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덴바르네벨트

올덴바르네벨트

다른 표기 언어 Johan van Oldenbarnevelt 동의어 요한 반 올덴바르네벨트
요약 테이블
출생 1547. 9. 14, 스페인령 네덜란드 아메르스포르트
사망 1619. 5. 13, 헤이그
국적 네덜란드

요약 네덜란드의 변호사·정치가.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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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요
  2. 초기경력
  3. 정치적 지도력
  4. 종교적 갈등
  5. 마우리츠 공과의 불화
올덴바르네벨트(Johan van Oldenbarnevelt)
올덴바르네벨트(Johan van Oldenbarnevelt)

개요

침묵공 빌렘 1세 이후 독립 네덜란드의 제2의 창건자였다.

빌렘의 아들 마우리츠 밑으로 네덜란드 세력을 한데 묶고, 1596년 프랑스·영국과 반(反)스페인 삼국동맹을 맺었다. 12년 휴전조약(1609)에서는 공화국 내 홀란트의 지배적인 역할을 재확인했다(네덜란드 공화국).

초기경력

올덴바르네벨트는 루뱅·부르주·하이델베르크(여기서 프로테스탄트로 개종하게 된 결정적인 싹이 텄음) 그리고 파도바에서도 법학을 공부한 것 같다.

네덜란드로 돌아와서는 호프 반 홀란트에서 변호사생활을 시작했다. 헤이그에 세워졌던 이 법원은 간단히 말해 홀란트 주 안에서 발생한 문제를 처리하는 항소 법원이었다. 1572년 네덜란드의 두 주(州)인 홀란트와 젤란트가 브뤼셀에서부터 스페인의 지배를 뿌리치는 데 성공하자, 올덴바르네벨트는 위트레흐트로 도피한 항소 법원을 따라가지 않고 국가의 독립을 위한 운동에 몸을 던지기로 결심했다.

그는 하를렘과 레이덴의 포위된 도시를 구출하는 작전에 참가하기도 했다. 1576년에 로테르담의 사법관(엄밀히 말해 상근하는 법률 고문)에 임명되었다. 이 직위로 인해 자동적으로 주의회 의원이 되었으며, 독립운동이 다른 주들로 퍼졌을 때 브뤼셀과 안트웨르펜에서 열리는 전국회의에 자주 참석했다. 1578년 파르마 공작 알레산드로 파르네세의 지휘 아래 스페인 군이 전면적인 재정복을 시도하자 올덴바르네벨트는 1579년 1월에 결성된 위트레흐트 동맹의 협상 대표 가운데 한 사람으로 참가했다.

이 동맹은 1795년까지 연합주들의 일시적인 헌법 기능을 다했다. 이 협상 기간에 올덴바르네벨트가 홀란트를 정치적으로 확고한 위치에 놓으려고 했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전략적으로 공격하기가 거의 불가능한 이 자치주는 거의 7년 동안 젤란트와 함께 홀로 독립운동의 선두에 선 이후, 이제는 정치적으로도 마땅히 확고한 위치를 부여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활동을 하는 가운데 그는 침묵공 빌렘과 아주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정치적 지도력

1586년 빌렘이 암살된 지 2년이 지나 올덴바르네벨트는 홀란트 주 당국에 의해 주법률고문(landsadvocaat)에 임명되었는데, 이 직위는 그가 실권한 뒤 대사법관(raadpensionaris)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주법률고문 직무를 수행함으로써 그는 침묵공 빌렘의 정치적 유산을 관장하는 진정한 후견인이 되었다. 빌렘의 아들이며 훌륭한 군사령관인 나사우의 마우리츠가 전장에서 실제적인 전쟁 수행을 담당하고 있는 동안, 올덴바르네벨트는 그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며 국가의 가용 동력과 자원을 동원하고 편성함으로써 전쟁을 치를 수 있게 했다.

이러한 활동의 하나로서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를 창건하는 데 적극적인 역할을 했다(네덜란드동인도회사). 올덴바르네벨트는 이론적으로는 7개 독립주에 불과했던 한 주의 관리에 불과했지만, 수차례 프랑스와 영국에 대한 외교 업무를 수행했기 때문에 사실상 연합주의 외무장관이나 다름없었다. 또한 이러한 자격으로 침묵공 빌렘이 하던 일을 계승하고, 합법적 군주에 대해 반란을 일으키고 세운, 어떤 점에서는 전도가 불확실하고 정치적으로는 정통성을 확보하지 못한 신생 공화국을 통합하는 데 성공했던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그가 거둔 최대의 승리는 1596년 프랑스·영국과 체결하여 제 기능을 십분 발휘한 삼국동맹이었다.

