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주의

토마스주의

다른 표기 언어 Thomism

요약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해 세워진 철학과 신학의 체계.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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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요
  2. 아퀴나스의 입장
  3. 주석가들
  4. 근대의 토마스주의

개요

토마스주의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교리체계뿐만 아니라 그 추종자들이 발전시킨 교리 체계와 해석까지도 포함한다.

아퀴나스의 입장

토마스 아퀴나스는 존경하는 마음으로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주의자들, 아우구스티노와 교부들의 사상을 활용했지만 그 나름대로의 독특한 입장을 발전시켰다.

다음과 같은 예들은 그의 독창성을 잘 보여준다. 그는 실재(esse)를 하느님뿐만 아니라 피조물에도 있는 존재의 최고행위 또는 존재의 완전성으로 보았다. 그러면서도 그는 하느님만이 창조 행위를 할 수 있다고 보았으며, 천사들에게는 질료가 없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실재와 본질의 구성에 따라 하느님과 피조물을 구별했다.

또한 인간 영혼은 질료와 결합하여 인간 본성을 구성하는 독특한 실재 형식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인간 영혼의 불멸성이 엄밀하게 증명될 수 있으며, 영혼과 영혼의 인식 능력 및 의지 능력은 사실상 원리적으로 구별된다고 주장했다. 인간의 인식은 감성적 경험에 근거하며, 이 감성적 경험이 반성작용으로 이끈다는 것이다. 그는 인간과 저급한 피조물 모두 원래 하느님을 향하는 마음, 곧 사랑을 지니고 있으며, 초자연적인 은혜는 인간의 자연적 경향을 완전하게 만들고 고양시킨다고 생각했다.

또한 그는 축복이란 하느님 자신을 인식하는 것이며, 이 하느님 인식은 하느님에 대한 우리의 전폭적인 사랑을 동반한다고 생각했다.

이처럼 일관성이 있기는 하지만 복잡한 토마스의 교리체계는 그뒤 수세기 동안 해석되고 발전되었다. 천사들의 위상, 인간의 본성, 세계의 통일성에 관한 성 토마스의 견해들은 1277년 파리 주교 에티엔 탕피에르와 옥스퍼드 대주교 로버트 킬워드비가 정죄한 명제들에 속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교 신학을 설명하면서 아리스토텔레스나 아라비아 주석가들을 활용하는 방식과 그 범위는 일대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13세기 후반에는 '교정' 문서들이 범람했다. 이 문서들은 성 토마스의 기본 명제들, 특히 인간의 실재 형식의 독특성과, 존재와 실재를 구별하는 아퀴나스의 입장을 공격하거나 변호하는 논문들이었다. 일부 토마스주의자들조차도 토마스의 정확한 의도를 놓치곤 했는데, 왜냐하면 그들은 존재와 실재가 서로 구별된다고 보면서도 실재 형식과 실재를 서로 통일시키는 것을 간과했기 때문이다.

주석가들

도미니코 수도회가 토마스의 교리들을 채택하고(1278, 1279, 1286), 교황 요한 22세가 그를 시성하고(1323), 트리엔트 공의회가 토마스의 저작들에 특별한 지위를 부여하자 토마스 아퀴나스의 저작들을 연구하려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1400~1650년 헌신적인 주석가들이 나름의 계통을 이루며 토마스 사상을 분석하는 학문적 과제를 수행했다. 이 과제를 처음 수행한 사람은 토마스주의자들의 황태자로 불렸던 도미니코 수도회 수사 장 카프레올뤼스(1380경~1444)였다.

그는 성 토마스가 남긴 문헌들을 직접 다루면서 연구해야 한다는 점을 인식했다. 카프레올뤼스는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을 옹호하는 4권의 책 Four Books of Defences of the Theology of St. Thomas Aquinas〉에서 원전 자료들을 체계적으로 사용하며 스코투스주의자들과 오캄주의자들에 대항했다. 또 한 사람의 중요한 주석가는 도미니코 수도회 수사 토마소 데 비오(추기경 가에타노)였다. 그는 성 토마스의 〈신학대전〉·〈존재와 본질에 대하여 On Being and Essence〉를 꼼꼼하게 주석했다.

