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무대기술

연극무대기술

다른 표기 언어 theatrical production , 演劇舞臺技術

요약 연극이 공연으로 완성되기 위해서 필요한 여러 가지 기술.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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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연극무대미술
  2. 연극조명
  3. 연극무대장치
  4. 연극의상
  5. 연극분장

아리스토텔레스는 연극의 6대 요소 중에서 흥미 위주의 무대효과를 가장 경시하기도 했으나, 공연성을 중시하는 현대로 올수록 무대기술이 연극에서 갖는 비중이 높아지고 있다. 무대기술은 대체로 무대미술·조명·무대기계·의상·분장 등으로 나뉘며, 1편의 연극이 완성되는 데는 이 모든 요소의 종합적인 효과가 필수적이다.

서양 극장의 형태
서양 극장의 형태

연극무대미술

각각의 작품에 따라서 개별적인 무대미술을 장치한다는 생각은 연극의 긴 역사 속에서 최근에 속하는 근대극 이후의 일이다(→ 무대 디자인). 고대 그리스 연극에서는 극장 구조의 일부인 스케네의 정면이 모든 연극의 관례적인 무대배경이었다고 여겨진다.

후기에는 이 스케네 건물에 오늘날의 플랫처럼 그림을 그린 패널이 붙여지거나, 큰 3각형 프리즘 같은 구조물(periaktoi)의 3면에 그림을 그려서 장면에 맞게 돌려가며 배경을 변화시켰다고 전해진다. 중세 무대미술의 특징은 맨션의 사용이다. 즉 하나의 맨션은 하나의 세계를 대표했으므로 천국과 지옥은 2개의 맨션으로 표현되었다.

르네상스 무대미술은 비트루비우스의 무대이론서 〈건축십서 De architectura〉과 원근법의 영향으로 대표된다. 비트루비우스는 BC 1세기 사람으로 고대 극장에 관한 자료와 이론을 총망라한 〈건축십서〉이라는 저술을 남겼는데, 이것이 15세기에 발견되면서 극장과 무대미술에 큰 영향을 끼쳤다. 한편 원근법은 비트루비우스의 '이상적인 도시' 개념과 조화되어, 원근을 보이는 무대배경 그림에 집들이 들어선 르네상스 무대의 기본을 이룬다. 이탈리아의 무대미술은 르네상스 시대 유럽 전역에 영향을 끼쳤다.

무대미술의 새로운 전기는 19세기 과학기술의 발달과 멜로드라마의 등장으로 비롯되었다. 그 이전에는 기본적으로 신고전주의의 영향 아래 있었으므로 작품에서 장소나 상황을 일반적으로 제시하였을 뿐 개별적인 효과 연출에는 별로 주목하지 않았다. 물론 막간극이나 오페라, 또는 가면극같이 특수하게 무대미술과 의상에 힘썼던 장르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멜로드라마는 연극에서 감성을 특히 강조했던 만큼 새로운 무대 효과에 주력했다. 회전무대나 트랙 등을 이용한 특수장면들이 연출되어서 극의 내용보다는 특수장면을 보러간다는 말이 생긴 것도 이 시기이다. 트랙과 바퀴를 응용·연출된 〈벤허 BenHur〉(1926)의 말달리기 장면은 특히 유명하다. 나아가 지방적 특징과 역사적 고증이 중시되기 시작했다.

근대극의 시작과 함께 사실적 재현의 중요성이 더욱 강조되어 오랫동안 평면적 플랫으로 표현되었던 것이 입체적인 물체로 대치되었다. 즉 '제4의 벽 이론'같이 무대미술은 실제 방안의 한쪽 벽을 들어냈을 때 보여지는 모습 그대로를 재현하고자 했다. 또한 고유의 환경을 강조하기 위해 각 작품마다 새로운 무대장치를 만들었는데, 이는 무대미술 개념의 일대 혁신이었다. 오늘날 사실주의를 더이상 신봉하지 않는 사람들도 각 작품에 고유한 무대장치를 요구한다.

무대미술은 고도의 전문화된 기술과 예술성이 요구된다. 무대미술의 시작은 공연작품의 분석에서 출발하여 스케치가 그려지고, 연출가의 승인을 받은 뒤 본격적인 기초안이 짜여진다. 이 기초안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스튜디오를 위한 넓은 공간과 여러 기술의 도움이 필요하다. 요즈음에는 상업적인 미술 스튜디오에서 제작되는 경우가 많으며, 컴퓨터 그래픽의 발달로 입체적인 재현이 손쉬워져서 디자인에 활용되고 있다(→ 컴퓨터 지원공학).

