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크 입센

헨리크 입센

다른 표기 언어 Henrik (Johan) Ibs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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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828. 3. 20, 노르웨이 시엔
사망 1906. 5. 23, 크리스티아니아
국적 노르웨이

요약 근대 사실주의 희극의 창시자이다. 대표작인 <인형의 집>은 중대한 스캔들을 불러일으킨 작품으로, 개인의 자유 및 표현 상실이 사회의 인습 때문임을 폭로했다. 1889년 런던에서 공연되어 ‘입센주의’(당대 도덕성에 대한 극형식의 비판)를 둘러싼 격론의 시발점이 되었고, 1890년대 문학논쟁의 중요한 핵심이 되었다.
부유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집안의 파산으로 불우한 성장기를 보냈다. 1850년에 첫 희곡 <카틸리나>를 썼다. 1851~57년 노르웨이 극단에서 145편 이상의 희곡 제작에 참여했다. 극심한 생활고로 인해 1864년 고국을 떠나 27년간 해외에서 살았다. 1866년 출판된 <브란>의 성공 이후, <페르 귄트>·<인형의 집>·<유령> 등 화제작을 잇달아 발표했다. 1891년 노르웨이로 돌아와 크리스티아니아에 정착했다. 1900년 뇌일혈로 쓰러지고, 1년 후 또 한번의 발작을 일으킨 뒤 1906년에 죽었다.

목차

접기
  1. 개요
  2. 초기생애
  3. 노르웨이 극단과의 결합
  4. 원숙기의 극작
  5. 만년
  6. 평가
입센 (Henrik Johan Ibsen)
입센 (Henrik Johan Ibsen)

개요

근대 사실주의 희극의 창시자이다.

주요작품으로는 〈페르 귄트 Peer Gynt〉(1867)·〈인형의 집 Et dukkehjem〉(1879)·〈유령 Gengangere〉(1881)·〈헤다 가블러 Hedda Gabler〉(1890) 등이 있다.

초기생애

부유한 상인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1881년에 쓴 미완성 자전적 단편에서 입센은 그가 소년이었을 때 창문에서 본 것이라고는 "건물뿐, 초록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라고 묘사했다. 특히 기억나는 것은 교회, 죄인의 목과 손목을 끼워넣는 형틀, 감옥, 정신병원이며, 온종일 여러 제재소에서 들리는 여인들의 흐느낌·탄식·비명 소리가 천지를 진동시켰다고 말했다. 1830년대 중반 아버지가 파산하여 벤스퇴프 근교로 이사했고, 거기서 8년간 살았다. 이렇게 친숙했던 환경에서 멀어졌고, 또 그에 따른 치욕감 때문에 일찍부터 내성적이던 입센은 백일몽과 독서, 인형극 놀이에서 위안을 찾게 되었다.

이 소년시절의 인상과 추억들이 후기 희곡들에 많이 배어 있는데, 시엔은 〈청년동맹 De unges forbund〉(1869)의 배경이 된 소도시이고, 벤스퇴프의 다락은 〈들오리 Vildanden〉(1884)에서 등장한 에크달의 다락으로 추측되며, 가족들이 종종 작품 인물의 모델로 등장한다.

입센의 일생은 '가정'(유년시절의 가정·고향·고국)으로부터 점점 분리·소외되어가는 모습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15세에 그는 해방감과 탈출의 감정을 가지고 시엔을 떠났으며, 20년 또는 더 이후에 외국에서 살기 위해 노르웨이를 떠났을 때도 똑같은 감정이 복받쳤다. 70세에 이른 노인이 되어 노르웨이에 돌아온 즈음 친구에게, "여기 피요르드까지 다 나의 고국인데……. 내 고향땅은 어디서 찾아야 할지?"라고 써보냈을 정도였다. 1844년 나중에 〈사회의 기둥 Samfundets Støtter〉(1877)의 배경이 되는 그림 스타로 가서 약국의 견습생이 되었다.

18세에 그가 살던 집의 하녀들 가운데 10세나 연상인 하녀에게서 사생아를 얻었고 14년간 아들을 부양하지만, 이 사건은 그의 일생에서 비교적 어두운 비밀 가운데 하나로 남아 있다. 남은 시간은 대학입학 자격시험을 준비하고 글을 쓰는 데 할애했다. 첫 희곡 〈카틸리나 Catilina〉(1850)는 1848년 유럽 전역을 휩쓴 혁명에서 일부 영감을 얻었고, 일부는 시험과목으로 지정된 라틴어 교과서에서 영감을 얻은 작품이다.

