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스 베버

막스 베버

다른 표기 언어 Max Weber
요약 테이블
출생 1864. 4. 21, 프로이센 에어푸르트
사망 1920. 6. 14, 뮌헨
국적 독일

요약 독일의 사회학자. 사회학 성립에 큰 영향을 끼쳤으며 마르크스의 경제결정론을 비판하고 이를 극복하고자 했다. 국회의원 아들로 태어나 독일 4개 대학에서 철학·역사학·경제학을 공부한 그는 졸업 후 재판소의 사법관시보로 근무했으며, 1892년 여러 대학에서 강의를 했다. 신경쇠약으로 인해 투병한 후 <사회과학적 및 사회정책적 인식의 객관성>,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등의 논물을 집필했다. 제1차 세계대전 후 정치활동을 시작해 독일 민주당에 들어가 계몽활동을 전개하다가 1920년 폐렴으로 인해 사망했다.

목차

접기
  1. 개요
  2. 젊은시절과 가족관계
  3. 초기 학문생활
  4. 프라이부르크대학교 취임강연
  5. 후기업적
  6. 베버에 대한 평가
막스 베버 (Max Weber)
막스 베버 (Max Weber)

개요

막스 베버는 프로테스탄티즘자본주의와 관련지어 규명한 '프로테스탄티즘 윤리'라는 주제와 관료제에 대한 사상으로 유명하다. 학문에서 객관성을 유지해야 한다는 주장과 함께 동기(動機)의 측면에서 인간의 행동을 분석함으로써 사회학 이론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젊은시절과 가족관계

막스 베버는 에어푸르트에서 한 야심만만한 자유주의 정치가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독일 리넨 산업으로 부자가 된 가문 출신이었다. 아버지는 곧 체제순응적으로 변하여 친(親)비스마르크적인 '국민자유당'에 참여하게 되었으며, 베를린에서 프로이센 의회 의원(1868~97)과 제국의회 의원(1872~84)을 지냈다. 이처럼 베를린 사회의 일원이 된 아버지는 뛰어난 학자들과 정치가들을 집으로 초대해서 환대했다.

막스 베버의 어머니 헬레네 베버는 칼뱅주의 전통 속에서 성장했다. 후에는 종교적인 엄격함이 덜해졌으나,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청교도적인 윤리는 그녀의 정신 속에 온전히 남아 있었다. 남편의 사회활동으로 점점 남편에게 소외감을 느끼게 된 데다, 자녀 중 2명이 죽고 어린 막스 베버마저 심한 병을 앓고 난 뒤, 계속되는 슬픔을 함께 나눌 줄 모르는 남편한테 실망하게 되었다. 그러나 남편은 전통에 따라 집안에서 권위주의적인 태도를 취하거나 아내와 자녀들한테 절대적인 복종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았다.

막스 베버는 1882년 집을 떠나 하이델베르크대학교에 입학했으나, 2년 뒤 스트라스부르에서 군복무를 위해 학업을 중단했다. 군대에 복무하는 동안 이모인 이다 바움가르텐과 그녀의 남편 헤르만 바움가르텐과 가까이 지내게 되었다. 역사가인 헤르만은 막스 베버의 지적인 성장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제대 후 아버지는 집에서 다닐 수 있는 베를린대학교에서 학업을 마치도록 권했다. 그 이유는 바움가르텐 부부가 아들의 성격에 나쁜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1885년 괴팅겐에서 한 학기 공부한 것과 예비군 훈련을 몇 차례 받은 것을 제외하고는 1884년부터 1893년 결혼할 때까지 베버는 아버지 집을 떠난 적이 없었다.

초기 학문생활

막스 베버는 법률과 경제사를 공부하는 동안 거의 내내 복종을 강요하는 부모와 끊임없이 충돌해야 했다. 20대 중반과 후반 전혀 수입이 없는 사법관 시보와 대학 조교 생활을 했기 때문에 1893년 집을 떠날 때까지도 재정적으로 독립할 능력을 갖지 못했다.

