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칼뱅

장 칼뱅

다른 표기 언어 Jean Calv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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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509. 7. 10, 프랑스 피카르디 노와용
사망 1564. 5. 27, 제네바
국적 프랑스

요약 프랑스의 신학자·교회행정가. (영). John Calvin. Calvin은 Cauvin이라고도 씀.

목차

접기
  1. 칼뱅의 초기생애
  2. 칼뱅의 프로테스탄트로의 개종
  3. 칼뱅의 제네바 개혁 참여
  4. 칼뱅의 제네바로의 개선
  5. 칼뱅의 교회개혁
  6. 칼뱅의 신학 논쟁과 개혁파 프로테스탄트의 확장
  7. 칼뱅에 대한 평가
장 칼뱅(Jean Calvin)
장 칼뱅(Jean Calvin)

16세기의 가장 중요한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가이다. 장 칼뱅이 여러 저술에서 전개한 신학·교회·정치 사상, 제네바 시에 세운 모델 교회, 여러 나라의 정치적·지적 지도자들에게 베푼 적극적인 지원은 유럽과 북아메리카 여러 지역에서 프로테스탄트가 발전하는 데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

칼뱅주의는 첫째, 장 칼뱅의 신학을 이루고 있는 상호보완적인 교리들의 정교한 균형을 가리킨다. 둘째, 칼뱅의 추종자들이나 추종자로 자처하는 사람들(그들이 그렇게 자처한 것은 방어적인 의도를 가졌지만 항상 그런 것은 아니었음)이 사변적·경건주의적인 노선에 따라 선택한 교리의 발전내용을 가리킨다. 셋째, 칼뱅과 그 추종자들의 저술이나 16세기 제네바 칼뱅주의 교회 예배의식에서 비롯된 신학사상과 예배양식·교회조직·도덕훈련이 여러 나라에서 발전하여 이루어진 내용들을 가리킨다.

이 교리와 예배의식은 대륙에서 발전한 개혁교회와 영어권에서 발전한 장로교회의 기준이 되었다.

칼뱅의 초기생애

칼뱅은 제라르 코뱅과 성공한 여인숙 주인의 딸인 잔 레프랑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제라르는 마을의 부르주아로, 주교 비서와 대성당 참사회 소송 대리인 등 교회기관에서 일했다.

칼뱅은 현직 주교와 인척관계인 드 앙제스트 가문의 귀족 자제들과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그는 장차 교회에서 일하게 되어 어린 소년인 그에게는 교육비로 쓸 수 있도록 2가지 성직록이 할당되었다. 1523년 초급과정을 마친 뒤 앙주 가문의 소년들과 파리로 가서 콜레주 드 라 마르슈, 콜레주 드 몬테귀에서 교양과목을 공부했다. 많은 것을 요구하는 엄격한 콜레주 드 몬테귀에서 후에 유명한 네덜란드 인문주의자가 된 에라스무스, 프랑스 작가가 된 라블레, 예수회를 세운 로욜라의 이그나티우스 등과 동문수학했다.

문학석사를 받은 뒤 아버지 제라르는 칼뱅을 오를레앙대학교에 보내 개혁적인 법학자인 피에르 드 레스투알 문하에서 법학을 더 공부하게 했다. 그는 짧은 기간 동안 부르주로 가서 유명한 이탈리아 법학자 안드레아 알치아토(알치아티)의 강의를 듣기도 했다. 1531년 아버지가 죽자 파리로 돌아가서 얼마 전에 법학강사로 임명된 몇몇 위대한 인문주의자들, 특히 기욤 뷔데와 함께 연구했다.

칼뱅이 2번째로 파리에 체류하며 집필한 책은 스토아 철학자 세네카의 〈관용론 De clementia〉에 대한 해박한 연구서였다. 이 연구서는 1532년에 출판되었는데, 이 작품은 세네카가 네로 황제에게 바친 〈관용론〉의 본문을 주의깊게 재구성한 뒤 박학한 지식에 근거하여 방대한 주석을 쓴 것이었다. 이 책을 읽으면 칼뱅이 에라스무스와 뷔데의 모범을 따르는 인문주의자이며, 라틴어로 품위 있고 설득력 있는 글을 썼음을 알 수 있다. 이 책을 쓸 당시 그는 그리스어를 읽고 쓰기 시작했으며, 고대 문헌과 고대사에 대해 폭넓고도 정확한 지식을 갖고 있었다.

또한 수사학적인 분석에 커다란 흥미를 갖고 있었고, 당시의 중요한 논쟁에서 수사학자들 편에 서서 변증론자들에게 대항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수사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어떤 명제의 진리를 보여주는 중요한 시금석은 명제의 명료성과 설득력이라고 믿었고, 명제의 진리는 그 명제가 일관성 있는 논리적 체계에 얼마나 잘 부응하는가에 따라 검증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변증론자들의 신념을 거부했던 것 같다.

