli ac Pacis〉(1625)은 근대국제법에 최초로 큰 영향을 끼쳤다.

어린시절과 교육

지식인이었던 그의 아버지는 델프트 시장(市長)이자 레이덴대학 평의원이었다.

그를 델프트에서 처음으로 학교에 보낸 뒤 그의 아버지는 헤이그의 목사이자 신학자인 요한네스 오이텐보하에르트에게 맡겼는데, 오이텐보하에르트가 1618~19년 아르미니우스설을 주제로 한 종교분쟁에 앞장을 섰기 때문에 그로티우스는 수년간 감옥생활을 해야 했다. 어렸을 때부터 재능이 뛰어나 8세에 라틴어로 만가(挽歌)를 지었고 11세에 레이덴대학 문학부 학생이 되었다. 그는 곧 유명한 라틴어 학자 주세페 스칼리제르의 수제자가 되어 시인으로서 큰 발전을 이루었다.

15세 때 프랑스 왕 앙리 4세에게 사절단으로 가는 뛰어난 정치가 요한 반 올덴바르네벨트를 수행하면서 그곳에서 영접을 받고 법을 공부하고자 오를레앙에 머물기로 했다.

그해에 1598년의 정치상황을 독백형식으로 종합한 6권의 〈로마의 신관 Pontifex Romanus〉를 펴냈다. 훗날 그는 문학이 아닌 법조계에 들어선 것을 후회했다. 1599년 네덜란드로 돌아와 헤이그에서 옛 스승인 오이텐보하에르트 집에 잠시 머물면서 변호사로 일했다.

1600년에는 그해 처음 6개월 동안 육해(陸海)에서 벌어진 일에 관해 쓴 시(詩) 〈기적 Mirabilia〉이 나왔다.

1601년 네덜란드 정부는 이 유능하고 젊은 변호사를 공식 라틴어 사료편찬관으로 임명하고 특별히 네덜란드 공화국의 대(對) 스페인 항쟁을 기술해줄 것을 요청했다. 조국의 역사에 늘 관심을 갖고 있던 그는 그해에 로마 역사가 타키투스의 역사전개방식을 취하여 〈벨기에 연대기 및 역사 Annales et Historiae de Rebus Belgicis〉라는 책을 쓰기 시작했다.

이 책은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Annales'는 1559~88년을 망라했고, 'Historiae'는 1588년부터 시작하여 12년의 휴전기간(1609~21)을 다루고 있다.

그는 문헌학과 시에 관해서도 많은 책을 썼다. 1598년 자유 7과에 관한 마르티아누스 카펠라의 안내서를, 그리고 거의 같은 시기에 BC 3세기 그리스 솔리의 아라투스가 쓴 천문학 서적 〈현상 Phaenomena〉에 주석을 달아 편집했다. 그리고 인문주의자 다니엘 헤인시우스와 함께 그리스 전원시인 테오크리토스의 작품을 라틴어로 옮겼고, 1601년에는 희곡 〈추방된 아담 Adamus Exul〉과 성시(聖詩)들을 묶은 라틴어 시집 〈Sacra〉를 펴냈다.

널리 읽히고 모사(模寫)되기도 한 〈Adamus Exul〉은 영국의 시인 존 밀턴이 아주 감탄했던 작품이다. 1614년에는 다시 로마의 작가 루카누스의 작품을 편집했다.

정치연루

그로티우스는 점점 네덜란드 정치에 연루되기 시작했다.

당시 공화국은 스페인·포르투갈 연합왕국과 평화로운 관계였으나 포르투갈이 동인도제도에 대한 무역독점을 주장했다. 네덜란드 해군제독이 포르투갈 함대 산타카타리나호를 나포(拿捕)했을 때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1604년 그로티우스에게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네덜란드의 무역권을 빼앗았다는 근거에서 이를 변호하는 법률논문 〈전시포획물(해상)과 육상전리품에 관한 법 De Jure Praedae〉을 써줄 것을 요청했다.

1609년 논문 가운데 〈Mare Liberum〉이라는 제목의 한 장에서 그로티우스는 모든 나라는 자유롭게 해양을 이용할 권리가 있음을 주장했다. 이 장은 널리 유포되었고 자주 증쇄(增刷)되었다.

1607년 그는 홀란트 주(州) 법무장관(advocaat fiscaal)으로 임명되었고, 1608년에 베에레 시장의 딸 마리아 반 레이헤르스베르흐와 결혼했다. 그녀는 어려운 시절에도 꿋꿋하게 그를 지지했던 지적이고 용기있는 여인이었다. 그들은 7명의 자녀를 두었다. 같은 해에 희곡 〈고통받는 그리스도 Christus Patiens〉를 발표했고 이는 후에 널리 모사되었다.

1613년 그는 영국의 제임스 1세에게 가는 사절단을 이끌었으며, 공식목적은 무역불균형의 시정이었지만 그 기회를 이용해 종교문제, 특히 그가 심사숙고하던 모든 교회의 재통합을 왕과 논의했다. 그해에 그는 공화국을 양분시키는 정치적·종교적 논쟁에 깊이 연루되었다.

이것은 원래 레이덴대학의 두 교수인 야코부스 아르미니우스와 프란시스쿠스 호마루스 사이의 예정설에 관한 신학논쟁이었는데, 마우리츠 황태자가 이끄는 네덜란드 국회의 정통 칼뱅주의 다수파와 홀란트 주의 논전으로 발전했다.