그러나 외교 분야에 있어 올덴바르네벨트의 주된 업적은 오랜 기간의 협상을 거쳐 1609년에 체결된 이른바 12년휴전조약이었다. 이 조약으로 인해 스페인을 네덜란드 전역에서 몰아내려던 원래의 전국적 차원의 계획이 사실상 포기되고, 7개의 독립주들로 구성된 북부 공화국이 수립되었다.

다른 한편 연방의 지도적 정치가로서의 올덴바르네벨트의 지위에 따라다니게 마련인 흠집이 분명히 드러난 것도 바로 이 업적에서였다.

즉 '연방에 잔류한' 옛 네덜란드의 7주 중 오로지 홀란트 주만을 그가 맹세코 대변하는 상황이 벌어졌던 것이다. 스페인 군이 브라반트와 플랑드르 등 이전의 주도적인 자치주들을 재정복함으로써 생긴 정치적 공백을 채우는 과정에서, 그때까지는 주변 지역에 불과했던 홀란트가 두각을 나타내게 되었으며 홀란트는 연방 예산의 59% 가까이를 담당했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크게는 '홀란트 중심주의'가, 또는 심지어 '홀란트주의'가 다소간 불가피한 것으로 비쳐졌고, 주 법률고문은 연방 조직 안에서 홀란트주의의 주된 주창자이며 옹호자였다.

같은 방식으로 오라녜가(家)의 군주들은 거의 자동적으로 연방 개념의 주된 옹호자 역할을 맡게 되었다.

이러한 사실에 비추어볼 때, 다음에 벌어지는 올덴바르네벨트와 마우리츠 사이의 갈등은 그것의 복합적인 원인들을 상세히 조사해 보지 않는다 해도 기본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빌렘이 암살된 뒤 아들 마우리츠 공이 홀란트 주의 개체성과 특별한 위치를 지키려는 올덴바르네벨트와 그의 정치적 동료들에 의해서 홀란트 주총독의 자리에 올랐다는 것은 전혀 적절하지 않았다. 특히 레스터 백작 로버트 더들리가 총독의 자격으로 그가 생각하는 중앙집권화된 정부 개념을 여러 자치주들에게 강요하려고 했던 1586년 당시에는 더욱 그러했다.

종교적 갈등

1609년에 체결된 12년휴전조약이 효력을 발휘하던 기간에, 잠재되어 있던 갈등이 종교적 측면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났다.

네덜란드 독립 운동의 놀랄 만한 승리는 조만간 '연방에 잔류하는' 모든 주들이 소수인 칼뱅파에게 지배받게 되리라는 사실과 불가분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그들이 자신들의 신앙을 포기하지 않는 이상 배교한 통치자인 스페인의 펠리페 2세와 화해할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침묵공 빌렘과 같이 올덴바르네벨트 역시 개혁교회의 신조를 받아들였지만, 그와 그의 홀란트 동료인 '섭정단'은 칼뱅주의적 형식의 종교개혁에 기초를 두기는 하나 교리면에서 충분히 자유로워 로마 가톨릭 교회에 대해 순종할 마음이 없는 모든 사람을 만족시키고 매료시킬 만한 교회상을 품고 있었다.

홀란트의 이러한 지배자들에 따라 홀란트 주는 이단재판으로부터의 자유를 포함하여 자유를 지키기 위해 스페인식을 닮아가는 대군주의 중앙집권적이고 폭군화하는 경향에 강하게 반발해왔다. 그들은 로마 가톨릭이나 스페인에 대해서처럼 제네바에서 유래한 칼뱅파도 달가워하지 않았다. 다른 한편 많은 신학자들과 목사들의 입장에서 보면, 반란은 개혁교회를 위해 지나치게 완고할 정도로 엄격한 교리의 다양성이란 문제를 둘러싸고 일어났다.

