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히테

피히테

다른 표기 언어 Johann Gottlieb Fichte
요약 테이블
출생 1762. 5. 19, 작센 상(上)루자티아 라메나우
사망 1814. 1. 27, 베를린
국적 독일

요약 초월적 관념론자인 피히테의 사상에 주요한 영향을 미친 것은 칸트의 사상이었다. 인간의 선천적인 도덕 가치에 관한 칸트의 학설은 피히테의 성격과 딱 들어맞았다. 그는 참된 철학을 완성하는 데 헌신하기로 결심했으며, 이 참된 철학의 원리는 선천적 격률이어야 한다고 보았다.
1792년 피히테는 쾨니히스베르크에 있는 칸트를 직접 만나 그의 논문 〈모든 계시에 대한 비판 시도〉를 제출했다. 여기서 피히테는 계시 종교가 가능한 조건들을 설명하려고 애썼다. 피히테의 철학은 윤리를 강조한 예나 시기(1793~98)와 신비적·신학적 존재론이 나타난 베를린 시기(1799~1806)로 나누어지는데, 이 두 시기는 철학적 기본 견해에서도 차이를 갖고 있다. 1807~08년에는 베를린에서 <독일 국민에게 고함>이라는 연설을 했다. 이 연설은 국권의 회복과 영광을 위하여 유일한 올바른 길에 관한 실천적 견해들로 가득 차 있다. 1810~12년 베를린대학교의 초대 총장이 되었다.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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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요
  2. 초기생애와 경력
  3. 예나대학교 시절
  4. 베를린 시절
  5. 말년
피히테(Johann Gottlieb Fichte)
피히테(Johann Gottlieb Fichte)

개요

초월적 관념론자이다(칸트주의, 선험적 관념론).

초기생애와 경력

리본 직공의 아들로 태어나 1774~80년 포르타 초등학교, 1780년 예나대학교, 1781~84년 라이프치히대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후 튜터로 일을 시작했다.

튜터 자격으로 1788년 취리히에 갔으며, 1791년에는 바르샤바에 갔으나 2주 동안 견습만 마치고 떠났다. 이때 그의 사상에 주요한 영향을 미친 것은 칸트의 사상이었다. 인간의 선천적인 도덕 가치에 관한 칸트의 학설은 피히테의 성격과 딱 들어맞았다. 그는 참된 철학을 완성하는 데 헌신하기로 결심했으며, 이 참된 철학의 원리는 선천적 격률이어야 한다고 보았다.

피히테는 바르샤바를 떠나 쾨니히스베르크에 있는 칸트를 직접 만나러 갔지만 이 최초의 면담은 실망만 안겨 주었다. 나중에 피히테가 칸트에게 그의 논문 〈모든 계시에 대한 비판 시도 Versuch einer Kritik aller Offenbarung〉를 제출했을 때 칸트는 그에게 좋은 인상을 받고 출판업자를 구하는 일을 도왔다(1792). 초판에서 피히테의 이름과 서문을 우연히 빠뜨리게 되었는데, 이 책이 나오자마자 재빨리 읽은 독자들은 칸트의 글이라고 여겼다.

칸트가 이 글을 추천하면서 잘못을 바로잡자 피히테의 이름이 알려졌다.

〈모든 계시에 대한 비판 시도〉에서 피히테는 계시 종교가 가능한 조건들을 설명하려고 애썼다. 그의 설명은 도덕 법칙의 절대적 필수조건에 초점을 맞추었다. 종교 자체는 이 도덕 법칙을 신성한 것으로 믿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믿음은 실천적 요청이며, 도덕법칙에 힘을 부여하기 위해 필요하다.

이 도덕성의 신성한 성격은 낮은 차원의 충동을 바탕으로 법칙에 대한 경외심을 극복한 사람들만이 볼 수 있다. 이같은 경우라면 계시는 도덕 법칙에 위력을 더하기 위해 주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따라서 종교는 궁극적으로 실천이성에 의존하며 인간이 도덕 법칙 아래에서 있는 한 인간의 욕구를 채워준다. 이러한 결론에서 분명히 드러나듯이 피히테는 실천적 요인을 부각시켰으며 자아의 도덕적 요구를 실재에 대한 모든 판단의 근거로 삼으려는 경향이 있었다(종교철학).