이러한 수사학적 기술과 태도는 칼뱅이 뒤에 종교개혁자로서 활동을 벌일 때 중요한 영향을 미쳤고, 루터의 제자인 필리프 멜란히톤, 제네바에서 칼뱅의 후계자가 된 테오도르 베즈 등 활동적인 프로테스탄트 인문주의자들과 친교를 맺을 수 있게 했다.

칼뱅의 프로테스탄트로의 개종

장 칼뱅(John Calvin)
장 칼뱅(John Calvin)

〈관용론〉에 대한 연구서가 출판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칼뱅은 프로테스탄트로 개종했다. 훗날 그는 개종이 갑작스럽게 이루어졌기 때문에 언제 어디서 어떻게 개종했는지 덧붙여 말할 것이 없다고 술회했다. 칼뱅의 개종은 프랑스의 자크 르페브르 데타플이 이끌었던 종교개혁자들의 모임에 속한 동료 인문주의자들에게 영향을 받았던 것 같다.

그들은 정부가 종교 분파들에 대해 점차 더 심한 박해를 가하는 것을 보고 실망했다. 그들은 대부분 가톨릭교도들로 남았으나 일부는 프로테스탄트가 되었다. 이 문제를 놓고 대학 교수진이 분열되고 왕실이 프로테스탄트 집단의 추방을 결정하자 칼뱅은 성직록을 포기하고(1534) 프랑스 각지를 여행했으며, 그뒤 프로테스탄트의 중심지였던 스위스 바젤에 정착해 마르티아누스 루카니우스라는 가명을 사용하며 살았다. 그곳에서 그는 집중적으로 신학연구에 몰두했다.

그는 주로 성서에 관심을 쏟았으나, 초기 교부들의 저서와 마르틴 루터, 마르틴 부처 등 당시의 프로테스탄트 신학자들의 저서도 연구했다. 그는 중세기의 2가지 기본 교과서였던 페트루스 롬바르두스의 〈신학명제집 Sentences〉과 그라티아누스의 〈교령집 Decretum〉으로부터 가톨릭 신학에 대한 대부분의 지식을 얻었다. 이 연구 끝에 칼뱅은 주요저서 〈그리스도교 강요 Institutio christianae religionis〉를 썼다.

1536년에 출판된 이 책의 첫 형태는 라틴어로 씌어진 확대된 교리문답서였다. 이 책은 전통적인 체재에 따라 구성되었으며, 프로테스탄트의 주요교리들을 간결하게 요약했다. 또한 칼뱅이 거짓된 것으로 간주했던 성사(성례전)들을 공격하는 보완 논문들과 교회조직에 대한 단상들이 담겨 있다. 이 책으로 칼뱅은 프로테스탄트의 권위 있는 대변자라는 명성을 얻었다. 그는 판을 거듭하면서 이 책을 개정·번역하고 그 내용을 확대했다. 라틴어 최종판은 1559년, 프랑스어 판은 1560년에 출판되었다.

〈그리스도교 강요〉는 포괄적이고 체계적인 교의신학 교과서였으며, 종교개혁 기간에 씌어진 것 가운데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책이었다. 나중에 출판된 이 책의 여러 판들에서 칼뱅은 급진적인 재세례파 사상가들(예를 들면 메노 시몬스)과 신령파 사상가들(예를 들면 카스파르 슈벵크펠트)이 주장한 견해뿐만 아니라 여러 루터파 신학자들의 가르침에서 비롯된 많은 쟁점에 대해 명확한 입장을 표명했다.

칼뱅은 〈그리스도교 강요〉가 출판되기 직전에 바젤을 떠나 이탈리아로 갔다. 그곳에서 그는 프랑스 왕의 딸이자 그당시 페라라 공작 부인이던 르네 드 프랑스를 방문했다. 그녀는 프로테스탄트에 공감하여 많은 프로테스탄트 망명자들을 자신의 궁정에 피신시켰다.

칼뱅은 개인적으로 여러 유력한 귀족들에게 종교개혁에 대한 물질적 지원을 요청했는데, 르네는 칼뱅에게 도움을 베푼 첫 귀족이었다. 상층 귀족이 군사력과 부를 대부분 독점하고 있었던 사회에서 그들의 물질적 후원을 받는 것은 개혁의 성공에 필요불가결했다. 칼뱅은 후원자를 찾는 데 정치적 명민성을 보여주었으며, 이 능력은 해가 갈수록 커졌다. 그러나 그는 다시 바젤로 돌아갔고 그후에는 프랑스로 갔다. 그리고 1536년 가을 스트라스부르로 가던 중 마침내 제네바에 정착했다.

칼뱅의 제네바 개혁 참여

칼뱅이 제네바에 정착하게 된 것은 숙명적이었다.