이 희곡이 출판되었을 때는 거의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키지 않았으나 1875년 재판이 발간되었을 때 서문에다가, 그가 다루려던 주제는 늘 '능력·포부, 의지·가능성의 불일치, 인류·개인의 비극이자 희극'으로 되돌아간다고 밝히자 상황은 달라졌다. 1850년 4월 그는 수도 크리스티아니아로 이사했는데, 가는 도중 시엔에 들러 가족과 마지막 작별인사를 했다.

크리스티아니아에서의 18개월 동안은 상당히 검소하게 살았으며, 예비학교에서 공부했지만 8월에 치른 시험에서 전과목을 합격하지 못했고, 대수·그리스어와 라틴어 구두시험에서 낙방해 평생 대학입학 자격을 취득하지 못했다. 여러 방법으로 대학생활에 참여했는데, 특히 〈안드림너 Andhrimner〉라는 잡지에 기고하고 편집 일을 도왔다. 1850년 9월 26일 입센의 희곡이 처음으로 공연되었다. 역사극 〈전사의 무덤 Kjaempehøjen〉은 양식면에서 강한 민족주의를 드러낸 작품이었는데 성공을 거두지 못했고, 이후 해가 바뀌기 전까지 신문·잡지 등에 기고하며 근근이 생계비를 벌었다.

노르웨이 극단과의 결합

1851년 베르겐에서 창단된 지 얼마 안 되는 노르웨이 극단측이 그에게 '연출가'로 일해달라고 제안했다.

조건으로 극단창립기념일인 1월 2일에 상연할 수 있도록 1년 동안 새로운 1편의 희곡을 써내는 것이었다. 그는 희곡 제작에 거의 언제나 직접 참여했지만, 훌륭한 연출가가 되기에는 기질상 매우 내성적이었다. 당대의 사람들은 그를 조용하고 과묵하며 내성적인 청년으로, 특별히 호감을 주지도 않았고, 배우들을 나무라거나 잘못을 수정해줄 때조차 매우 당황해 하기도 했다고 묘사했다. 누구와도 가깝고 친밀하고 허물 없는 관계를 맺는 데 어려워하고 주저하며 홀로 걷는 것을 더 좋아하는 사람으로, 그가 그 유별나고 볼품 없는 초라한 외투를 입고 무대 뒤에서 '느릿느릿 걸어다닐 때'는 존경을 받았지만, 동료의식을 불러일으키지는 못했다.

나중에 입센은 이 극단에서의 생활을 '실패의 나날'이라고 묘사했다. 그렇지만 이 초년기의 경험은, 1852년 덴마크와 독일의 연극계를 견학하기 위한 여행까지 포함하여 나중에 그의 글을 풍요롭게 하는 데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이 기간 동안 145편 이상의 각기 다른 희곡들을 제작하는 데 참여했다. 1851~57년 그 자신의 희곡 5편이 베르겐에서 공연되었지만 일부는 참혹하게 실패했으며, 뛰어난 성공을 거둔 것은 단 1편도 없었다.

1856년 수잔나 토레센과 약혼했지만 결혼에 이르기까지는 2년이 더 필요했다. 1859년 12월 23일 그들의 외아들 시구르가 태어났다.

1857년 9월 크리스티아니아로 돌아가 노르웨이 극장의 미술감독이 되었다. 이 극장은 재정적으로 견실하지 못해 소극(笑劇)과 보드빌을 레퍼토리 안에 많이 넣어야 했고, 이런 실정은 야심적인 예술가가 활동할 여지를 별로 주지 못했다. 1862년 결국 극장이 파산하자 입센은 또다른 극장인 크리스티아니아 극장의 문학고문이라는 최저의 급료를 받는 임시직을 찾았다.