그는 토마스의 논거들을 그 나름대로 재진술했으며, 토마스의 다른 많은 저술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가에타노의 독자성은 인간 영혼의 불멸성은 그럴 만한 이유들이 있을 때만 옹호될 수 있다는 견해와 〈이름들의 유비에 관하여 On the Analogy of Names〉라는 저서에 잘 나타난다. 이 책에서 가에타노는 유비를 비동등성의 유비, 속성의 유비, 비례의 유비로 나눌 것을 제안했는데, 이러한 구분은 후대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토마스의 〈신학대전〉에 대해 고전적인 주석을 가한 사람은 도미니코 수도회 수사인 페라라의 프란체스코 실베스트리(1474경~1528)였다. 그는 신앙과 철학의 관계, 인격의 의미, 하느님의 바람에 관해 〈신학대전〉이 중요한 가르침을 준다는 것을 밝혔다.

16세기 중반 이후 토마스 주석가들은 은혜와 예지에 관한 난해한 논쟁에 참여하게 되었다. 스페인의 도미니코 수도회 신학자 도밍고 바녜스, 스페인 예수회 저술가인 프란시스코 톨레투스, 가브리엘 바스케스의 〈신학대전〉 주석서들은 반대견해들을 소개하면서 매우 체계적으로 설명했다. 르네상스 시대에 철학적 쟁점과 신학적 쟁점을 따로 떼어놓고 다루는 새로운 경향이 나타나고 신학교 교육에 대한 압력이 거세지자, 주석의 형태로 성 토마스에게 접근하려는 시도는 유용성이 없게 되었다.

새로운 경향은 도미니코 수도회 수사인 성 토마스의 후안(1589~1644)에게서 나타난다. 그는 토마스 사상에 따라 〈철학 강좌 Cursus Philosophicus〉·〈신학 강좌 Cursus Theologicus〉을 잇달아 출판했다. 논리학·자연철학·형이상학을 영역별로 구별한 요한은 이 체계적인 틀을 가지고 성 토마스의 철학적 가르침들을 분류하고, 철학을 공부하려는 학생들을 위해 이 가르침들을 재정립했다.

형식적 개념과 객관적 개념의 구별, 의지지향적 표지의 강조 등 요한의 논리학에는 여러 가지 독창적인 점들이 있다.

근대의 토마스주의

17, 18세기에 토마스주의는 특히 도미니코 수도회의 철학 교과서와 신학 교과서에 줄곧 소개되었다.

이 시기에 나온 토마스주의 교과서들은 대부분 다른 스콜라 철학자들의 견해로 가득 차 있었을 뿐, 근대의 문제들과는 동떨어져 있었다. 19세기 초엽 대다수 가톨릭 신학교들과 대학교들에서는 절충주의가 지배적이었으며, 아퀴나스보다는 데카르트·로크·볼프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이 시기에 진정한 토마스주의의 근대적 부흥이 시작된 곳은 이탈리아였다. 빈첸초 부제티(1777~1824)와 예수회 교사 세라피노 소르디(1793~1865)는 아리스토텔레스와 아퀴나스의 원전을 직접 연구할 것을 장려했다.

1848년에 일어난 여러 가지 혁명은 교황청과 예수회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고, 성 토마스의 저작들에서 하느님·인간·사회에 관한 건전한 가르침을 찾는 계기가 되었다. 이탈리아와 독일에서 큰 영향을 미친 예수회 저술가로는 루이기 타파렐리 다제글리오, 마테오 리베라토레, 요제프 클레우트겐이 있다.

그들은 1850년 이후 판을 거듭해서 나온 철학 교과서들을 통해 토마스 사상의 부흥을 역설했다. 인식론·형이상학·사회이론 분야에서 그들이 취한 입장은 여전히 절충적이었지만, 그들은 근대의 지적인 쟁점들과 사회적 쟁점들에 비추어 성 토마스와 다른 스콜라 철학자들을 연구하도록 자극했다. 이러한 움직임을 결정적으로 뒷받침한 것은 교황 레오 13세의 교서 〈영원하신 아버지〉(1879)이었다. 이 교서는 오늘의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교리들이 갖는 중요성에 주목했고, 교부들과 중세 박사들의 그리스도교 철학을 재발견할 것을 촉구했으며, 이런 일은 근대 학문이 확실하게 진보함에 따라 그 필요성이 커진다고 했다.