제네바 도시국가는 칼뱅이 도착하기 얼마 전에 프로테스탄트로 돌아섰다. 제네바 도시국가는 도시에 대한 세속적 통치권과 종교적 통치권을 장악하고 있던 제후주교를 인정하지 않았고, 제후주교를 대표해 제네바를 다스리던 대성당 참사회원들과 다른 관리들을 추방했다. 지역 부르주아들 가운데 선출된 평의회는 과거에는 도시의 내부문제만을 관장했으나 이제는 전권을 장악했다. 주교는 지난 수세기 동안 제네바 주교들이 동맹을 맺고 있던 강력한 이웃 사보이 공작령에 호소하여 권력을 되찾으려 했다.

한편 도시 평의회는 강력한 이웃 베른 공화국에 호소해 독립을 유지하려고 했다. 베른 공화국은 16세기 유럽에서 가장 훌륭한 전사들로 활동했던 스위스 용병단의 기지였다. 1528년 베른은 울리히 츠빙글리가 설교한 프로테스탄티즘을 받아들였으며, 이에 고무된 이웃 도시들도 베른의 선례를 따랐다. 열렬한 설교자들, 특히 르페브르의 제자 기욤 파렐과 피에르 비레는 제네바 주민을 선동해 여러 형태의 반가톨릭 시위를 일으켰으며, 이 시위는 우상 파괴 폭동에서 절정에 달했다. 마침내 제네바는 주교를 물러나게 하고 프로테스탄트로 돌아섰다.

제네바 정부는 복음을 가르칠 것을 선언하고 로마 가톨릭 성사 거행을 금지하고, 이에 불응하는 모든 사제들과 수도회 회원들을 추방했다. 그러나 칼뱅이 도착했을 때 혁명은 공고한 기반을 구축하지 못한 상태였다. 프로테스탄트 의식들이 정립되어 있지 않았고, 새로운 교회 제도도 수립되지 않았으며, 교육 등 16세기 지역사회들이 교회에 기대했던 보완적인 사회봉사도 시행되고 있지 않았다. 이같은 실제적인 문제를 다루어 본 경험이 없던 칼뱅은 상당 기간 공백기에 빠져들었다.

그는 제네바에 정착할 마음이 없었으나, 파렐은 칼뱅에게 그의 재능을 크게 필요로 하는 곳에서 그 재능을 사용하지 않는다면 하느님의 벌을 받을 것이라고 위협하는 등 극적인 담판을 통해 칼뱅을 설득하여 제네바에 정착하게 했다.

칼뱅은 대중에게 성서를 가르치는 강사로서 제네바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그의 임무는 교육받은 시민들에게 그들이 목격한 당대의 중요한 변화들이 정당함을 입증해주는 것이었다. 제네바 시민들을 개혁 신앙으로 교육시키기 위해 그는 〈신앙 교육 Instruction in Faith〉(1537)을 썼다.

오래지 않아 그는 설교 요청을 받았으며, 자신의 문필가적 기량과 법학 지식을 활용하여 파렐과 함께 일련의 예배 및 훈련 지침을 마련했다. 그러나 제네바 시민들은 이 지침에 대해 관심이 거의 없었다. 칼뱅과 파렐이 이 지침을 도입한 것은 한 형태의 성직자주의를 다른 형태의 성직자주의로 바꾸려 한다는 우려를 불러일으켰다. 문제는 중세기 이래 제네바 시의 법전에 수록되어 있던 도덕규정들을 목록화한 데 있다기보다는 이 규정들을 강요할지도 모른다는 제네바 시민들의 두려움에 있었다. 1538년 갑작스런 논쟁에 휘말린 파렐과 칼뱅은 새로 선출된 도시 평의회의 압력을 받아 3일 안에 도시를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파렐은 뇌샤텔로 옮겨가 그곳에서 여생을 보내며 그 도시의 개혁을 주도했다. 칼뱅은 한동안 망설인 끝에 스트라스부르로 가서 그곳에서 3년 동안 프랑스 망명자들의 교회를 담임했다.

신성 로마 제국의 도시이던 스트라스부르의 종교기관을 이끌었던 사람은 자유주의적인 루터파 지도자 마르틴 부처였다. 칼뱅은 이곳에서 매우 중요한 몇 가지 실무 경험을 얻었다. 그는 회중을 위해 프랑스어로 프로테스탄트 전례서를 작성했고, 교구를 관장하는 데 필요한 일련의 법령을 개발했으며, 프로테스탄트와 가톨릭교도를 화해시켜 그리스도교를 다시 통합하려는 목적으로 개최된 범독일 최고회의에 참석하도록 초대를 받았다.

