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네디

케네디

다른 표기 언어 John F(itzgerald) Kennedy
요약 테이블
출생 1917년 5월 29일, 미국 매사추세츠 브루클라인
사망 1963년 11월 22일, 텍사스 댈러스
국적 미국

요약 재임중 쿠바 사태, 베를린 봉쇄 등 여러 가지 어려운 위기를 맞았으며 핵실험금지조약의 체결과 '진보동맹' 결성 등의 업적을 남겼다. 댈러스에서 자동차로 가두행진을 벌이던 중 암살당했다.
1960년, 케네디는 공화당 대통령후보인 리처드 M.닉슨을 가까스로 누르고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미국 역사상 최연소이자 최초의 로마 가톨릭교도였다. 케네디는 당선되자마자 여러 외교 문제에 봉착했지만, 이를 담력있게 대처했다. 재선을 앞둔 1963년, 그는 텍사스 주를 순회하는 일정을 잡고, 댈러스 시 중심가에서 카 퍼레이드를 벌이다가 오즈월드에게 저격당해 숨졌다.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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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요
  2. 초기생애
  3. 상·하원 의원 시절
  4. 대통령후보와 대통령 시절
  5. 암살
케네디(John F(itzgerald) Kennedy)
케네디(John F(itzgerald) Kennedy)

개요

재임중 쿠바 사태, 베를린 봉쇄 등 여러 가지 어려운 위기를 맞았으며 핵실험금지조약의 체결과 '진보동맹' 결성 등의 업적을 남겼다.

댈러스에서 자동차로 가두행진을 벌이던 중 암살당했다.

초기생애

존은 조지프 패트릭 케네디와 로즈 피츠제럴드 케네디 사이에서 9남매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형제들간에 치열한 육체적·정신적 경쟁을 장려하는 집안에서 성장했고 로마 가톨릭 교회의 종교적 가르침과 미국 민주당의 정치이념에 바탕을 둔 교육을 받았다. 1940년 하버드대학교를 졸업했는데, 그때 학위논문으로 제출한 〈영국은 왜 잠자고 있는가 Why England Slept〉(1940)는 영국의 군사적 무방비상태를 논한 것으로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그는 1938년에 6개월간 당시 주영(駐英) 미국대사를 지내고 있던 아버지 조지프 케네디의 비서로 일했다.

1941년 가을 케네디는 해군에 입대했고 2년 뒤 남태평양으로 전출되었다. 1945년 그가 제대했을 때는 맏형 조가 이미 전사한 뒤였다. 조는 집안의 장남으로 또 아버지의 희망대로 공직에 출마할 것으로 기대를 모았는데, 그의 사망으로 이 역할이 둘째 아들인 존에게로 옮겨졌다. 사실 존은 그 전에는 학자나 언론인이 될 계획이었다.

존 자신도 전쟁중에 간신히 죽음을 모면했다.

해군의 PT형 어뢰정(魚雷艇) 정장(艇長)이었던 그는 일본 구축함의 공격을 받아 자신의 어뢰정이 솔로몬 제도에서 침몰할 때 중상을 입었다. 적 후방에 고립된 그는 지휘력을 발휘하여 자신의 부하들을 안전하게 살려내어 용감한 군인에게 수여되는 해군·해병대 훈장을 받았고 자청하여 현역 지휘관으로 복귀했다. 하지만 10대 이후 그를 계속 괴롭혀오던 척추질환과 부신피질 부전증(不全症)으로 고통을 받았다. 그러나 존을 포함한 케네디 일가의 사람들은, 존이 신병 때문에 정치보다 더 손쉬운 직업을 선택하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공직에 출마하여 승리하리라는 기대를 받고 있었다.

상·하원 의원 시절

그는 공직에 출마하여 승리를 거두었고 한 번도 선거에서 패배해본 적이 없었다.

그는 1946년 첫 기회를 잡아 하원의원에 출마했다. 신체적으로는 허약했지만 적극적인 선거운동을 펼쳤다. 그는 매사추세츠 주 제11선거구의 민주당 조직을 이용하기보다는 자신의 가족, 대학동창, 동료 해군장교들의 힘을 빌려 선거운동을 펼쳐나갔다. 민주당 예비선거에서 그는 차점자보다 거의 2배나 많은 표를 얻었다. 11월의 본선에서 그는 공화당 후보를 압도적인 표차로 누르고 승리했는데, 그때 나이 불과 29세였다. 케네디는 민생(民生)에 관심을 기울이는 진보주의자로서 1947~53년 하원의원을 3번 역임했다.

그는 더 좋은 근로환경, 더 많은 공공주택, 더 높은 임금, 더 낮은 물가, 더 싼 주택임대료, 더 많은 노인복지대책을 지지했다. 외교분야에서는 처음부터 냉전정책을 지지했다.