그해 가을 베를린대학교 임시 법학강사로 채용되었으며, 육촌 마리안네 슈니트거와 결혼했다. 막스 베버는 결혼 뒤에도 의무적인 노동을 계속했다. 베버는 1884년 베를린으로 돌아온 후 의무적으로 노동을 행하게 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자기도 모르게 선조들의 칼뱅주의 전통에 경외심을 갖게 되었다.

막스 베버의 생각에는, 스스로에 대한 노동의 강제를 통해서만 자기가 천성적으로 타고난 방종과 게으름에 빠지는 것을 미리 막을 수 있었다. 방종과 게으름에 빠지면 결국 정서적·정신적으로 위기를 겪게 마련이었다.

더할 나위 없는 명석함과 엄격하게 통제된 지적인 노력으로 막스 베버는 매우 빠르게 승진할 수 있었다. 베를린대학교 임시 강사가 된 지 겨우 1년 만에 프라이부르크대학교 정교수가 되었으며, 다음해인 1896년 하이델베르크대학교 정교수가 되었다. 고대 로마 농업사와 중세 상업발달에 관한 박사학위 논문과 그 이후의 논문에 이어, 독일에서 가장 중요한 학술단체인 사회정책협회(1890)를 위해 독일 동부 토지문제를 종합적으로 분석한 논문을 발표했으며, 고대 로마를 쇠퇴하게 한 사회적 배경과 독일 증권거래소에 관한 여러 편의 중요한 논문을 발표했다.

또한 이무렵 좌익 진보단체 프로테스탄트 사회연합(Evangelisch-Soziale Verein)과 함께 정치활동을 하기도 했다.

프라이부르크대학교 취임강연

초기 학문생활의 절정은 1895년 프라이부르크대학교에서 가진 취임강연이었다. 강연을 통해 막스 베버는 독일 동부 엘베 강 지역 토지문제에 관한 약 5년 동안에 걸친 연구를 종합하면서 지배계급인 융커를 역사적으로 쓸모없는 계급으로 규정하며 통렬하게 규탄했다.

베버의 견해에 따르면 기존의 자유주의 정당들은 융커 계급에 도전하고 그들을 대신할 만한 처지에 있지 못했다. 노동계급 역시 권력을 잡고 여러 가지 책임을 질 만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전국민이 제국주의적 영토 확장을 위한 의식적인 정책을 통해 정치적으로 성숙할 때만이, 대혁명시대와 나폴레옹 시대의 프랑스인들, 또는 제국주의적 팽창과정에 있던 19세기 영국인들이 이룩한 정치적인 수준에까지 독일을 끌어올릴 수 있다고 베버는 생각했다.

프라이부르크 강연을 통해 드러난 '자유주의적 제국주의'는 프리드리히 나우만과 한스 델브뤼크와 같은 주요 자유주의 정치평론가들의 지지를 받았다. 1897년 8월 아버지가 죽은 뒤 몇 달 동안 막스 베버는 점점 악화되는 신경과민증상으로 고통을 겪었다. 그해 가을 다시 강의를 시작하면서 잠시 증세가 멈추었으나 1898년초 신경쇠약의 첫번째 증세가 나타나자 다시 병세가 악화되었다.

1898년 중반에서 1903년까지 신경쇠약으로 완전히 쓰러질 지경이 되었다. 5년 동안 때때로 입원을 하기도 했으며 천천히 회복해가다가 갑자기 재발하기를 거듭했다. 여행을 통해 이러한 악순환에서 벗어나려고 애썼으나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후기업적

1903년 연구를 다시 시작할 수 있었으나 교수직으로 다시 돌아간 것은 제1차 세계대전 후였다. 병이 가장 심한 무렵 하이델베르크대학교 교수직을 사임했으나 1907년에 받은 유산상속으로 경제적으로는 안정적이었다.