예정설이라는 쟁점을 둘러싼 대립이 레이덴의 두 신학교수(엄격하게 칼뱅주의를 고수하려던 고마루스와 보다 온건했던 아르미니우스) 사이의 논쟁에서 구체화되었을 때, 올덴바르네벨트와, 암스테르담을 뺀 투표권이 있는 대부분의 홀란트 주 도시들은 확고하게 고마루스주의자이거나 또는 일반적으로 불리듯이 반박성명지지파였던 칼뱅주의 대중에 대해 반대하고 아르미니우스주의를 지지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올덴바르네벨트와 그의 지지세력은 어느 정도는 비관용적인 조처들을 가지고 관용의 원리를 수호해야만 했다. 즉 관용을 목표로 했던 여러 법령들에도 불구하고 논쟁이 될 만한 내용의 설교를 고집했던 설교자들은 면직되고 때로는 추방되었던 것이다(네덜란드 개혁교회).

게다가 종교적 논쟁은 불가피하게 자치주 대 연방의 대결 양상을 나타냈다.

반박성명지지파 설교자들은 시종일관 자기들의 종교가 연방을 유지시키는, 신이 준 '접착제'라고 주장했다. 현실 정치의 의미로 바꾸어 말하면 이것은 그들이 제네바(칼뱅주의) 모델에 기초한 의기양양한 교회를 세워야 한다고 믿는(이러한 믿음은 후에 그릇된 것으로 판명되었음) '국가적', 즉 자치주들이 모두 참여하는 종교회의를 소집하기 원한다는 것이었다. 이때 교회는 모든 시당국으로부터 완전히 독립되어 있어야 했다. 시당국이 정당한지, 따라서 다스릴 권리를 가지고 있는지를 판단하는 것은 바로 성직자였다.

명확한 이유에서 올덴바르네벨트가 이끄는 홀란트 주는 이러한 종류의 종교회의를 몹시 위험한 것으로 생각하여 회의에 동참하기를 거부했다.

마우리츠 공과의 불화

두 사람의 대결은 1617년 7월 마우리츠 공이 도전적이지는 않더라도 공공연하게 반박성명지지파에 섰을 때 절정에 이르렀다.

올덴바르네벨트와 홀란트 섭정단에 대해 간접적으로 전쟁이 선포되었던 것이다. 이에 대해 홀란트 주당국은 1617년 8월 4일 홀란트 주내의 여러 도시들에게 특히 연방 군대에 나가지 말고 도시 단위의 무장을 하며, 심지어 주의 총사령관인 마우리츠의 명령에 복종하지 말라고 고무하는 소위 '단호한 결정'으로 대응했다. 홀란트 주는 자체의 권한 내에서 그러한 조치를 취했다. 마우리츠는 그러한 조치를 연방규약에 대한 침해라고 여겼다.

동작이 느린 전략가였던 마우리츠는 1년 정도를 연방에서 자기 위치를 강화하는 데 보내다가 돌연 1618년 8월 29일 올덴바르네벨트와 그의 가까운 동료 몇몇을 함께 체포했다. 이들의 우두머리는 올덴바르네벨트의 비공식적 '왕세자'인 로테르담의 사법관 후고 그로티우스였다.

네덜란드 역사에서 일찍이 연방 대 자치주 사이의 문제가, 어떻게 그리고 누구에 의해 올덴바르네벨트가 그 목숨이 걸린 재판을 받아야 할 것인가와 같은 곤혹스러운 문제로 나타났던 적은 없었다.

적어도 이론상으로 확고한 근거를 가지고 있었던 올덴바르네벨트는 자기는 오직 홀란트라는 독립 주 공복(公僕)의 한 사람으로만 행동했기 때문에 홀란트 주 사법부에 대해서만 책임이 있다고 주장했다. 반면 그의 정적들은 그를 연방에 대한 반역죄 명목으로 재판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연방 사법부가 없었으므로 특별재판부를 구성하는 것만이 유일한 방법이었다.

이 재판부는 24명의 판사들로 구성되었는데, 결코 모두 사법관으로 자격이 있는 자는 아니었으며 그들 중에 적지 않은 수가 정치적 반대파들 이외에도 개인적으로 올덴바르네벨트에게 적대적인 인물이었다. 그렇다 할지라도 6개월 이상의 투옥과 심문을 거쳐 사형이 선고되었다. 그러나 죄목은 여론에 유의하며 선전해왔던 반역죄가 아니고, 국가의 종교와 정책을 '전복'했다는 것이었다. 1619년 5월 그는 헤이그에 있는 빈넨호프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그의 처형은 네덜란드 역사에서 다른 어떤 사건보다도 자주 네덜란드 역사학과 심지어 정치학의 주제로 등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