특히 레오는 성 토마스의 지혜를 재발견할 것을 요청했다. 그는 성 토마스가 '가톨릭 신앙의 특별한 보루이며 영광'이라고 찬양했다. 교황의 정책에 따라 성 토마스와 중요한 주석가들의 저작에 대한 정확한 역사적 연구가 진행되었다. 이 연구를 위해 근대 학문과 과학이 밝힌 증거들과 자료들이 기꺼이 활용되었다. 성 토마스는 모든 가톨릭 학교들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되었고, 새로운 〈교회법전〉(1917)의 한 규정(제1366조 2항)은 철학 교사들과 신학 교사들이 성 토마스의 방법·교리·원칙을 고수할 것을 요구했다.

이렇게 해서 교회 교육기관에서 성 토마스의 특수한 권위가 확립되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리스도교 사상의 다른 원천들의 재발견, 난제들에 대한 토의, 근대적 가르침들을 평가하려는 노력이 중단되지는 않았다.

20세기의 토마스주의자들은 2가지 주요과제에 관심을 집중했다. 하나는 성 토마스의 교리를 중세기의 맥락에서 역사적으로 연구하는 것이고, 또다른 하나는 현대의 문제들과 관련시켜 그 교리를 재해석하는 것이다. 이 방면의 선구적인 역사가들은 아퀴나스의 생애, 저작 원전, 역사적 관계들을 연구한 피에르 망도네와 마르틴 그라프만이었다.

모리스 드 울프와 에티엔 질송은 중세기의 여러 지적 조류들과 관련시켜 토마스 교리의 배경을 서술했다. 에티엔 질송은 토마스의 형이상학에서 실재 개념이 맡았던 기본 역할을 밝혔으며, 토마스의 형이상학을 형이상학의 다른 역사적 형태들과 비교했다. 철학의 주요영역들에서 행위의 원리와 잠재성의 원리가 어떻게 발전했는가를 밝혀서 토마스 사상을 개관하고자 한 학자들도 여러 사람 있었다. 도미니코 수도회 수사 R. 가리구 라그랑주는 하느님과 섭리의 문제를 강조했으며, 또다른 도미니코 수도회 수사 A. 세르티양주는 창조활동을 해석의 핵심으로 삼았다.

예수회 수사 마르탱 다르시는 역동적이고 효율적인 아퀴나스의 정신적 측면들을 밝혔다.

루뱅대학교에서 데지레 조제프 메르시에르 추기경과 그의 동료들은 토마스주의에 대한 현대사상의 도전에 관심을 집중했다. 그들은 형이상학이 굳건한 토대를 갖춘 실재론을 뒷받침하도록 철학의 출발선상에서 인식론 문제를 다루었다. 조제프 마레샬의 목표는 하느님의 실재에 관한 궁극적 진술과 존재 그 자체를 역동적으로 긍정하는 정신적 태도를 중심으로 주요사상가들, 특히 성 토마스의 사상을 재정립하는 것이었다.

프란체스코 올지아티는 실체에 대한 형이상학적 실재론을 사용하여 데카르트주의 사상가들과 경험주의 사상가들에 대한 토마스주의의 비판적 상관성을 밝혔다. 자크 마리탱은 인간질서 안에서 다양한 방법과 지식을 어떻게 통일할 것인가에 대해서 관심을 기울였으며, 토마스주의의 인격 개념과 공동체 개념을 민주주의 문제에 적용하기도 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토마스주의자들이 직면한 주된 과제는 ① 적절한 과학철학을 발전시키는 것, ② 인간에 대한 현상학적·정신의학적 발견을 고려하는 것, ③ 실존주의 존재론과 자연주의 존재론을 평가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