연극조명

무대 위에서의 빛의 효과를 일컫는 조명은 무대예술을 구성하는 한 요소이다(→ 무대조명). 특히 무대예술이 관객의 시각을 무시하고는 이루어질 수 없는 만큼 빛의 존재는 절대적이다.

무대조명은 무대예술 가운데 가장 역사가 짧다. 희곡·연출·연기·미술(장치·의상), 음악, 극장건축 등이 여러 세기의 전통을 지니고 있는 데 비해, 조명이 무대에서 주요한 역할을 담당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가스이 등장하고 난 이후의 일이다.

고대 그리스에서 중세에 이르기까지 공연은 주로 야외에서 행해졌으며, 자연광을 주된 조명으로 삼았다. 16세기 이후 무대가 실내로 바뀜에 따라 인위적인 무대조명이 사용되기 시작했다. 그당시 조명에는 주로 수지(獸脂) 가 사용되었는데, 비싸고 관리하기 힘든 단점이 있었다. 17세기에 들어서 석유등이나 반사경 및 반사효과를 이용한 금장식 등이 고안되었다. 석유등은 불꽃을 보호하고 조명효과를 내기 위해 유리등피로 감싸고 레버를 이용해 높낮이를 조절했다.

19세기 가스등의 등장은 조명의 획기적인 개혁을 이룩했다. 이 가스등은 촛불이나 석유등에 비해 훨씬 밝고 조작이 쉬워 손쉽게 조명에 변화를 줄 수 있었기 때문에 사실적인 무대효과에 크게 기여했다. 가스등으로 비로소 밝기의 정도가 조절되어 오늘날 조광기의 기능을 발휘할 수 있게 되었다. 이외에도 석회등을 사용해 배우의 움직임을 따라 부분조명을 투사할 수 있게 되었고, 사실적인 효과라든가 햇빛·달빛·구름·불길 등의 효과를 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조명의 기본위치나 방법에는 변화가 없었으며, 가스 벽감(壁龕) 등의 고안에도 불구하고 화재의 위험이 항상 뒤따랐다.

무대조명이 현대화된 시기는 에디슨이 전등을 발명한 이후의 일이며, 세계적인 찬사를 받았던 전기조명 시스템이 최초로 무대에 선보인 것은 런던의 사보이 극장에서였다.

20세기에 들어오면서 백열등은 조명기구로서 이미 보편화되었다. 계속해서 필라멘트 등 영구적인 재질 개발로 전기조명은 날로 향상되어 아크로 스포트라이트를 대체할 만한 백열 스포트라이트가 나오게 되었다(필라멘트 등). 바그너는 그의 음악극에서 조명 사용에 대한 새 가능성을 제시했고, 아피아·크레이그도 조명의 역할을 극대화시켜 입체적이고 구성적인 무대를 형성했다.

전기조명은 여러 가지 새로운 조명효과를 가능하게 했다. 1902년 독일의 포르투니는 반구형의 사이클로라마에 하늘의 효과를 내는 조명기술을 발휘했고, 어빙은 램프에 칠을 입혀 색채조명을 했다. 벨라스코는 조명사 하트먼과 현대 사실주의 조명 필요한 여러 조명기를 발명했다. 가스등 시대의 광도조절을 응용해 전류의 흐름을 조절한 더욱 효과적인 디머도 개발되었다.

처음에는 직류가 사용되었으나 최근에는 교류를 써서 더욱 다양한 조명효과가 가능해졌다. 유리·젤라틴·플라스틱 등의 여러 소재를 응용한 다양한 색채조명의 개발도 무대표현에 무한한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조명기구는 크게 스포트라이트·스트립라이트·플러드라이트·특수조명으로 나누어진다.

우선 스포트라이트는 와트량과 렌즈의 종류 및 반사경에 따라서 다양하며 가장 널리 사용된다. 그중에서도 엘립소디얼 스포트라이트는 가장 효율적이며 용도가 다양하다. 스트립라이트는 보통 0.9~2.7m 길이의 홈통에 작은 칸막이로 되어 각 칸마다 전구가 들어있는데, 회로의 연결에 따라 색조를 혼합하기도 하여 다양한 색들을 만들어낸다. 플러드라이트는 퍼짐이 매우 크므로 넓은 무대를 전체적으로 비쳐주는데, 주로 사이클로라마를 비추는 데 사용한다.

