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빙

어빙

다른 표기 언어 Sir Henry Irving 동의어 John Henry Brodribb, J. H. Irving
요약 테이블
출생 1838. 2. 6, 잉글랜드 서머싯 케인턴맨더빌
사망 1905. 10. 13, 요크셔 브래드퍼드
국적 영국

요약 영국의 대배우.
본명은 John Henry Brodribb.

어빙(Sir Henry Irving)
어빙(Sir Henry Irving)

1895년 연극에 대한 공로로 배우로서는 최초로 기사작위를 받았다.

또한 극장 매니저로도 유명했으며, 여배우 엘런 테리와 24년간(1878~1902) 연기생활을 함께 했다.

그의 아버지 새뮤얼 브로드리브는 지방 상점의 양복부에서 주문을 받는 세일즈맨이었고, 어머니 메리는 콘월 지방의 농가 출신이었다. 1842년 그의 아버지가 브리스틀에서 더 좋은 직장을 잡았으나, 습기가 많고 지저분한 도시에서 살면 아이의 건강이 나빠질까 염려한 부모들이 콘월에 있는 이모 세라 펜버시에게 어린 그를 보내기로 결심했다.

그뒤 6년간 그는 세인트아이브스 부근 할즈타운에 자리잡은 주석광산의 감독이었던 이모부 아이작과 이모 밑에서 자랐다. 어빙은 콘월에서 자란 덕분에 몸이 건강했다. 어머니가 한때 독실한 신자이기도 했던 콘월의 감리교회에서 그는 사람을 매료시키는 존 웨슬리식의 언어로 된 웅변을 처음 들었다. 1848년 이모부가 갑자기 죽자, 이모는 그를 더이상 데리고 있지 못하고 그당시 런던에 살고 있던 부모에게로 돌려보냈다. 그는 런던에서 핀처스 박사의 사립학교에 다녔다.

학교를 졸업하고 상점 점원으로 들어갔으나 그의 마음은 런던 극장의 연극과 배우에게 쏠려 있었으며, 여가를 온통 여기에 쏟았다.

1856년 삼촌 브로드리브에게서 물려받은 유산 100파운드를 가발·칼·의상과 같은 연극도구를 사는 데 투자했다. 또한 이 유산 덕분에 왕립 소호 극장에서 공연하는 아마추어 작품 〈로미오와 줄리엣 Romeo and Juliet〉에서 주연을 맡을 수 있었다. 그는 예명을 갖는 당시의 관습에 따라 어빙이라는 예명을 갖게 되었는데, 이는 워싱턴 어빙의 로맨스와 스코틀랜드의 전도사 에드워드 어빙의 복음설교에 영향을 받아 선택한 것이었다.

그의 연기가 호의적으로 받아들여지자 그는 자신에게 필요했던 용기를 얻게 되었다. 그는 점원을 그만두고 영국 북부 선덜랜드의 레퍼토리 극단에 들어가, 대사없는 단역 남자배우 역으로 출연하기 시작했다. 당시 영국 전역의 소도시를 순회공연하던 레퍼토리 극단이 배우가 되기를 갈망하는 젊은이에게는 유일한 연극학교였다. 그는 3년 동안 셰익스피어 작품 대부분을 포함해 모두 330편의 작품에서 400여 가지 배역을 맡았다.

10년 동안 이러한 견습배우 생활을 잉글랜드·스코틀랜드·아일랜드의 지방 소도시에서 계속했는데, 1866년 〈Hunted Down〉의 런던 공연으로 첫 성공을 거두었다. 이듬해 더블린 순회공연중 공중보건국 국장의 딸인 플로렌스 오캘러건을 소개받고, 1869년 7월에 결혼했다. 장기공연을 한 희극 〈장미꽃 두 송이 Two Roses〉에서 그가 주연을 맡는 동안 이 두 사람의 결혼은 제대로 유지되어 다음해 8월 첫아들 헨리 브로드리브를 얻게 되었다.

그러나 〈종 The Bells〉의 첫날 밤 공연 뒤에 있은 부부싸움으로 두 사람은 평생 별거상태로 살게 되었다. 이때가 둘째 아들 로렌스 시드니가 태어나기 1개월 전이었다.

미국인 흥행주 H. L. 베이트먼이 라이시엄 극장에서 공연한 〈종〉이 즉각 성공을 거두면서, 어빙은 당대 최고 배우로 떠올랐다. 양심의 가책으로 괴로워하는 미결수 살인범 매시어스 역은 그의 타고난 으스스하고 멜로드라마조의 분위기에 잘 어울렸으며, 이 작품은 죽을 때까지 그의 대표적인 레퍼토리가 되었다.

그는 베이트먼의 극단에서 4년 동안 스타로서 인기를 누렸으며, 1875년 베이트먼이 죽자 미망인이 경영하게 된 그 극단에서 1877년까지 연기활동을 계속했다. 어빙은 1878년부터 라이시엄 극장을 빌려서 경영하기 시작했으며, 그에게 순종적·헌신적인 극단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이 달성할 수 있는 최상의 것에 대한 강한 개인적 염원을 지니고 있었다. 세부적인 일에도 일일이 신경을 썼으며 무대장치와 의상에 돈을 아끼지 않았고, 영국에서 제일 가는 디자이너와 음악가를 고용했다.

