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르켐

뒤르켐

다른 표기 언어 Émile Durkheim
요약 테이블
출생 1858. 4, 프랑스 아피날
사망 1917. 11. 15, 파리
국적 프랑스

요약 경험적 조사와 사회학 이론을 결합하여 야심적인 방법론을 발전시켰다. 뒤르켐의 영향으로 사회학이 프랑스에서 기초학문으로 발전하면서 법학, 경제학, 언어학, 민족학, 예술사 등의 학문 연구의 폭을 넓히고 변화를 가져왔다. 평범한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난 뒤르켐은 프랑스 최고 사범대학인 파리의 명문 에콜 노르말에 입학했다. 1887년 보르도대학교 강사가 되었으며, 그 뒤 교수가 되어 1902년까지 사회철학을 가르쳤다. 1896년 학술지 <사회학연보>를 창간해 독일어·영어·이탈리아어 서적에 관한 서평을 썼다. 뒤르켐은 사회학적인 방법의 규준을 과학적으로 엄밀하게 정식화한 저서 <사회학적 방법의 규준>을 통해 명성과 영향력을 얻었다. 19세기말에 일어난 드레퓌스 사건에 연루되어 프랑스 학술원 회원으로 뽑히지 못했다. 1916년 외아들이 발칸 전선 전투에서 전사한 충격으로 심장병이 심해져 1917년 사망했다.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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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요
  2. 어린시절과 교육
  3. 분석적 방법
  4. 드레퓌스 사건의 영향
  5. 죽음과 유산

개요

경험적 조사와 사회학 이론을 결합하여 야심적인 방법론을 발전시켰다.

프랑스 사회학의 기초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

어린시절과 교육

뒤르켐은 평범한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나 아버지처럼 랍비가 되기 위해 공부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며 자랐다.

20세가 되기도 전에 아버지의 죽음으로 힘겨운 책임을 지게 되고, 프랑스 동부지방과 독일 사이에 적대감이 높아져가는 상황 때문에 엄격한 성격의 청년으로 성장했다. 이미 10대 후반에 때로는 어려움과 슬픔이 쾌락이나 즐거움보다 정신발달에 도움이 된다고 확신하게 될 정도였다. 학교성적이 뛰어났기 때문에 프랑스 최고 사범대학인 파리의 명문 에콜 노르말 쉬페리외르 입학이 거의 확실했다. 리세 루이 르 그랑에서 에콜 노르말 입학 시험을 준비하는 동안, 라틴 구(區)에 있는 조프레 회관에서 하숙하면서 지방출신의 또다른 수재 장 조레스라는 젊은이를 알게 되었다.

훗날 프랑스 사회당 지도자가 된 조레스는 이때 뒤르켐과 마찬가지로 철학뿐만 아니라 프랑스 국민들의 도덕적·사회적 개혁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조레스보다 1년 뒤인 1879년 에콜 노르말의 까다로운 입학경쟁 시험에 합격했다. 이무렵 종교적인 믿음은 완전히 사라진 것이 확실하다. 사상은 철저히 세속화되어 있었으나 도덕적인 개혁에 강한 관심이 있었다. 제3공화국 시절의 많은 프랑스 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파멸적인 사회분열, 즉 '아노미'(anomie) 현상을 피하기 위한 수단으로써 과학, 특히 사회과학과 교육의 근본적인 개혁에 기대를 걸고 있었다.

뒤르켐의 정의에 따르면, 아노미란 행동규범이 아예 없거나 약해진 상황, 또는 갈등하는 상황을 가리킨다.

뒤르켐은 에콜 노르말의 지적인 분위기를 좋아했다. 형이상학적인 문제와 정치적인 문제에 관해 열정적으로 논쟁을 벌였는데, 미래의 지도자가 될 젊은이들이 갖게 마련인 공상적인 꿈으로 논쟁은 더욱 활기찼다. 그는 동료와 교수들로부터 인정을 받았으나 당시 프랑스 고등교육을 온통 채우고 있던 고상하고 과장된 말, 겉치레뿐인 세련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철학 교수들은 뒤르켐을 보편적인 문제만을 지나치게 좋아하고 오로지 과거를 예찬하는 사람으로 보았다.

틀에 박힌 형식적인 시험에 진력이 나 있던 중, 1882년 마지막 경쟁시험에 합격했으나 친구들이 기대한 만큼 좋은 성적은 얻지 못했다. 그뒤 지방 국립중등학교로 발령을 받아 1882~87년 상·생캉탱·트루아 중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쳤다. 1885~86년 연구차 독일로 갔으며, 이곳에서 실험심리학의 선구자 빌헬름 분트를 만나 깊은 인상을 받았다.

1887년 보르도대학교 강사가 되었으며, 그뒤 교수가 되어 1902년까지 사회철학을 가르쳤다.

분석적 방법

여러 외국어에 능통했기 때문에 1896년 자신이 창간한 학술지 〈사회학연보 L'Année Sociologique〉에 독일어·영어·이탈리아어 서적에 관한 서평을 썼다.