가장 일반적인 특수효과 장치는 영사기이다.

그림이나 사진, 또는 구름·파도·비·연기 등을 그려넣은 디스크와, 그것을 회전시키는 부분이 스포트라이트 장치 전면에 위치하여 특수효과를 만들어낸다. 20세기 중반을 넘어 이 영사기술도 많은 발전을 거듭해 슬라이드와 필름의 몽타주 효과 등을 창출하는 폴리비전 기법까지 등장해 다영상 매체로 각광을 받고 있다. 광도조절 시스템의 원격조절장치 개발은 조명가들의 오랜 숙원이었다.

최초의 형태로 모터 작동 디머가 사용되었으나 전자 디머가 개발됨에 따라 작동이 단순화되었다(전자공학). 현재는 매스터 컨트롤 장치나 SCR 조광기 등이 나와 있고, 컨트롤보드 콘솔은 조명 디자이너들의 기술적인 도구가 되어 있다. 최근에는 SCR 시스템에 수백 개의 지시 입력으로 무대 전체장면을 조절할 수 있는 메모리 시스템이 개발되어 조명의 무한한 가능성을 시사해주고 있다.

연극무대장치

오늘날 극장에서 무대장치를 세우고 조종하는 데는 다양한 기계장치들이 사용된다. 이 장치들은 호이스트, 리프트, 호리존탈 드라이브 등 3가지로 구분된다. 호이스트는 무대바닥에서 천장까지 장치들을 올리고 내리는 데 사용되고, 리프트는 무대바닥 밑으로부터 장치들을 옮기는 데 쓰인다.

또 호리존탈 드라이브는 덧마루나 플랫 및 커다란 소도구들을 무대 평면 위에서 이동시키는 데 사용된다. 호이스트는 무대설비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것으로 평형추, 전력, 유동 드라이브 등을 이용해 움직인다. 우선 평형추를 응용한 구조의 대표적인 것으로 헴프 시스템과 아이언 카운터웨이트 시스템이 있다. 헴프 시스템에서는 모래주머니와 쇳덩어리를 평형추로 사용하며 참바로 연결한다. 아이언카운터웨이트 시스템은 줄이 와이어로프로 대체된 것이 다르다. 다음으로 전력을 이용한 호이스트는 평형추를 이용한 경우와는 달리 순수한 힘으로 작동되는 형태이다. 이 시스템은 모터·브레이크·기어감속기·드럼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유동 드라이브 시스템에서는 전력의 힘이 유동 피스톤을 작동시키고 그것으로 호이스팅 라인을 움직인다. 리프트는 여러 장치를 무대바닥 밑에서 무대 위로 오르내리게 하는 장치이다. 호이스트와 비교할 때 리프트는 무대바닥이나 지하 등 무대 건축구조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리프트는 극장구조의 일부로 설계된 것과 개별공연에 따라 임시로 설치되는 것이 있다. 영구적인 리프트의 설계와 설비는 신중하게 검토되고 사용 횟수와 수용 가능한 공연형태 등이 고려되어야 한다. 일반적으로 극장건축과 연계된 영구적 리프트는 그 극장에 상주하는 전용극단의 특수한 상연 필요성과 일치할 때 성공적이다.

호리존탈 드라이브 시스템은 무대 뒤에서 전면(前面)으로 무대장치나 배우·소도구 등을 내보내거나 빠르게 순환시키는 데 사용된다. 이는 빠른 장면 변화나 진행을 위해서 필수적이다. 무대에서 나타나는 수평적인 움직임은 변화무쌍한 것 같아도 사실은 몇몇 기본 방법을 활용하고 있다.

우선 수레무대의 응용을 들 수 있는데, 이것은 기본적으로 덧마루에 바퀴를 붙인 것이다. 잭나이프 스테이지는 무대 한 곳을 중심으로 무대 안팎으로 접었다 폈다 할 수 있는 무대로, 수레를 응용한 것이다. 여기서 더 발전한 것이 회전무대이다. 영구 회전무대가 아닌 경우라면 결국 수레를 대형화하고 응용한 것이다. 커다란 원형의 덧마루에 몇 장면의 세트를 설치해 무대를 회전시켜서 필요한 배경을 전면에 보여준다. 또다른 장면이 진행될 때 뒤쪽 반경에서 미리 다음 무대장치 변경이 가능하므로 빠른 무대 전환에 효과적이다.

연극의상

무대에서 무대의상의 역할은 연극 장르의 성격에 따라 다양하다.