그는 이 목적을 위해 프랑크푸르트·하게나우·보름스·레겐스부르크(라티스본)에서 열린 여러 종교회의(1539~41)에 참석했다. 이때 그는 탁월한 루터파 신학자들, 특히 이들 회의에 프로테스탄트측 수석협상자로 활동했던 필리프 멜란히톤을 개인적으로 알게 되었으며, 레겐스부르크에서 가톨릭 사절을 이끌었던 가스파로 콘타리니 같은 평화지향적인 가톨릭 신학자들을 관찰할 기회를 가졌다.

그러나 이 회의들이 실패로 끝나자 칼뱅은 개혁과 재통일을 위한 가톨릭교도들과의 협상이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이 기간에 그는 성서에 관한 책들(예를 들면 〈로마서 강해 Commentary on Romans〉)과 신학 저작들(예를 들면 〈성만찬에 관한 소논문 Short Treatise on the Lord's Supper〉)을 출판했다. 또한 1540년에 그는 자신이 재세례파로부터 개종시킨 한 신도의 미망인 이들레트 드 뷔르와 결혼했다.

칼뱅의 제네바로의 개선

칼뱅이 제네바를 떠나 스트라스부르로 간 이후, 제네바는 큰 혼란에 빠져 있었다.

파렐과 칼뱅의 후임자인 프로테스탄트 목회자들은 시민들의 존경을 받지 못했고 제네바를 로마 교회로 복귀시키려는 압력도 거세졌다. 이 압력은 주로 이웃 사보이 공작령과 그당시 남부 프랑스 카르펜트라의 주교였던 추기경 자코포 사돌레토 등 가톨릭 지식인들로부터 가해졌다. 이같은 압력에 직면하자 일부 제네바 시민들은 스트라스부르의 칼뱅에게 호소했다. 그는 〈사돌레토에 대한 응답 Reply to Sadoleto〉을 준비했다. 이 글은 칼뱅의 신학적 입장을 가장 잘 요약한 것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마침내 대부분의 제네바 지식인들은 칼뱅의 지도력 없이는 프로테스탄트가 유지될 수 없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오랜 협상 끝에 칼뱅은 자신이 원하는 프로테스탄트 체제를 세울 수 있는 상당한 자유를 약속받고 제네바로 돌아가는 데 합의했다. 1541년 하반기에 칼뱅은 제네바로 개선했다. 그와 그의 부인은 멋진 포도주 저장창고가 딸린 훌륭한 참사회원 관저를 배정받았으며 상당금액의 월급도 지급받았다.

제네바로 돌아온 뒤 제네바 개혁교회를 세우기 위해 칼뱅이 취한 첫 조치는 교회 법령집의 초안을 작성하는 것이었다.

이 법령집은 약간의 수정을 거친 뒤 시(市) 평의회에 의해 채택되었으며 1561년에는 칼뱅이 이를 재작성하고, 시 평의회가 이를 다시 채택했다. 이 법령집은 별로 수정되지 않은 채 오늘에 이르기까지 제네바 교회 헌법으로 사용되어왔으며, 여러 지역사회에 세워진 개혁교회의 모델이 되었다. 이 법령은 제네바 교회를 위해 4가지 교직을 제정했는데 가르치는 박사, 설교하는 목사, 훈련하는 장로, 자선을 관장하는 집사로 구성된다.

박사들은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위해 성서를 원어인 그리스어와 히브리어로 연구하고, 당대 철학과 신학에서 가장 훌륭한 자료들을 활용해 하느님의 진실된 의도를 발견하는 책무를 졌다. 목사는 도시 교구 교회들의 설교단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성사를 거행했으며, 장로는 모든 주민이 복음 선포를 받아들여 이를 신앙과 행위의 지침으로 활용하는가를 감독했다.

집사는 자선사업을 위해 따로 구별된 기금을 모아 관리하고, 고아, 과부들, 나이든 사람들, 자활능력이 없는 사람들을 돌보는 데 이 기금을 씀으로써 지역사회에서 사회적 의무를 수행하는 책임을 맡았다.

칼뱅이 제네바 개혁을 이끌던 초창기에는 박사가 사실상 칼뱅 한 사람뿐이었다. 그는 파렐의 지도 아래 시작했던 대중 강의를 다시 실시했다. 강의는 성서에 대한 일련의 주석 형태를 띠었다. 그는 시간적 여유를 갖고 한 구절 한 구절을 검토했으므로 성서 각 권을 주석하는 데 몇 개월이나 걸렸다.