그는 트루먼 독트린과 마셜 플랜을 지지했으나 트루먼 행정부의 대(對)아시아 정책은 크게 비판했다. 그는 장제스[蔣介石]에게 압력을 넣어 마오쩌둥[毛澤東]과 연합하도록 부추기고 있는 미국 국무부의 태도를 비난했다.

1954년 그는 뉴잉글랜드 지방 출신의 상원의원으로는 유일하게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상호무역전(reciprocal-trade powers)의 연장을 지지했고, 센트로렌스 해로(海路)의 개방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그 이전의 20여 년 동안 매사추세츠 출신 상·하원 의원 중에서 그 해로의 개방을 지지했던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또한 그는 양심상의 문제로 여론에 도전한 8명의 위대한 미국 정치 지도자들을 다룬 〈용기 있는 사람들 Profiles in Courage〉(1956)을 저술하여 1957년 이 책으로 퓰리처상을 받았다.

상원에 다시 돌아온 케네디는 선거인단 철폐제안에 반대했고, 노동개혁에 앞장섰으며, 민권보호법안에 점점더 깊숙이 관여하게 되었다.

1950년대 후반 상원외교분과위원으로서 그는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신생국가에 폭넓은 원조를 제공하자고 주장했고, 프랑스에게 알제리의 독립을 보장하라고 요구함으로써 워싱턴 정가를 경악시켰다. 이 시기에 그의 정치적 태도는 좌파적 경향을 띠었다. 하지만 아버지 조지프 케네디의 영향력으로 민주당원 사이에서 존의 위치는 서서히 높아져갔고 마침내 그는 일리노이 주지사 애들라이 E. 스티븐슨을 따르던 추종세력들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게 되었다.

스티븐슨은 2번씩이나 민주당 대통령후보에 올랐고 미국인들에게 이상주의를 호소함으로써 민주당의 면모를 일신시켜 케네디의 성장을 가능하게 한 인물이다.

대통령후보와 대통령 시절

1960년 1월 존 F. 케네디는 대통령 입후보를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그의 주된 경쟁자는 미네소타 주의 휴버트 H. 험프리 상원의원과 텍사스 주의 린던 B. 존슨 상원의원이었다. 케네디는 험프리에게 타격을 가하여 후보지명전에서 탈락하게 했고 개신교도가 대다수인 웨스트버지니아 주의 예비선거에서 승리를 거둠으로써 로마 가톨릭 신자에 대한 종교적 금기현상에 일격을 가했다. 그는 휴스턴의 개신교 목사들 앞에서 행한 텔레비전 연설에서 정교분리(政敎分離)를 지지하는 자신의 소신을 공언함으로써 가톨릭 문제를 해결했다.

민주당 대통령후보로 지명되자 그는 존슨을 자신의 부통령 러닝 메이트로 선택하여 민주당의 정·부통령 후보의 진용을 강화했다. 대통령후보지명 수락연설에서 케네디는 "우리는 뉴 프런티어의 한 끝에 서 있습니다"라고 선언했다. 그때 이후 뉴 프런티어라는 말이 그의 모든 정책에 따라다니게 되었다. 또다른 문구인 '케네디 스타일'이라는 말은 대통령후보로서의 그의 정체(正體)를 감싸주었다.

케네디는 총 유효투표수 6,833만 5,642표 중 11만 8,550표차로 공화당 대통령후보인 리처드 M.닉슨을 가까스로 누르고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닉슨은 아이젠하워의 기록을 유지하는 데 그쳤다. 케네디는 "이 나라를 다시 한 번 힘차게 만들어봅시다"라는 구호를 내세웠다.

그는 실업, 침체된 경제상황, 미사일 갭(미·소 간의 핵장착 미사일의 보유수에 있어서 소련이 우세함을 가리키는 말), 아바나의 신생공산정권 탄생 등을 개탄했다.

대통령선거전에서 중요한 변수로 작용한 것은 두 후보 사이에 벌어진 4차례에 걸친 텔레비전 토론회였다. 8,500만 내지 1억 2,000만의 미국민들이 1차례 또는 그 이상 그 텔레비전 토론회를 시청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토론회는 두 후보 모두 국정의 문제점을 잘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케네디의 멋진 용모와 텔레비전 화면상의 좋은 인상으로 인해 많은 시청자들이 케네디가 그 토론회에서 이겼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하여 존 F.케네디는 미국 역사상 최연소이자 최초의 로마 가톨릭교도로서 미국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의 행정부는 1,037일 동안 유지되었다. 취임 초기부터 그는 외교문제에 관심을 쏟았다. 인상적인 대통령 취임연설에서 그는 "인간 공동의 적인 압제·빈곤·질병, 그리고 전쟁 그 자체에 대한 지속적이고 힘든 투쟁의 부담을 함께 져나가자"고 요청했다.