그러나 비(非)프랑스계 사회과학자들은 뒤르켐이 여행한 경험이 거의 없으며 영국의 유명한 인류학자 제임스 프레이저 경(卿)이나 다른 프랑스 학자들처럼 현지조사를 한 적이 전혀 없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의구심을 갖거나 때로는 놀라움을 표시하기도 했다. 뒤르켐이 오스트레일리아나 뉴기니에 사는 여러 부족들, 또는 에스키모를 연구할 때 사용한 폭넓은 정보는 모두 다른 인류학자나 여행가, 또는 선교사들이 모은 것이었다.

뒤르켐의 경우 이것은 편협함이나 구체적인 것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태도 때문이 아니었다.

프랑스 철학자 오귀스트 콩트와는 달리, 그는 무모하고 교조적인 일반화를 꾀하거나 경험적인 관찰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러나 세계 여러 곳의 오지(奧地)를 구체적으로 관찰한다고 해서 반드시 과거 또는 현재에 관해 더 확실한 견해를 갖게 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뒤르켐이 보기에 '사회적' 사실이란 여러 유형과 법칙으로 종합하지 않는 한 지식인에게는 아무런 쓸모가 없었다. 그가 거듭 주장한 바에 따르면, 사실을 바깥에서 관찰하는 것으로는 구체적인 현실에 대한 지식을 얻을 수 없고 바로 현실의 내적인 본질 위에 세운 구조물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는 마르크스가 계급 개념을 만들어낸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신성한 것, 또는 토테미즘과 같은 개념을 만들어냈다.

실제로 뒤르켐의 가장 중요한 관심은 이른바 원시 부족에 관한 연구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원시부족 연구를 통해 현재를 이해하는 데 있었다. 지식인으로서 또한 학자로서 뒤르켐이 인생에서 겪은 외적인 사건들은 평범하게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의 생각과 글 대부분은 1870~80년대, 청년기에 직접 목격한 사건들과 여기에 자신이 기울인 열성적인 관심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1870년 프랑스가 독일에 패함으로써 무너진 제2 제정시대가 열혈청년 뒤르켐에게는 경솔하고 방탕한 시기로 보인 듯하다(파리 코뮌). 프랑스는 많은 자유주의자들과 지식인들의 지지를 등에 업고 전혀 준비되어 있지 않을 전쟁에 무모하게 뛰어들었으나 지도자들의 무능만 드러났을 뿐이었다.

1871년 프랑스가 패배한 뒤 파리를 장악한 좌파 코뮌은 무분별한 파괴를 자행하기에 이르렀는데, 뒤르켐 세대가 이 사실을 돌이켜볼 때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계급이 소외된 증거로 비쳐졌다.

코뮌에 뒤이은 잔혹한 탄압은 자본주의의 무자비함과 겁먹은 부르주아지의 이기심을 또다시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뒤 독일에 대한 보복정책을 펴기 위해 중앙집권적인 정부를 요구하던 육군장관 조르주 블랑제로 말미암은 1886년의 위기는 민족주의의 부활을 보여주는 여러 사건들 가운데 하나였으며, 곧이어 반(反)유대주의가 나타났다.

에르네스트 르낭과 이폴리트 텐 같은 뒤르켐 윗세대의 주요 프랑스 사상가들은 1871년 이후 역사연구나 철학연구를 중단하고, 이러한 여러 가지 폐해를 분석하고 그에 대한 처방을 제시했다.

뒤르켐을 비롯하여 에콜 노르말을 갓 졸업한 몇몇 젊은 철학자들과 학자들은 진보가 과학기술 발전의 필연적인 결과는 아니며, 안일한 낙관주의를 정당화하는 상승곡선으로 나타낼 수 있는 것도 아니라고 믿게 되었다. 그는 주변에 아노미 현상이 널리 퍼져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물질의 번영은 사회 균형을 위협하는 탐욕과 욕구를 무제한으로 허용했다.

윤리철학에서 벗어난 적이 없는 뒤르켐의 이러한 사회학적인 사상은 중요한 박사학위 논문 〈사회분업론 De la division du travial social〉(1893)과 〈자살론 Le Suicide〉(1897)에 처음으로 나타났다(자살). 그의 견해에 따르면 윤리구조와 사회구조는 기술과 기계화의 출현으로 위협받고 있었다.