어느 정도 회복한 뒤 발표한 가장 중요한 저서의 내용을 보면, 오랜 고통을 통해 막스 베버가 칼뱅주의 윤리와 의무적 노동의 관계와 여러 가지 종교윤리와 사회경제과정의 관계, 지속적인 중요성을 지닌 다른 여러 가지 문제들에 관한 뛰어난 통찰력을 갖게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실제로 가장 중요한 저서는 모두 베버의 병이 가장 악화되었을 때부터 죽을 때까지의 17년 동안 쓴 것이다.

가장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킨 막스 베버의 역작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Die protestantis-che Ethik und der Geist des Kapitalismus〉(1904~05)을 잠깐만 훑어보아도 베버 사상의 일반적인 흐름을 알 수 있다.

막스 베버가 주목한 것은 독일의 경우 자본주의 기업의 이해 및 성공과 프로테스탄트적인 배경 사이에 통계학적인 상호관련이 있다는 점이었다. 나아가서 이러한 상호관련을 청교도 신학의 예정설(豫定說)과 소명(召命)이라는 개념의 우연한 심리적인 결과로 보았다. 예정설과 소명은 칼뱅과 그 제자들이 가장 엄격한 논리로 추론해낸 개념이었다. 칼뱅이 체계를 세운 예정설에 따르면 하느님은 전지전능하며, 죄많은 인간은 하느님이 어떤 이유로 구원의 은총을 베푸는지, 또한 어떤 사람에게 베푸는지 알 수 없었다(칼뱅주의). 이 예정설로 인해 생기는 심리적인 불안이 너무 컸기 때문에 지옥의 형벌을 굳게 믿는 칼뱅의 제자들은 신의 뜻하는 방향을 알려주는 출구를 찾기 시작했다.

그 결과가 세속적인 소명(조금만 어겨도 은총을 받지 못하게 되는)에 대한 끊임없는 헌신과 그러한 노력을 통해 거둔 이윤을 낭비하지 않는 금욕적인 절제라는 윤리였다. 막스 베버에 따르면, 그러한 믿음과 실천의 실제적인 결과로 자본이 아주 빠르게 축적될 수 있었다. 베버는 칼뱅 이전 시대에 상당히 발달한 자본주의 기업이 있었다는 비판자들의 주장을 결코 부정하지 않았다. 자본주의 발달을 위한 다른 여러 가지 전제조건, 예컨대 물질적·심리적 조건들도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자신에 대한 비판에 대해 베버는 칼뱅주의 이전에 자본주의 기업은 언제나 지배적인 종교질서의 소극적 또는 적극적인 적대감에 얽매여 있었다고 주장했다.

일부 자본가들은 무신론자여서 전통적인 도덕이 강요하는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칼뱅주의 이전에는 사람들이 종교적인 확신으로 자본축적의 성공을 하느님의 영원한 은총의 증거로 여기지 않았다. 막스 베버의 주장에 따르면, 청교도들은 다른 방법으로는 견디기 어려운 정신적인 부담을 덜기 위해서 세속적인 금욕주의라는 가면을 자진해서 받아들였다. 그러나 이들이 금욕주의를 받아들임으로써 거대한 현대 경제생활구조가 자연히 그 안에서 태어나는 모든 사람의 생활과 가치를 결정하게 되었다. 이처럼 "가면이 철창으로 변한 것은 숙명이었다."

막스 베버는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을 얼마 전 자신이 편집을 맡기 시작한 〈사회과학 및 사회정책 Archiv für Sozialwissenschaft und Sozialpolitik〉을 통해 발표했다. 1905~10년에 베버는 자신과 비판자들 사이의 수많은 논쟁을 이 잡지를 통해 발표했다.

그러나 유럽 여행을 떠나지 않고 하이델베르크에서 지내던 이 시기에 막스 베버가 자라난 독일 중산계급 문화는 붕괴를 향한 최초의 몸부림을 겪고 있었다. 베버가 피할 수 없는 운명으로 받아들였던 프로테스탄티즘 윤리는 청년운동, 시인 스테판 게오르게가 이끌던 서클과 같은 전위문학 서클, 니체와 프로이트의 영향을 받은 신(新)낭만주의자들,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를 모범으로 한 슬라브적인 문화이념으로부터 공격받게 되었다.