발레나 전체 연극의 의상은 몸의 움직임과 함께 무대를 구성하는 조형미의 중요한 요소이다. 사실극의 의상은 등장인물이 살던 시대나 계급·직업·계절 등 줄거리의 전개와 관계가 있는 구체적인 지식을 관객에게 제공한다. 의상은 복장사와는 또다른 고유의 전통을 가지고 있다. 성공적인 의상은 연출가의 해석과 의도를 충분히 반영하여 전체적인 공연과 조화를 이룬 의상이라야 한다. 고대 그리스 비극에서는 배역을 강조하기 위해 배우의 체구를 크게 보이려고, 디오니소스 사제들같이 길고 풍성한 옷을 입고 나막신처럼 높은 신발을 신었다(→ 그리스 연극). 튜닉, 키톤, 길고 짧은 망토 등이 의상의 주류를 이루었다.

특히 가면의 사용은 특기할 만한 것으로 인물의 나이·성별·신분 등을 나타냈다. 2세기경 폴루레우케스는 인물에 따른 가면의 종류를 기술하기도 했다. 구희극에서는 동물 형상을 한 장식품들이 많이 사용되었던 반면에 신희극에서는 가공적인 요소가 사라지면서 등장인물에 따른 전형적 가면들이 등장했다. 로마의 의상은 기본적으로 그리스의 것을 모델로 삼았고, 당시 유행한 마임에서는 켄튱쿨루스라는, 조각을 이어 만든 재킷이 독특했다. 중세신비극·기적극·예배극 등의 종교극에서는 교회의 제복(祭服)이 의상으로 주요한 역할을 했다.

한편 도덕극에서는 우화적 요소를 강조하여, 의상은 선과 악, 생과 사 등과 같은 추상적인 개념을 의인화하는 데 주력했다. 교회의 힘이 약화되자 등장한 세속극에서는 의상이 좀더 자유롭고 다양해졌다.

르네상스 디자이너들은 고전사상이 부활됨에 따라 그리스·로마 신화에서 영감을 얻어 호사스런 의상을 고안했다.

이당시 연극은 왕가의 승리나 입성(入城) 같은 행사와 관련이 깊었다. 디자이너들은 의상의 화려함으로 관중을 매혹시키려 했고, 단순히 아름다움을 더하는 정도를 넘어 의상을 플롯 이해의 보조수단으로 삼고자 했다. 고전의 비극·희극·풍자극이 부활했으며, 특히 이 사이사이에 막간극이 발달했다. 의상은 스펙터클에 주력했던 막간극에서 특히 화려했는데, 영국의 이니고 존스는 그 영향을 받아 영국의 가면극이나 궁전오락을 개량하기도 했다.

이탈리아의 코메디아 델아르테에서는 의상을 보고 등장인물을 구별할 수 있을 만큼 독특하게 고안되었으나 갈수록 유형화되고 과장도 심했다.

이 영향을 받은 프랑스몰리에르 극의 인물들은 동시대에 유행했던 의상을 입었으나 왕가는 역시 화려한 의상으로 장식했다. 영국에서는 왕정복고로 극장이 다시 개관되면서 새롭게 여장 소년배우가 여배우로 대치되었다(왕정복고 극장). 이들은 화려한 의상을 의상 임대업자들로부터 빌려 입었으며, 성격이나 역사적 고증을 별로 고려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오페라발레에서는 화려한 의상과 장식이 특히 두드러졌다. 바로크 의상은 루이 14세 왕정에 귀속되어 있던 기시나 베랭 같은 디자이너들로 대표된다(루이 14세 양식). 이들은 색깔의 구분으로 각 나라를 상징했고, 환상적일 만큼 웅장하고 호사스러운 의상을 고안했다.

이때는 사람뿐만 아니라 말[馬]도 장식의 대상이었다.

18~19세기에는 로코코 양식의 영향을 받아 과거의 장식적 의상개념이 바뀌어 단순화를 추구하는 경향이 대두되었다.

이것은 "화려한 의상이 관객의 눈을 어지럽게 할지는 몰라도 마음에 다가서는 것은 아니다. 희극에 사용되는 의상은 일상복 이상의 것이어서는 안 되고 비극에서는 더욱 단순함이 요구된다"는 디드로의 견해로 대표된다. 이 영향으로 무용의상도 행동에 불편한 과거 의상을 포기하고 평평한 슬리퍼 등을 신었다. 근대극의 출범과 함께 사실주의나 자연주의의 영향으로 일상을 재현하는 의상이 강조되기도 했으나 20세기 들어 상징주의 연극을 시작으로 입체파·다다이즘·초현실주의·표현주의 등 여러 전위적인 움직임이 일어났다.