1793년 피히테는 취리히에 머물고 있는 동안 만난 요한나 마리아 란과 결혼했다.

같은 해 익명으로 2개의 주목할 만한 정치 저작을 출판했다. 그중 〈프랑스 혁명에 관한 대중의 판단을 교정하기 위하여 Beitrag zur Berichtigung der Urteile des Publikums über die französische Revolution〉가 더 중요했다. 이 저작의 의도는 프랑스 혁명의 참된 성격을 설명하고, 자유권이 지성적 행위자로서 인간의 존재 자체와 얼마나 깊이 얽혀 있는지를 논증하고, 국가의 본질적인 진보 경향과 개혁이나 개정의 필연적 결과를 지적하는 데 있었다.

〈모든 계시에 대한 비판 시도〉처럼 이 저작에서도 인간의 합리적 본성과 이의 실현을 위해 필요한 조건들이 정치 철학을 위한 표준이 되었다.

피히테의 철학은 윤리를 강조한 예나 시기(1793~98)와 신비적·신학적 존재론이 나타난 베를린 시기(1799~1806)로 나누어지는데, 이 두 시기는 철학적 기본 견해에서도 차이를 갖고 있다. 그는 종교적 신념이 도덕적 이성을 능가한다는 견해를 받아들이면서 본래의 견해를 재빨리 바꾸었는데, 이것은 당시의 사상이 낭만주의로 발전하는 일반 추세에도 영향을 받은 것이다(존재, 형이상학).

예나대학교 시절

1793년 예나대학교에는 철학교수 자리가 하나 비어 있었고 피히테에게 그 자리를 채워달라는 요청이 있었다.

대학교수로 취직한 뒤 아주 중요한 철학 저작이 나왔다. 이 시기에 출판된 저작으로는 수준높은 지적 문화의 중요성과 이러한 문화가 부과한 의무들에 관한 강의록인 〈학자의 사명에 관한 몇 가지 강의 Einige Vorlesungen über die Bestimmung des Gelehrten〉(1794), 피히테가 평생 동안 끊임없이 수정하고 가다듬은 지식학에 관한 여러 저작, 예컨대 〈지식학의 원리에 따른 자연법의 기초 Grundlage des Naturrechts nach Principien der Wissenschaftslehre〉(1796)와 의무 개념에 기초한 그의 도덕 철학이 가장 잘 표현되어 있는 〈지식학의 원리에 따른 인륜이론의 체계 Das System der Sittenlehre nach den Principien der Wissenschaftslehre〉(1798) 등이 있다.

1794년의 체계는 피히테가 만들어낸 가장 독창적이고 특징있는 저작이었다.

이 체계는 칸트의 비판철학, 특히 〈실천이성 비판 Kritik der praktischen Vernunft〉(1788)에서 자극받았다. 이 저작은 칸트의 비판철학보다 더 체계적이었지만 지식학과 윤리학이 긴밀하게 통일되어 있는 완벽한 학설을 목표로 삼았기 때문에 처음부터 칸트의 비판철학보다 덜 비판적이었다. 피히테의 야심은 칸트가 암시만 하는 데 그친 점, 즉 실천(도덕)이성이 참으로 온전한 이성의 뿌리이고 인류 전체뿐만 아니라 모든 지식의 절대적 근거임을 증명하는 일이었다.

이 점을 증명하기 위해 피히테는 최고의 원리, 즉 독립적·절대적이라고 가정된 자아에서 출발하여 모든 다른 지식을 연역했다. 피히테는 이 최고의 원리가 자명하다고 주장하지 않고 순수 사고에 의해 요청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점에서 피히테는 순수 실천이성이 신의 존재를 요청한다는 칸트의 학설을 따랐지만, 칸트의 합리적 신앙을 자신의 과학론과 윤리학을 뒷받침하는 사변적 지식으로 변형하려 했다.