분업 때문에 노동자들은 서로 더욱 소외되는 동시에 더욱 더 의존하게 되었는데, 이제는 어느 누구도 더이상 생산물 전부를 혼자서 만들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개인은 자기가 속한 문화에 긴밀하게 통합되어 있을 때 자살하는 경우가 더 적은 것처럼 보였으며, 따라서 순전히 개인의 결단으로 생명을 버리는 것처럼 보이는 경우도 사회적인 힘을 통해 설명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드레퓌스 사건의 영향

뒤르켐은 초기 저서들과 함께 사회학적인 방법의 규준을 과학적으로 엄밀하게 정식화한 저서 〈사회학적 방법의 규준 Les Règles de la Méthode sociologique〉(1895)을 통해 명성과 영향력을 얻었다. 그러나 새로운 학문인 사회학의 출현에 소심한 자들과 보수적인 철학자들은 두려움을 갖게 되었으며, 뒤르켐은 많은 비난을 감수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19세기말에 일어난 드레퓌스 사건(독일을 위해 간첩활동을 한 혐의로 유대인 장교 알프레드 드레퓌스를 허위고발한 데서 비롯됨)과 이 사건을 계기로 떠도는 유대인에 대한 비방이나 노골적인 모욕을 보고 뒤르켐은 이제까지 잠재적인 증오와 격렬한 적의가 문명이라는 가식으로 반쯤 감추어져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드레퓌스의 무죄를 입증하기 위한 운동에 적극 참여한 탓으로 그의 사상가적 위치로 미루어볼 때 마땅히 명망 높은 프랑스 학술원에 이름이 올라야 했으나 회원으로 뽑히지 못했다. 그러나 1902년부터 파리대학교에서 강의를 시작하여 1906년 정교수가 되었다.

뒤르켐은 인간성을 개조하거나 철저한 사회구조 변화에 필요한 새로운 제도를 만들어낼 수 있는 가장 강력한 2가지 수단으로서의 교육과 종교에 점점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동료들은 교육개혁을 위한 그의 열정에 탄복했다. 그의 노력은 새로운 교과과정과 방법을 마련하기 위해 수많은 위원회에 참여하는 것, 너무 오래 보편적인 문제만을 다루어온 철학교육을 활성화하는 것, 교사들에게 교육방법을 가르치려는 활동 등으로 나타났다.

보르도대학교에서 가진 일련의 강좌내용이 뒤르켐이 죽은 뒤인 1938년 〈프랑스 교육학의 발전 L'Évolution pédagogique en France〉으로 출판되었는데, 이 저서는 지금도 프랑스 교육에 관한 가장 정통하고 공정한 저서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말년에 출판된 또다른 주요저서로 오스트레일리아의 토템 체계를 다룬 〈종교생활의 기본형태 Les Formes élémentaires de la vie religieuse〉(1915)가 있다. 뒤르켐은 불가지론자였으나 모든 단계의 종교에 공감을 나타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 소르본대학교가 독일 학풍의 위세에 부당하게 좌우되고 있다고 비난하던 프랑스 보수파는 뒤르켐에게 호된 비난을 퍼부었는데, 이들은 뭐든지 체계화하려는 독일인들의 욕구에 영향을 받아 뒤르켐이 사회를 숭배대상으로, 사회학을 종교로 만들어버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사실 뒤르켐은 콩트의 가르침을 받은 실증주의자들처럼 사회학을 숭배하지도 않았고, 사회유기체의 유지와 균형에 대한 유용성만으로 모든 사회현상을 설명하는 '기능주의자'도 아니었다.

다만 사람들이 더욱 확고하게 결속할 수 있도록 그들의 행동을 통제할 수 있는 실증적 사회과학의 체계화를 위해 애썼다.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은 뒤르켐에게 혹독한 타격이었다. 여러 해 동안 가르치고, 글을 쓰고, 개혁안을 구상하고, 끊임없이 제자들에게 열정을 불어넣었으나 그때문에 결국 심장병을 얻고 만 것이다. 여위고 초조한 모습 때문에 동료들은 불길한 예감을 갖게 되었다. 그들은 당시 뒤르켐 덕분에 전성기에 이른 프랑스 사회학 전체가 그의 책임인 것처럼 생각했다.

죽음과 유산

뒤르켐이 극한상황에 이르게 된 것은 1916년 외아들이 발칸 전선 전투에서 전사했을 때였다.

그는 슬픔을 억누르려고 필사적으로 애썼다. 그러나 아들의 죽음에 겹쳐, 국수주의자들로부터 소르본에서 '외국'학문을 가르치는 '독일 태생임에 분명한' 교수라는 모욕을 당하자 더이상 견딜 힘이 없었다. 그는 결국 1917년 11월에 사망했다.

뒤르켐은 훌륭한 학자들을 유산으로 남겼다. 그는 결코 제자들에게 전제적으로 군림한 적이 없었으며 언제나 제자들에게 자기를 앞서가도록 그리고 필요하다면 반대의견을 갖도록 격려했다. 콜레주 드 프랑스 사회학 교수인 조카 마르셀 모스는 뒤르켐보다 체계적이지는 못했으나, 무의식적인 정신활동으로서 상징주의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그리고 같은 사회학 교수로서 냉철한 논증과 격정적인 감정을 결합하는 방식에서 뒤르켐과 비슷한 클로드 레비 스트로스는 뒤르켐의 견해에 반대하면서 수정방안을 제시했다. 뒤르켐에 힘입어 사회학은 프랑스에서 기초학문으로 발전해 법학, 경제학, 중국제도 연구, 언어학, 민족학, 예술사, 역사 연구의 폭을 넓히고 변화를 가져왔다.

뒤르켐(Émile Durkheim)의 무덤
뒤르켐(Émile Durkheim)의 무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