뒤에 칼뱅은 이 강의록들 가운데 몇 권을 성서에 대한 주석서로 출판했다. 몇몇 강의록은 공식비서들에 의해 필사되어 사본으로 남았으며, 이 강의록들이 출판된 것은 극히 최근의 일이다. 그의 강의는 대단한 인기가 있었으며 수많은 제네바 시민들이 이 강의에 흥미를 가졌고, 다른 나라에서 종교적 이유로 망명한 많은 사람들도 점점 더 이 강의에 매료되었다. 그들은 주로 프랑스에서 온 사람들이었지만, 이탈리아·독일·잉글랜드·네덜란드·스페인 및 중부 유럽에서 온 사람들도 있었다. 한 동안 칼뱅은 이러한 교육을 제도화하려는 생각을 갖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비공식적으로 신학교육을 제공했지만, 신학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학생들을 준비시키는 중등학교의 재활성화를 위해 도움을 아끼지 않았다. 칼뱅이 제네바로 돌아오라는 권유를 받고 있던 때와 같은 시기에 프랑스 인문주의자 세바스티엥 카스텔요도 이 학교 교장으로 초청을 받았다. 그러나 카스텔요가 이와 별도로 목사직을 원하자 칼뱅은 그의 임명을 막았다. 칼뱅과 카스텔요 사이에는 특정한 성서 구절과 교리를 놓고 큰 의견차이를 보였다.

카스텔요는 성서와 교리를 문자적으로 해석한 데 반해 칼뱅은 비유적인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얼마 뒤 카스텔요는 제네바에서 쫓겨나 바젤로 갔다. 그곳에서 글을 써서 칼뱅의 비관용성을 공격하고 여러 가지 방법으로 칼뱅의 견해를 비판하여 계속 불화를 일으켰다. 상당기간이 지나서 칼뱅은 동등한 자격을 갖춘 사람을 발견하여 카스텔요의 자리에 앉힐 수 있었다.

칼뱅의 교회개혁

칼뱅주의 교리를 체계적으로 가르치려는 최초의 시도는 로잔에서 있었다.

제네바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이 도시는 베른 공화국의 직접적인 통제 아래 있었다. 1537년에 설립된 로잔의 한 아카데미는 장래가 촉망되는 칼뱅주의 목회자들에게 대학수준의 어학과 신학 교육을 실시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베른 정부와 신학적 논쟁을 벌인 끝에 대부분의 교수들은 1558, 1559년에 이곳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칼뱅은 즉각 제네바 정부를 설득하여 1559년 새로운 아카데미를 세워 공백을 메꾸도록 했다(이 아카데미는 오늘의 제네바대학교로 발전했음). 이 아카데미의 초대학장은 명석한 프랑스 인문주의자인 테오도르 베즈였다.

그는 오를레앙과 파리에서 칼뱅을 가르친 몇몇 스승들에게서 공부했고, 프로테스탄트로 개종한 뒤 로잔에서 교수활동을 시작한 인물이었다. 베즈는 비루터파 프로테스탄트, 즉 개혁파 프로테스탄트의 주요지도자로서 칼뱅의 후계자가 되었다.

칼뱅은 처음부터 목사이기도 했다. 그는 1542년 9명으로 구성된 목사단을 지도하기 시작했다. 이 목사단의 일부 목사들은 목사 자격이 의심스러운 사람들이었다. 그뒤 22년 동안 목사들의 수효는 19명으로 늘어났으며 거의 모두 훌륭한 자격을 갖추게 되었다. 그들은 도시 교구들과 제네바에 속한 몇몇 농촌 교구를 나누어 맡았다.

도시 교구의 수효는 인구와 목사 수효에 따라 정해진다. 칼뱅은 구(舊)생피에르 대성당 교회 근처의 교구에 살면서 정기적으로 설교했으며, 때로는 마들렌 교구 교회에서 설교하기도 했다. 목사들은 1주일에 1번씩 모였다. 뒤에 이 모임은 목사동우회로 알려지게 되었다. 칼뱅은 죽을 때까지 이 단체의 토론 사회자 또는 의장으로 봉직했다. 이것은 칼뱅이 제네바에서 가졌던 유일한 공식직함이었다. 목사동우회 가입은 기본적으로 선거에 의한 것이었다.

자리가 비거나 도시 정부가 새로운 임명을 인가했을 경우, 동우회는 후보자를 물색했다. 가능성이 있는 후보자에게는 성서 구절을 주어 동우회 앞에서 주석 설교를 하도록 했다. 설교를 들은 뒤 동우회가 후보자의 설교와 기본적인 신앙을 검토했는데 후보자의 성서 주석 능력, 신학적 신념의 건전성, 화술이 평가대상이었다.

후보자가 이 과정을 통과하면 시 평의회에 그 이름을 보내 재가를 받았다. 1명 이상의 시 평의회원들이 시험을 실시하는 동우회 모임에 참석할 때도 많았다. 동우회와 평의회의 재가를 받은 지원자들은 앞으로 섬기게 될 교구 교인들에게 선을 보였다. 그러나 그것은 형식에 지나지 않았다. 후보자들을 교구 목사로 선발하는 것 외에도 동우회는 칼뱅의 지도 아래 교구를 배정하고, 정규예배 관례를 확정했다. 또한 때때로 상호 충고를 위한 회의를 열어 일종의 자기비판을 하도록 분위기를 조성했다.