1795년 피히테는 〈철학 잡지 Philosophisches Journal〉의 공동편집자가 되었다. 1798년 피히테의 친구인 그다지 유명하지 않은 젊은 철학자 F. K. 포르베르크가 피히테에게 종교 관념의 발전에 관한 글 한 편을 보냈다. 이 글을 인쇄하기 전 피히테는 오해를 방지하기 위해 〈신의 세계 통치에 대한 우리 믿음의 근거에 관하여 Über den Grund unseres Glaubens an eine gottliche Weltregierung〉라는 짧은 서문을 썼는데, 이 서문에서 신은 세계의 도덕적 질서이고 모든 인간 존재의 기초인 영원한 정의 법칙이라고 정의했다.

무신론이라는 비난이 쏟아지자 프로이센을 제외한 독일의 모든 주들이 추종하는 작센의 선제후 정부는 〈철학 잡지〉의 출판을 금지했고 피히테의 추방을 요구했다. 피히테는 2개의 변호문을 출판한 후 징계가 내릴 경우 사직하겠다고 했으나 그 위협은 사직하겠다는 제의로 받아들여져 정식으로 수락되었다.

베를린 시절

1794년의 예나대학교 강의에 대해 긴 설명을 달면서 에를랑겐에서 지낸 1805년 여름을 제외하고 피히테는 1799~1806년에 베를린에 거주했다.

친구들로는 독일 낭만주의 지도자들 A. W. 슐레겔, F. 슐레겔, 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허 등이 있었다. 이 시기의 저작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인간의 천직 Die Bestimmung des Menschen〉(1800)에서는 신을 개인들 안에서 자신을 의식하게 되는 세계의 무한한 도덕 의지로 정의했다. 〈폐쇄적 상업국가 Der geschlossene Handelsstaat〉(1800)는 보호관세 무역제도를 찬성하는 아주 사회주의적인 논문이다.

1801, 1804년에 각각 썼으나 유작으로 출판된 〈지식학 Wissenschaftslehre〉에 관한 두 신판은 학설의 성격이 크게 변했음을 보여준다. 〈현대인의 특징 Die Grundzüge des gegenwärtigen Zeitalters〉(1806)은 1804~05년의 강의록으로서 계몽주의를 분석하면서 일반적 인간 의식의 역사적 전개에서 계몽주의의 지위를 규정할 뿐만 아니라 그 결함도 지적하고 이성적 삶의 최고의 양상으로서 신적인 세계 질서에 대한 신앙을 기대하고 있다.

〈복된 삶을 위한 지침 또는 종교이론 Die Anweisung zum seligen Leben, oder auch die Religionslehre〉(1806)에서는 〈요한의 복음서〉를 생각나게 하는 아주 종교적인 양식으로 유한한 자기의식과 무한한 자아 또는 신 사이의 결합을 다루고 있다. 신에 대한 지식과 사랑이 삶의 목적이라고 선언한다. 신은 모든 것이다. 독립적인 대상들의 세계는 반성 또는 자기의식의 결과이다. 이 반성 때문에 무한한 통일이 해체된다. 이와 같이 신은 주체와 객체의 구별을 넘어서 있다. 인간의 지식은 무한한 본질의 반영 또는 영상에 지나지 않는다.

말년

1806년 프랑스가 프로이센을 꺾고 승리하자 피히테는 베를린에서 쾨니히스베르크로, 다시 코펜하겐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그는 이 두 곳에서 잠시 동안 강연을 했다. 1807년 8월에 베를린으로 돌아왔다. 이때부터 출판된 저작들은 그의 실천적 성격을 지니게 되었다. 〈유작 Nachgelassene Werke〉·〈전집 Sämmtliche Werke〉 등이 발간되기 전까지는 이 마지막 사상의 모습이 알려지지 않았다. 1807년 그는 이미 제안되어 있던 베를린대학교 창설 계획을 작성했다. 1807~08년에는 베를린에서 〈독일 국민에게 고함 Reden an die deutsche Nation〉이라는 연설을 했다.

이 연설은 국권의 회복과 영광을 위하여 유일한 올바른 길에 관한 실천적 견해들로 가득 차 있다. 1810~12년 베를린대학교의 초대 총장이 되었다. 1813년 국가 독립을 위하여 독일이 고투하고 있는 동안 〈참된 전쟁 개념에 관하여 Über den Begriff des wahrhaften Krieges〉를 강의했다. 1814년초 피히테는 자발적으로 병원 간호사로 일하던 아내에게서 악성 발진티푸스에 전염되어 얼마 후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