이들은 의상의 디자인 개념에도 혁신을 가져왔다. 주관을 강조하는 표현주의극에서는 의상이 도식적이며, 브레히트의 서사극에서는 사실성과 함께 풍자성을 띤다. 그로토프스키의 가난한 연극에서는, 의상도 기능적인 면에 국한시켜서 갈아입지도 않았다.

동양연극의 의상에서 공통되는 특징은 서양연극과 같이 시대에 따라 변화·발전하기보다는 한 가지 양식이 완성되면 그것이 그대로 보존된다는 점이다.

무대의상에서도 고유한 양식이나 약속에 지배되는 경우가 많으며 각기 그 나름대로 선명한 색채를 띠고 있다.

연극분장

분장은 화장품이나 여러 가지 재료를 사용하여 배우의 신체·얼굴·머리 등을 변형시키고 아름답게 꾸미는 실제적 작업이다. 긴 세월 동안 분장은 배역을 연기하기 쉽게 하며 아름답게 보이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모든 관중의 눈에 쉽게 띄도록 하기 위해 행해졌다.

최초의 분장으로는 그리스 연극에서 테스피스연백이나 진사 등을 바른 것이지만 대규모 연극에서는 가면을 이용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가면은 손쉽게 일인다역을 가능하게 하며 실물보다 큰 가면은 대형극장에서 배우를 돋보이게 하기 때문이다. 로마의 배우들도 가면을 이어받았다. 가면은 로마의 마임이나 이탈리아의 코메디아 델라르테에서와 같이 인물의 유형화를 가져오기도 했다.

코메디아 델라르테(commedia dell'arte)
코메디아 델라르테(commedia dell'arte)

17세기 이후로는 프로시니움 무대의 발달과 양초나 오일 램프 같은 조명의 사용으로 분장술이 더욱 요구되었다. 배우들은 어슴푸레한 조명 아래에서 얼굴을 돋보이게 하려고 노력했으며, 당시 상류 여성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화장술을 사용하기도 했다. 18세기 들어 화장술이 더욱 발달했다. 배우들은 창백한 인상을 위해 납분을 바르고 입술에는 적색 황화수은을 사용했는데 모두 독성분이 있었다(→ 화장품).

가스등이 개발된 19세기에는 조명의 발달로 더욱 세밀한 화장술이 요구되었다. 당시 분장재료로는 흰색 분필, 목수용 파란 분필, 붉은색의 종이, 인도 잉크 등이 있었다. 어떤 배우들은 벽에 바르는 도료와 붉은 벽돌가루, 성냥재 같은 것을 사용하기도 했다. 19세기말에는 무대분장 재료가 상업화되었고 분장용 화장품이 제조되기도 했다.

20세기의 여러 아방가르드 연극은 분장과 그 의미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소극장운동으로 무대가 점점 관객과 가까워짐에 따라 짙은 분장은 어색하게 보이는 경우가 종종 생겼다. 차츰 배우들은 안료를 거부하고 자연스런 화장술을 받아들였다. 특히 영화나 텔레비전을 위한 화장술이 발달했는데 연극에도 곧 파급되었다. 가발을 고정시키는 방법이라든가, 노인분장 등 카메라가 접사된 상태에서도 어색하지 않은 섬세한 기술이 발전했다. 관객은 영화에서와 마찬가지로 연극무대에서도 자연스러운 분장을 요구했다. 그러나 1회성 분장으로 끝나는 영화에 비해서 연극은 매번 분장을 다시 해야 하기 때문에 엄청난 시간과 비용이 소요된다는 문제가 제기된다.

한편 분장 그 자체를 거부하는 움직임도 있는데 이는 특수분장 등으로 분장의 역할이 증대되는 추세와는 대조적이다. 리빙 시어터나 그로토프스키의 가난한 연극 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이들은 배우가 배역 뒤로 숨기보다는 스스로를 관중 앞에 나타내어 보다 직접적인 관계를 맺기 원하며, 분장의 도움 없이 스스로 배역으로 변신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이러한 다양화는 결국 분장이 전체적인 무대미술의 일부로 이해되고, 나아가서는 공연의 핵심개념과 연결되어야 한다는 오늘날의 분장개념을 천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오늘날에는 분장술이 더 이상 배우의 의무가 아니라 디자이너·감독·분장사 등의 전문영역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