칼뱅의 생애 말년에 목사동우회는 점차 늘어나는 다른 나라 프로테스탄트와의 서신왕래를 관장했다. 목사동우회의 토론 사회자였던 칼뱅은 특히 시 정부와의 일에 동우회 대변인 역할을 할 때가 많았다. 그는 자주 시 평의회에 참석하여 여러 가지 정치적 결정에 중요한 발언을 했다. 그는 관리라기보다는 고문 자격으로 활동을 했는데 제네바 정부의 주요관직은 제네바 시 출신에게만 가능했기 때문이다.

칼뱅은 장로들의 활동에도 직접 관여했다.

종교개혁의 '경찰'로 불렸던 장로들은 회계관, 도시곡물공급관, 요새방어사령관, 자치법정 배석관 등 제네바 국가의 다른 관리들과 똑같은 방법으로 선출되었다. 1년에 1번씩 치리평의회(治理評議會)는 칼뱅 및 다른 목사들과 협의하여 장로 후보명부를 마련했다. 이 후보명부는 가부를 묻기 위해 시민권을 가진 모든 시민들의 총회에 제출되었다. 같은 사람이 해마다 장로로 선출될 수 있었지만, 교체되는 경우도 있었다. 장로로 선출된 사람들은 도시의 각 구역을 대표했다.

대부분의 장로들은 제네바에서 태어난 시민들이었지만, 칼뱅의 생애 말년에는 제네바에 정착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우수한 망명자들도 이 지위에 선출될 수 있었다. 장로들은 1주일에 1번씩 목사들과 함께 장로회의라는 모임을 가졌다. 장로회의를 관장하는 관리는 지방행정관이라고 불렸는데 그는 1년간 제네바 행정을 관장하도록 선출된 4명의 지방행정관 중 한 사람이었다. 장로회의는 법정과 매우 비슷한 활동을 하여 우상숭배, 이단 신앙, 종교적 범죄, 칼뱅에 대한 공개적인 불평에서부터 중대한 성범죄에 이르기까지 잘못된 행동을 저지른 혐의로 고소된 거주민들에 대한 소송들이 상정되었다.

피고가 참회의 기색이 역력하고 과실이 경미한 경우에는 엄중한 질책을 받는 것으로 그쳤으나, 상당히 엄격한 칼뱅의 치리를 받기도 했다. 피고가 참회를 하지 않고 과실이 중한 경우에는 도시 정부로 넘겨 계속 수사를 한 뒤 형벌을 내렸다. 장로회의에서 내릴 수 있는 유일한 형벌은 출교였다. 성사를 엄중하게 생각했던 시대에 출교는 충격적인 위협이었다. 장로회의는 이 권한을 얻기 위해 투쟁해야 했다.

그당시 교회기관에 출교권을 허용한 프로테스탄트 정부는 극히 드물었으며, 많은 제네바 시민들은 이 문제에 별 관심이 없었다. 도시 정부가 수정한 1541년의 교회 법령이 실제로 장로법원에 이 권한을 부여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칼뱅은 이 권한을 고집했으며, 이를 둘러싼 논쟁의 초점은 신뢰성의 문제라고 주장했다. 만일 그가 장로회의에서 용서하지 않은 출교된 죄인들에게 성찬을 베풀도록 강요를 받는다면 그는 다시 제네바를 떠나겠다고 위협했다.

이 쟁점을 둘러싼 일련의 치열한 내부 정치 투쟁 끝에 칼뱅은 1555년 마침내 승리를 거두었다. 그뒤 제네바에서 장로회의의 역할과 칼뱅의 권력은 실제적 도전도 받지 않았다. 그뒤 일종의 도덕적 '공포 정치'가 이어져 제네바를 개혁하고 도덕적 엄격성을 조성하는 데 두드러진 역할을 했는데, 나중에 이 도덕적 엄격성은 '청교도'라는 별칭을 얻었다.

칼뱅이 집사들의 활동에 직접 관여하는 일은 많지 않았다.

모든 집사들은 과거 여러 가톨릭 재단들이 관장했던 자선활동을 조정하는 복합자선시설과 관계를 맺었는데, 이 기관은 현대적 의미의 병원이 아니라 고아원, 양로원, 신체 및 정신 장애자 수용소를 결합한 형태의 기관이었고 일시적으로 생계를 꾸릴 수 없는 가난한 가정에 무료 급식과 그밖의 도움을 베푸는 본부이기도 했다. 이 기관을 감독하는 집사('자선종교단장'이라고도 함)는 가족과 함께 자선시설에 거주하며 상근관리자의 역할을 했고, 공석이 될 경우 시 평의회에 의해 선출되었다.