빅토리아 시대의 대중들은 낭만적인 역사극 공연물이 자신들의 연극관을 만족시키자, 극장을 가득 메움으로써 그의 열성에 보답했다. 말투가 유별나고 버릇도 특이하며 문학적 지식이 의심스럽다는 혹평을 받았지만, 그는 이러한 혹평을 단지 자신의 웅대한 계획을 옹호하기 위한 유용한 수단으로 역이용했다. 매표소에서 팔리는 표의 숫자가 비평가의 목소리보다 높았으며, 그의 성공은 부자와 명사들의 찬사를 불러일으켰다. 공연이 끝나면 어빙은 라이시엄 극장에서 자신의 부담으로 화려한 만찬 파티를 열어 사교계 인사들의 인기를 끌었다.

1878년 그가 엘런 테리를 주연 여배우로 고용함으로써 영국 연극사에서 가장 유명한 동반자 관계가 시작되었다.

두 사람은 서로의 연극적 재능을 훌륭하게 보완해주었다. 어빙은 사색형의 내성적인 남자, 테리는 시원스럽고 충동적인 여자의 연기를 펼쳐 모든 사람을 매료시켰다. 햄릿과 오필리아, 샤일록과 포셔 역으로 함께 출연한 두 사람은 엄청난 관객을 끌어들였다. 1883년 그는 자신의 극단의 자랑인 무대 및 조명효과 장치를 동원하고 극단의 모든 배우와 기술자를 이끌고 미국 순회공연에 들어갔다.

미국에 도착하기도 전에 이미 그의 명성은 널리 알려져 있었으며, 극단은 겨울 공연에서 개가를 올렸다. 그뒤로 몇 년 동안 어빙과 라이시엄 극단은 흥행면에서 전성기를 누렸다. 새로 무대에 올리는 공연마다 지난 시즌에 벌어들인 이익금을 모두 들여서라도 호화로움과 정교함에서 다른 레퍼토리보다 훌륭하게 만들려고 했다. 젊은 평론가인 조지 버너드 가 지적했듯이 이들 공연 자체는 지속적인 문학적 장점을 갖추지는 못했다.

쇼는 엘런 테리와 같이 재능있는 여배우가 그토록 지루하고 시시한 작품에 시간을 낭비하는 것에 한탄했다. 쇼는 자신이 쓴 희곡 〈운명의 사나이 The Man of Destiny〉를 어빙과 테리가 공연하기를 원했으나, 어빙은 이 작품을 읽어보고 쇼에게 예약금을 준 뒤 그 일을 잊어버렸다. 그러자 쇼는 어빙이 자신의 작품을 공연하지 않는다고 그를 비난했다.

그러나 어빙이 준 예약금은 단지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젊은 작가에 대한 친절의 표시일 뿐이었다. 그뒤로 두 사람은 서로 적개심을 품게 되었다. 1895년 어빙이 빅토리아 여왕으로부터 기사작위를 받자 전국적으로 알려진 명사로서 어빙의 지위는 쇼에게는 더욱 구미가 당기는 목표물이 되었다. 동시에 쇼는 엘런 테리를 통해서 어빙에게 노르웨이의 극작가 헨리크 입센의 작품을 검토해보라고 부탁했다. 테리는 어빙에게 입센의 〈요한 가브리엘 보르크만 John Gabriel Borkman〉 중에서 두 막을 읽어주었다.

그러나 어빙은 겨우 "선충과 거머리는 연구하기에는 흥미있는 대상이지만, 나에게는 전혀 흥미가 없다"고 평했다. 어빙의 성공은 일정한 양식의 극적 매체를 통해 표현된 자신의 강한 연극적 현존 위에서 이루어졌다. 대중적 성공을 나타내는 모든 표시를 한 몸에 지녔던 그는 자신의 양식을 변화시킬 아무런 이유도 발견하지 못했다. 그가 생각하는 연극은 '배우의 연극'이었고, 그 안에서 극작가는 연기자의 시녀에 지나지 않았다. 쇼와 입센은 '작가의 연극'의 출현을 예시했는데, 여기서 배우는 극작가의 시각과 의도를 얼마나 충실하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평가된다.

1897년 어빙은 3차례 심한 타격을 받았다.

그의 아들 로렌스가 무대에 올린 표트르 대제에 관한 연극이 흥행에 참패했다. 더 심한 타격은 라이시엄 레퍼토리 가운데 많은 고전작품의 무대장치가 불에 타버린 것이었다. 보험 배상금은 불충분했으며, 자본 손실은 엄청났다. 이런 와중에서 1898년 어빙은 난생 처음으로 심하게 앓아누웠다. 극단은 그가 출연하지 않는 상태로 순회공연을 했고 당연히 흥행수입은 떨어졌다. 만년에 이른 어빙의 인생은 곧 라이시엄 극단의 활동을 지속시키려는 싸움이었다. 프랑스의 극작가 빅토리앙 사르두의 단테에 관한 작품과 셰익스피어의 〈코리올라누스 Coriolanus〉를 새로 무대에 올렸으나 극단의 쇠퇴를 저지하기는커녕 오히려 가속화시키는 결과만 낳았다.

미국 순회공연으로 지치기만 하고 이익을 남기지 못했다. 1902년 극단은 해체되었고, 어빙이 라이시엄에서 군림하던 시기도 막을 내렸다. 어빙은 1905년 10월 13일 브래드퍼드의 로열 극장에서 앨프레드 테니슨 경의 〈Becket〉을 공연한 뒤 68세에 무일푼으로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