그로티우스는 항상 그리스도교인의 평화와 통합을 위해 애쓰는 부드럽고 온건한 사람이었지만 올덴바르네벨트와 지방교회들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홀란트 주의회의 명령으로 그는 1613년 의회의 교회정책을 열렬히 변호하는 〈홀란트의 교령(敎令)과 웨스트프리지아(서프리지아)의 자비 Ordinum Hollandiae et Westfrisiae Pietas〉를 발간했다.

1618년 마우리츠 왕자는 그로티우스와 정치가 요한 반 올덴바르네벨트를 비롯한 반대파 지도자들을 체포하도록 명령했다.

결국 올덴바르네벨트는 대역죄로 처형되었고 그로티우스는 종신형을 받아 루베스테인 성에 유폐되었으나 아내와 아이들은 그와 함께 있도록 허용되었다. 옥중에서 그는 평화로운 그리스도교 포교자라 여긴 네덜란드 선원들을 위해 〈Bewijs van den waren Godsdienst〉라는 시를 썼으며 나중에 이를 〈그리스도교의 진리에 관하여 De Veritate Religionis Christianae〉(1627)라는 라틴어 산문으로 번역했다.

이것으로 그는 명성을 얻었으며, 또 아랍어와 우르두어를 포함해 13개 언어로 옮겨졌다.

또한 아주 중요한 저서인 〈Inleydinghe tot de Hollandsche Rechts-geleerdheyt〉라는 네덜란드 법제에 관한 입문서를 쓰기 시작했으며 이는 1631년에 출판되었다. 〈Inleydinghe〉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1859~1901년에 법률로 통용되었다.

1621년 3월 22일 그는 책 상자에 숨어 루베스테인 성에서 탈출했다.

그는 안트웨르펜을를 거쳐 파리로 도망하여 루이 13세와 많은 정치가 및 학자들의 큰 환대를 받았다. 가족들과 함께 살 수 있도록 허락받았으나 문필에만 의지하여 불안한 생계를 꾸려가야만 했다. 루이는 그에게 연금을 주었지만 일정하지 않았으며 칼뱅주의자였으므로 교수직도 얻을 수 없었다.

파리 생활

그는 1625년 망명생활을 하면서도 〈전쟁과 평화의 법〉을 펴내 국제법의 기초를 다졌다.

〈Apologeticus eorum qui Hollandiae Westfrisiaeque et vicinis quibusdam nationibus ex legibus praefuerunt〉에서는 종교논쟁에서 네덜란드와 자신이 처한 입장을 변호했다. 그는 또한 에우리피데스의 〈Phoenissae〉(1630)를 라틴어로 번역했고, 성서주석서 〈Annotationes in Libros Evangeliorum〉을 펴냈다.

1625년 마우리츠 왕자가 죽자 1631년 그는 네덜란드로 돌아왔다.

그러나 의회에서 열띤 논쟁을 벌인 뒤 오라녜가(家)의 프레데리크 헨리크 왕자가 중재에 나섰지만, 다시 체포의 위협을 받았다. 1632년 당시 프랑스와 스웨덴 간의 외교 중심지였던 함부르크로 갔다. 그의 국제적 명성은 대단해서 스웨덴 수상 A. G. 옥센셰르나 백작은 1634년 파리 주재 스웨덴 대사라는 중책을 그에게 맡겼다. 그로티우스는 그 은혜를 기려 희곡 〈Sophompaneas〉(1635)를 통해 성서에서 이집트 총리대신이 된 요셉의 행운을 자기의 처지와 연관시키고 있다.

네덜란드의 위대한 시인 요스트 반 덴 본델은 이 희곡을 〈궁정의 요셉 Joseph in't Hof〉으로 번역했다. 그로티우스는 다시 파리로 왔으나 자신에게 외교관의 재능이 없음을 바로 깨달았다.

1636~37년 그는 〈고트족, 반달족, 롬바르디아족의 역사 Historia Gothorum, Vandalorum et Langobardom〉를 집필했다. 또 타키투스의 저작들도 편집했다(1640). 1644년 크리스티나 왕비가 스웨덴으로 초대하여 대단한 환대를 받았지만 대사직에서 해임되었다.

그는 스웨덴 국무회의 위원으로 임명되었으나 스웨덴에 머무르려 하지 않았다. 파리로 돌아오는 길에 그가 탄 배가 포메라니아 해안에서 난파되어 그는 이틀 뒤 로스토크에서 탈진해 죽었다.

그로티우스에 대한 평가

그의 뛰어난 재능은 기발한 사상가나 창조적인 천재의 것이라기보다 학자의 재능이었다. 그의 훌륭한 시는 라틴어로 씌어졌는데, 구성과 내용이 모두 복잡하다. 네덜란드어로 쓴 시는 작품수가 많은데, 주로 교훈을 주기 위한 것이었다. 역사가로서 그는 타키투스의 방식을 따랐는데, 〈Annales et Historiae〉는 인문주의 역사편찬의 걸작이다.

신학자로서 그는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이상으로 보았고, 개신교 신학자들과 긴밀한 접촉을 가지는 한편 가톨릭 사제들과도 사귀었다. 동시대의 저명인사들과 교환한 서신이 많이 남아 있다.

그로티우스는 근대 국제법의 기초를 이루는 〈전쟁과 평화의 법〉으로 끊임없는 명성을 누리고 있다. 그 주요업적은 이전의 저술가나 사상가들의 사상을 종합했다는 데 있다. 그가 새로 도입한 주요이론은 국가는 자연법의 구속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는 자연법을 신으로부터 벗어나 인간본성에 바탕을 둔 보편적인 법률이라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