자선종교단장을 돕고 감독하기 위해 도시 정부는 자선시설 행정관이라고도 불리는 4~5명의 집사들을 뽑았다. 이들은 1년에 1번씩 장로들과 똑같은 방법으로 선출되었다. 복합자선시설은 칼뱅이 제네바에 오기 전인 1535년에 설립되었다. 칼뱅은 교회 법령에 이 기관에 대한 규정을 담아서 사실상 영속적인 기관으로 만들었다.

칼뱅과 다른 목사들은 1년에 1번씩 자선시설 행정관 후보자들을 선출할 때 협의에 응했던 것으로 생각되지만, 이것이 법적으로 엄격하게 규정된 것은 칼뱅 생애 말년의 일이었다. 그러나 칼뱅은 종교적 이유에서 제네바로 망명한 사람들 가운데 가난한 사람들을 구휼하는 일에는 깊이 개입했다. 칼뱅은 그들이 제네바에 도착하는 즉시 자기 집으로 초대하기도 했으며, 여러 부유한 프랑스 망명객들과 함께 부르스 프랑세즈라고 불리던 가난한 동포들을 구휼하기 위한 재단을 조직하는 일을 도왔다.

칼뱅의 신학 논쟁과 개혁파 프로테스탄트의 확장

1541~55년까지 칼뱅은 이 교회제도가 제대로 운영되도록 많은 정력을 쏟았다.

그는 이 제도에 대한 제네바 주민들의 지지를 얻고 이 제도의 일상적인 운영을 감독하기 위해 애썼다. 같은 기간에 그의 교리의 권위에 대한 도전과도 싸워야 했는데 그중 가장 어려웠던 것은 제롬 볼세크와 미카일 세르베투스의 반론이었다. 과거에 가톨릭 신학자였던 볼세크는 1551년 칼뱅의 예정론이 하느님을 악의 장본인으로 본다고 주장하며 칼뱅의 예정론을 공공연하게 공격했다. 이에 격분한 칼뱅은 다른 도시에서 활동하는 신학자들의 도움을 받아가며 이 비판을 반박했고, 볼세크는 제네바에서 추방당했다.

스페인의 박사였던 세르베투스는 핵심적인 그리스도교 교리인 삼위일체론(한 분이신 하느님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 계시된다는 믿음)을 공격하는 책들을 출판했다. 1553년 세르베투스가 제네바에 왔을 때, 칼뱅은 그를 체포하고 외국 신학자들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며 그를 이단으로 고발했다. 그뒤 세르베투스는 화형에 처해졌다. 이 2가지 경우 또는 이와 비슷한 경우에도 제네바 정부는 칼뱅을 강력하게 지지했다.

세르베투스(Michael Servetus)
세르베투스(Michael Servetus)

신학적 적대자들에 대해 최종적인 승리를 거둔 뒤, 칼뱅은 홀가분한 마음으로 다른 나라들에 개혁파 프로테스탄트를 전파하는 데 더 많은 정력을 기울일 수 있었다.

이전에 그는 이러한 목적을 위해 츠빙글리가 이끌던 프로테스탄트(이 시기에는 취리히의 하인리히 불링거가 이끌었음)와 이미 동맹을 맺었다. 이 동맹은 1549년 공동신앙고백(Consensus Tigurinus)이 채택되면서 결성되었고, 1552년 이후 칼뱅과 츠빙글리 진영에 속한 보수주의적인 루터파 신학자들, 특히 함부르크의 요아킴 베스트팔과 하이델베르크의 틸레만 헤스후지우스 사이에 치열한 논쟁이 진행되면서 한층 강화되었다.

1555~64년 프로테스탄트 확산에 대한 칼뱅의 관심은 대부분 조국인 프랑스에 집중되었다. 그의 감독 아래 수십 명의 프랑스 망명자들이 개혁교회 목사로 훈련받았고, 이들 중 상당수가 프랑스어권 스위스에서 교사나 시골 목사가 되기 위한 실제적인 훈련을 받았다. 그뒤 그들은 프랑스로 잠입했다. 1562년 프랑스 왕이 칼뱅주의에 대한 관용 조칙을 내릴 때까지 그들의 프랑스 체류는 불법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활동을 공고히 하기 위해 칼뱅은 프랑스 전역에 걸친 지하 교회 조직망을 결성하도록 지원했다. 지역교회는 제네바 교회의 모델에 따라 세웠고, 지역 차원에서는 목사들과 장로들이 참여하는 대의기구('교무회'라고도 함)를 세웠다.