케네디 행정부의 첫번째 외교정책은 대실패였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임기말년에 미국 CIA는 쿠바 침공을 위해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쿠바 망명자들을 조직하여 무장시키고 훈련시켰다. 미국합동참모부는 신임 대통령인 케네디에게 이 병력이 일단 쿠바 해안에 상륙하면 쿠바의 지도자인 피델 카스트로에 대한 총궐기를 촉발시킬 것이라고 일치된 견해를 제시했다. 그러나 피그스 만 침공은 대실패로 끝났다. 쿠바 해안에 상륙한 특공대는 사살되거나 사로잡혔다.

케네디는 이 실패에 대하여 '단독책임'을 졌다. 그는 사석에서 아버지에게 합동참모부의 추천사항을 사전 검토 없이 그대로 수락하는 일은 다시 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소련의 총리인 니키타 흐루시초프는 1961년 6월 빈에서 케네디와 만나고 나서 이 젊은 대통령의 그릇을 정확히 파악했다고 생각했다.

흐루시초프는 동·서 베를린 사이에 장벽을 건축하라고 지시하고 동독과 단독으로 평화협정을 체결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케네디 대통령은 방위군과 예비군에게 동원령을 내렸고 흐루시초프는 단독평화협정 위협을 취소했다. 1962년 10월 소련제 중단거리 핵 미사일이 쿠바에 배치되고 있는 것이 발견되었다.

케네디는 그 미사일들을 철거하라고 요구했다. 그는 쿠바를 고립시키라고 명령했고 실제로 소련군함이 쿠바에 도착하지 못하도록 해상봉쇄 조치를 취했다. 13일 동안 핵전쟁이 임박한 듯한 분위기였다. 그뒤 소련의 총리인 흐루시초프가 공격용 무기는 철수될 것이라고 발표했다(→ 쿠바 미사일 위기).

10개월 뒤 케네디는 흐루시초프와 영국 총리 해럴드 맥밀런이 참가한 가운데 핵실험금지조약에 서명했는데 이것은 커다란 외교적 개가였다.

1960년 대통령선거에서 가까스로 이겼기 때문에 케네디는 의회접근에 조심성을 보였는데 또 여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의회는 대체로 케네디가 제안한 법안들에 대해 별 흥미를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의회는 중남미 국가와의 '진보동맹'(Alianza)과 수천 명의 대학생들로부터 열렬한 지지를 받은 '평화봉사단'(Peace Corps)을 승인했으나 그가 크게 관심을 기울였던 2개의 법안, 즉 대규모 소득세 삭감과 포괄적인 민권보호조치에는 냉담했다.

결국 이 안건은 그의 사후에 통과되었다.

암살

케네디 대통령은 1964년 대통령선거에서 공화당 쪽 후보는 애리조나 주 상원의원인 배리 골드워터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골드워터를 압도적인 표차로 이길 수 있다고 믿었고, 그렇게 함으로써 대규모 개혁입법을 밀어붙일 힘이 되는 국민적 지지를 얻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이 계획에 한 가지 장애가 되었던 것은 부통령 존슨의 고향인 텍사스 주의 주지사 존 B. 코널리와 상원의원 랠프 야버러(둘 다 민주당 인사) 사이의 불화였다.

이 두 사람의 일치단결된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케네디 대통령은 이 두 사람과 함께 텍사스 주를 순회하기로 결정했다.

1963년 11월 22일 금요일, 케네디 대통령과 재클린 케네디는 무개차(無蓋車)를 타고 댈러스 시 중심가를 관통해 천천히 자동차 퍼레이드를 벌이고 있었다. 12시 30분 한 저격범이 이들을 향해 총을 발사했다. 총탄 2발이 대통령의 목과 머리에 치명상을 입혔다. 그는 파클랜드 메모리얼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곧 사망했다.

코널리 주지사는 중상을 입었지만 회복되었다. 같은 날 오후 2시 38분 존슨 부통령이 대통령 취임 선서를 했다. 24세 된 댈러스 시민인 리 하비 오즈월드가 저격범으로 체포되었다. 이틀 뒤 오즈월드는 댈러스 경찰서 지하실에서, 현지 나이트클럽 경영인 잭 루비의 총에 맞아 죽었다.

미국 연방 최고법원장인 얼 워런이 주도하는 대통령 직속 조사위원회는 저격범 오즈월드나 오즈월드의 살해범 잭 루비, 두 사람 모두 케네디 대통령을 살해하려는 국내 또는 해외의 음모와 연관되어 있지 않으며, 오즈월드는 단독범임을 밝혀냈다(→ 워런 위원회). 존 F. 케네디는 죽었지만 케네디 신화는 아직도 살아 있다.

재클린 케네디와 두 자녀는 백악관을 나와 워싱턴의 한 지구인 조지타운의 사저(私邸)로 이주했다가 다시 1964년 여름 뉴욕 시로 이주했다. 그녀를 뒤쫓는 사람들의 발길은 1968년 10월 20일 그녀가 그리스의 선박왕 아리스토텔레스 오나시스와 결혼할 때까지 끊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