이러한 실망의 상태에 설상가상으로 산더미 같은 부채, 불경기, 대중의 무관심, 적대감에 이르기까지 수없이 많은 좌절감이 그를 극단적인 절망으로 이끌었다. 1857~64년 크리스티아니아에서 완성한 3편의 희곡 〈헬겔란의 바이킹 Haermaendene paa Helgeland〉(1858)·〈사랑의 희극 Kjaerlighedens komedie〉(1862)·〈왕위를 노리는 자들 Kongsemnerne〉(1863) 등은 모두 전에 썼던 희곡보다 더 높은 수준의 작품이었지만, 1863년 소액의 국가보조금을 지급받자 가능한 대로 채무의 일부를 갚고 1864년 4월 고국을 떠나 이탈리아로 갔다. 그로부터 27년간 그는 해외에서 살았는데 주로 로마·드레스덴·뮌헨에 있었으며, 그동안 단 2번(1874, 1885), 잠시 노르웨이를 방문했다.

원숙기의 극작

그후 몇 년 간 그는 비약적인 활약을 보였다.

서사시로 구성했다가 나중에 운문극으로 바꾸어 쓴 〈브란 Brand〉(1866 초연)이 1865년 여름 로마 근교에서 완성되어 이듬해 코펜하겐에서 출판되었는데, 이 작품은 스칸디나비아에서 즉시 예술적·상업적으로 성공했다. 이후 그는 우아한 새 옷을 입고, 수염을 새로운 스타일로 깎고, 새삼 위엄있는 태도를 취하고, 필체마저도 담담해짐으로써 로마의 친구들을 놀라게 했다. 〈브란〉에 이어 〈페르 귄트〉(1867 초연)가 나왔는데, 어떤 의미에서 이 2편의 희곡은 그가 느낀 노르웨이인의 편협한 생활과 자기만족적인 성격에 방향을 맞춘 문제작이다.

그는 거의 4년간 로마에서 지낸 후 1868년 드레스덴으로 거처를 옮겨 1875년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1871년 〈시집 Digte〉을 출판한 다음, 계속해서 10막으로 된 거대한 이중극 〈황제와 갈릴리인 Kejser og Galilaeer〉(1873)을 완성했다. 1896년 초연된 이 작품은 배교자 줄리안의 일생에 바탕을 둔 극으로 이교와 그리스도교 사이에서 갈등을 겪으면서, 정열과 영혼 사이의 틈을 이어줄 수 있는 '제3지대'라는 개념을 제안한다.

이 작품은 일반적으로 입센의 극 가운데 가장 빈약한 것 중 하나로 간주되나 그 자신은 가장 큰 업적으로 간주한 듯이 보인다. 1875년 뮌헨으로 이사하지만 1878년 늦가을 로마로 돌아와 1879~80년 잠시 뮌헨에 체류한 것을 제외하면 1885년까지 로마에서 살았다. 1885~91년에는 다시 뮌헨에서 지냈다. 〈사회의 기둥〉은 시(詩)의 시대를 마감하고,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듯이 사회풍자로 나아간 첫 작품이다.

바로 이 희곡으로 그는 독일에서 널리 명성을 얻었고, 초판이 출판된 후 2개월 만인 1878년 2월에 다른 3가지 언어로 번역되어 베를린의 5개 극장에서 상연되었다. 뒤이어 출판된 〈인형의 집〉은 중대한 스캔들을 불러일으킨 작품이었다. 이 작품에서 입센은 고의는 아니지만 어떻게 남편이 아내의 지적·경제적 예속을 초래하는지를 관찰함으로써 개인의 자유 및 표현상실이 그의 신조처럼 사회의 인습 때문임을 폭로한다. 1889년 런던에서 공연된 〈인형의 집〉은 '입센주의'를 둘러싼 격론의 시발점이었고, 1890년대 문학논쟁의 중요한 핵심이 되었다.

〈유령〉은 작가의 말에 의하면 앞의 두 작품보다 더 '극단적'인 작품이다.

앞의 두 작품은 이 작품을 위한 소개 또는 준비단계에 지나지 않는다. 이 작품은 베를린의 자유무대(1889), 파리의 자유극장(1877), 런던의 독립극장(1891)과 같은 유럽 '독립'극장의 창설과 연결되어 개막극으로 선택되었다. 이 희곡은 과거로부터 내려오면서 살아 있는 사람들을 죽이는 도덕적인 질병의 상징으로 선천적인 성병의 문제를 이용한다. 1891년 런던 언론계 대부분의 신랄한 비평에 비한다면 온건한 편이나, 노르웨이 대중과 비평가들이 이 극에 가한 적대적인 반응은 입센이 다음에 쓴 3편의 희곡 〈민중의 적 En Folkefiende〉(1882)·〈들오리〉·〈로스메르스홀름 Rosmersholm〉(1886)에 영감을 주었다고 볼 수 있다.