나중에 다른 나라에서 생겨난 이와 비슷한 기구가 바로 스코틀랜드와 아메리카의 장로회 및 잉글랜드와 네덜란드의 클래스이며 이들은 칼뱅파 프로테스탄트의 특징을 가장 잘 보여주는 기관들 가운데 하나이다. 지방 차원에서는 교무회 위에 대의기구적 성격을 갖는 노회가 생겨났다. 이렇듯 다양한 체계를 통일하기 위해 전국 단위의 교회회의가 만들어졌는데, 전국 교회회의는 1년에 1번씩 모이도록 되어 있었다.

제1차 전국 교회회의 모임은 1559년 박해를 일삼던 왕립 정부의 바로 코앞인 파리에서 개최되었다. 그곳에서 전국 교회회의는 전국적인 차원의 신앙고백과 훈련장전을 채택했다. 칼뱅이 살아 있는 동안 제네바의 목사동우회는 전반적인 체계를 관장하는 최고법정 역할을 했다. 목사동우회는 필요한 곳에 도움을 주고, 장로회의나 장로회가 해결할 수 없는 논쟁을 해결해 주었다.

급속히 성장하는 개혁교회를 재정적으로 지원하기 위해 칼뱅은 정치에 뛰어들었다.

그는 유력한 프랑스 귀족들과 접촉하면서 태동중인 프로테스탄트 운동의 후견자가 되도록 권했다. 이들 중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들은 프랑스 왕가와 혈연관계에 있던 부르봉 가문 사람들, 특히 이 가문의 우두머리인 나바라 왕 앙투안 드 부르봉, 그의 부인 잔 달브레, 그의 남동생이요 콩데의 초대 백작이던 루이였다. 유력하고 재력 있는 샤티용 가문의 콜리니 3형제(오데, 가스파르, 프랑수아 당데로)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들 귀족의 도움으로 프랑스 칼뱅주의는 강력한 보호를 받았지만, 이 때문에 프랑스 정부에 공공연하게 도전하는 운동에 연루되기도 했고 이 운동은 급기야 종교전쟁을 불러 일으켰다. 칼뱅은 1560년 콩데의 수행원들 가운데 일단의 피끓는 청년 귀족들이 젊은 왕을 납치하고, 왕의 자문이던 보수적인 가톨릭 참모들을 살해하고자 한 암부아즈 음모 등 전쟁을 향해 치닫는 사건들을 막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1562년 콩드가 직접 왕립 정부와 싸우기 위해 군대를 소집했을 때는 효과적인 여러 수단을 동원하여 그를 지원했다. 칼뱅은 베자가 콩데의 고문·선전자·외교관으로 활동하는 것을 허락하기도 했다.

칼뱅과 제네바 목사동우회는 다른 나라의 개혁파 운동을 위해서도 온건한 형태이지만 비슷한 지원활동을 벌였다. 이탈리아·잉글랜드·스페인 망명자 집단들은 제네바에서 환영받았고, 그들 나름의 지역 교회를 설립하도록 허락받았다. 네덜란드와 여러 독일 영지, 폴란드, 그밖의 나라에서 온 개인들도 환영을 받았다.

이들이 프로테스탄트 선교사로서 본국으로 돌아간 뒤에도 칼뱅은 서신을 통해 이들과 계속 접촉을 가졌다. 또한 그가 생각하기에 프로테스탄트 복음전도 활동을 지원할 가능성이 있는 정부관리들에게 편지를 보내고 책을 헌정했다. 또한 새로운 개혁교회들이 조직되고 다른 프로테스탄트 집단과 가톨릭 집단의 공격에 맞서 스스로를 방어하도록 돕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했다. 칼뱅의 이러한 활동으로 제네바는 개혁파 프로테스탄트의 중요한 국제본부가 되었다. 제네바가 때로 '프로테스탄트의 로마'라고 불리기도 한 것은 이런 이유에서였다.

1560년대에 칼뱅은 심각한 건강문제에 직면했다. 제네바와 국제 개혁파 운동과 관련해 맡고 있던 칼뱅의 직무는 후임자로 유력시되었던 베자와 다른 사람들에게 점차 맡겨지게 되었다. 그는 1564년초까지 설교·강의·집필 등을 계속하다가 그해 5월 27일 죽었다.

칼뱅에 대한 평가

칼뱅은 매우 과묵한 사람이었기에 그의 사사로운 성격이나 긴장을 풀고 있을 때의 성품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것이 없다. 그의 부인은 결혼한 지 9년 만에 죽었다(1549). 아이도 없었으며 재혼도 하지 않았다. 뛰어난 지적 능력, 비상한 기억력, 순발력, 보기 드물게 명료하고 설득력 있는 표현력을 가지고 있던 칼뱅은 카리스마적 지도자가 되었다. 그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어 삶을 변화시키고 그가 내세운 대의에 따라 모험을 하도록 만들었다. 공직생활을 하던 전기간에 걸쳐 그를 지탱해 주었던 것은 자신이 교회를 개혁하도록 하느님의 부름을 받았다고 하는 신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