정치사회학면에서 막스 베버는 카리스마적 권위, 전통적 권위, 합법적 권위 등 권위를 여러 형태로 구분하는 데 관심을 두었다.

카리스마란 종교적인 예언능력과 정치적인 지도력의 바탕을 이루는 정신적인 감화력을 말한다. 막스 베버는 후기에 권위 형태에 관한 관심을 통해 니체가 처음으로 제기한 주제들을 공공연하게 다루었다. 현대 세계 및 그 바탕이 되는 합리화 과정과 대조되는 신비주의와 같은 현상에 깊은 관심을 가지면서 베버는 자신이 미학적인 재능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막스 베버는 1910년 유럽 중산계급사회의 사회질서가 무너져가는 가운데 스테판 게오르게와 그의 제자인 시인 프리드리히 군돌프와 일련의 논쟁을 시작했다. 또 이 시기에 아내가 아닌 다른 여성과 처음으로 외도에 빠졌다. 가장 명쾌한 후기 논문 가운데는 성애(性愛)와 금욕적이고 신비주의적인 여러 형태의 종교, 그리고 일반적인 합리화 과정 사이의 갈등관계를 날카롭게 분석한 논문 〈종교의 세속 거부와 그 방향 Theorie der Stufen und Richtungen religioser Weltablehnung〉이 있다. 같은 시기에 베버는 가치중립적인 사회학 방법론을 명확히 규정함으로써 사회학이 하나의 학문으로 자리잡을 수 있도록 노력했으며, 서구의 종교 전통과 비교하기 위해 인도와 중국의 종교 문화를 분석하는 일에 몰두했다.

또한 논문 〈경제와 사회 Wirtschaft und Gesellschaft〉(1922)와 잡지 기사를 통해 정치경제생활의 합리화를 위한 조건과 합리화에 따른 결과를 엄격하게 검토한 것도 마지막 10년 동안에 거둔 중요한 업적이다. 실제로 막스 베버가 같은 시대 사람들에게 가장 강력한 영향을 미치게 된 것은 1916~18년 생애의 마지막 몇 년 동안이었다. 베버는 이 시기에 독일 정부의 영토병합론적인 전쟁 목표에 강력하게 반대하면서 의회 강화를 지지했다.

또 독일이 패배한 뒤 몇 달 동안 우익 학생들의 종말론적인 분위기에 맞서 정계와 학계가 냉정을 잃지 않도록 애썼다. 막스 베버는 새 헌법초안 마련과 독일민주당 창설을 도운 뒤 1920년 6월 폐렴으로 죽었다.

베버에 대한 평가

베버는 생전에 독일 사회과학자들 사이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이들은 대부분 하이델베르크대학교나 베를린대학교 시절의 친구들이었다. 그러나 생전에는 연구결과를 책 형태로 출판한 것이 거의 없었고, 그가 발행한 잡지들이 대부분 전문 학자들을 독자로 했기 때문에 죽은 다음에야 비로소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유일한 예외는 1895년의 '자유주의적 제국주의'라는 정식과 폭넓은 논의가 이루어진 프로테스탄티즘과 자본주의에 관한 명제, 제1차 세계대전중 〈프랑크푸르터 차이퉁 Frankfurter Zeitung〉지를 통한 독일 대내외정책에 대한 광범위한 공격이었다. 베버가 이 신문을 통해 자유주의적 여론을 자극하여 정부의 전쟁 목표에 반대하게 하자, 에리히 루덴도르프 장군 같은 사람은 베버를 배반자로 여기게 되었다.

사상가로서 베버의 위대한 공적은 그때까지 주로 국내 문제에만 몰두하던 독일 사회과학이 비판적인 안목을 가지고 19세기 유럽의 두 위대한 사상가, 즉 마르크스와 니체의 사상에 직접 접근하도록 한 것과 이러한 접근을 통해 종교사회학, 정당의 사회학, 소집단행동, 역사철학 등의 방법론과 체계적인 문헌을 만들어내는 데 기여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도 베버의 저작은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