이 작품 모두 용감히 진리를 말하는 사람들, 말하지 못하는 사람들, 또는 말하기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의 다양한 운명을 다루고 있다.

만년

1891년 노르웨이로 돌아가기 전 입센은 해마다 여름이면 집에서 멀리 떨어져 지내는 습관이 있었다.

보통 즐겨 찾았던 곳은 티롤의 고젠자스였다. 1889년 그곳에서 뮌헨 출신의 젊은 헬레네 라프를 만나게 되는데, 그녀가 입센의 집에 자주 드나들게 되자 그의 부인과 에밀리에 바르다흐가 질투어린 짜증을 보이게 되었다. 에밀리에는 18세 된 빈의 소녀로, 입센은 나중에 그녀를 그의 '9월의 생에 비친 5월의 태양'이라고 묘사했다. 더 젊고 친절한 여인들과의 이런 관계가 입센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에 대해 정확히 정의내리기 어렵지만, 그의 가장 위대한 희곡 가운데 하나인 〈헤다 가블러〉·〈건축가 솔네스 Bygmester Solness〉(1892)에 그 흔적을 남겼다.

1891년 이제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작가가 된 입센은 노르웨이로 돌아와 크리스티아니아에 거처를 정했다. 이후 그와 가장 가까이 지낸 사람은 그의 친구 힐드루 안데르센의 딸인 듯하다. 그녀는 피아니스트가 되기 위해 공부하고 있었고, 입센이 그의 문학계획을 가장 자유롭게 토론할 수 있었던 사람으로 보인다. 1892년 10월 11일 입센의 아들은 베르글리오트 비외른손과 결혼했다. 그녀는 당대의 또다른 노르웨이의 위대한 사실주의 시인·극작가인 비외른스톄르네 비외른손의 딸이었다.

이 작가에 대한 입센의 태도는 거의 40년 동안 찬사·질투·경멸·애정이 뒤섞인 것이었고, 두 젊은이가 결혼할 때 입센은 병을 구실로 결혼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만년의 극은 〈바다에서 온 부인 Fruen fra havet〉(1888)부터 작품의 중심점이 점차 뚜렷하게 이행되어 간다. 〈헤다 가블러〉·〈건축가 솔네스〉·〈꼬마 에위올프 Lille Eyolf〉(1894)·〈요한 가브리엘 보르크만 John Gabriel Borkman〉(1896) 등은 특히 사회적·도덕적 문제의식이 강한 희곡에서 벗어나 보다 심리적·환상적·상징적 희곡으로 발전해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작가가 '극적 에필로그'라고 부제를 붙인 〈우리 죽은 자들이 깨어날 때 Naar vi døde vaagner〉(1899)는 루베크라는 인물에다 가차 없는 최종적인 자기분석을 덧붙인 극으로, 이로써 입센의 창작활동은 끝나게 된다. 1900년 뇌일혈로 쓰러지고, 1년 후 또 한번의 발작으로 그는 거의 구제불능상태로 있다가 1906년 크리스티아니아에서 죽었다. 입센은 아주 세심한 예술가였다. 만년에는 보통 2년에 희곡 1편씩을 집필했고, 초고를 반복하여 수정하면서 최종 형태에 이르는 식으로 작업했다.

이 초고들은 아직도 많이 남아 있는데, 작품들의 창작과정을 흥미진진하게 말해줄 뿐만 아니라 극작의 본질이 독특한 방법으로 해명되었다고 볼 수 있다.

평가

생전에 입센은 G.B.쇼가 말한 '입센주의'(당대 도덕성에 대한 극형식의 비판)의 효시라는 예우를 받았지만(어떤 진영에서는 비난받았음), 무엇보다도 근대 사실주의 산문극의 창시자로 인정받았다.

그러나 그의 작품이 또다른 평가를 받게 된 것은 최근의 일이다. 탁월한 기법의 구사력, 심리학적 통찰력, 상징주의, 극적 산문이 지닌 음울한 시성 등을 비평계는 주목하게 되었다. 만년의 극들은 논란의 여지가 더 많았는데, 현실과 환상의 본질을 파헤치고 개인과 사회 안에서 무엇이 참이고 무엇이 거짓인가를 탐구하면서 산문극 일반의 발전·육성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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