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스

존스

다른 표기 언어 Inigo Jones 동의어 이니고 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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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573. 7. 19, 런던에서 세례받음
사망 1652. 6. 21, 런던
국적 영국

요약 영국의 화가·건축가·디자이너.

이니고 존스 (Inigo Jones)
이니고 존스 (Inigo Jones)

영국의 고전적인 건축 전통을 수립했으며, 1937년부터 국립해양박물관의 일부가 된 그리니치 여왕전과, 최고의 걸작으로 꼽는 화이트홀가(街)의 연회장(1619~22) 등을 지었다.

또하나 현존하는 그의 왕실 건축물은 세인트제임스 궁전(1623~27) 여왕의 예배소이다.

존스는 역시 이니고라고 불렸던 직물공의 아들이었다. 초기생애에 관한 기록은 별로 없으나 아마도 가구장이의 도제살이를 했던 것 같다. 1603년경에는 이탈리아를 방문해 오랫동안 머무르면서 회화와 설계술을 익혔고 덴마크 왕 크리스티안 4세의 후원을 받으며 왕의 궁정에서 잠시 일한 뒤 영국으로 돌아왔다.

그러자 영국에서는 그가 '그림장이'(화가)라는 소문이 돌았다. 크리스티안 4세의 누이인 은 잉글랜드 왕 제임스 1세의 왕비였는데 이런 연줄로 1605년 왕비는 그를 가면극의 배경 및 복장 디자이너로 고용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이를 시작으로 그는 왕비를 위해, 그리고 나중에는 왕을 위해 오랫동안 여러 가면극을 준비하게 되었다. 대본은 주로 벤 존슨이 썼으며 배경·의상·효과는 거의 언제나 존스가 맡았다.

그가 1605~41년에 25편의 가면극과 1편의 목가극, 2편의 연극을 준비하며 그린 드로잉 450여 점이 더비셔 주 채츠워스 저택에 남아 있다.

1605~10년에는 스스로 왕비의 비호를 가장 많이 받는 사람이라고 여겼던 듯하며 한편으로는 솔즈베리 백작의 후원도 받고 있었다. 그는 백작을 위해 초반기 건축작품으로 알려진 스트랜드의 새 증권거래소(1608경 건립, 18세기에 헐림)를 설계했는데 이 건물은 다소 미숙한 점이 있지만 그 시대 영국에 지어진 그 어떤 작품보다도 세련된 것이었다.

낡은 세인트폴 대성당의 복원과 개량을 위한 일부 설계안들(후에 대체됨)도 이무렵에 작성한 것이다. 1610년 그는 장차 생애의 방향을 결정지어줄 지위를 얻었다. 왕위를 계승할 웨일스 공(公) 헨리의 공사감독관이 된 것이다. 이 자리는 전도유망한 직책이었으나 얼마 가지 않아 1612년 왕세자의 죽음과 함께 없어졌고 그때까지 이룬 일도 거의 없었다. 그러나 1613년 왕의 공사감독관이었던 사이먼 배질이 죽자 한층 높은 이 지위를 보장받아 1615년에 이 자리에 올랐다.

한편 애런들 백작 2세인 토머스 하워드의 제안을 받아들여 이탈리아를 다시 방문할 기회를 얻었다. 애런들과 존스를 포함한 일행은 1613년 4월 영국을 떠나 이탈리아로 향했고 로마에서 1613~14년 겨울을 보냈다. 이때 존스는 고대 유적뿐만 아니라 당시 거장들의 작품을 연구할 기회를 가졌다. 그가 가장 중요하게 여긴 거장은 이탈리아의 건축가 안드레아 팔라디오(1508~80)였다. 팔라디오는 〈건축사서(建築四書) Quattro libri dell'architettura〉라는 저서를 통해 폭넓게 영향력을 미쳤는데, 존스도 여행에서 이 책을 가져왔다.

1614년 가을 영국으로 돌아왔을 때 그는 이미 고전건축가로서 독학을 끝낸 상태였다.

존스는 제임스 1세찰스 1세의 공사감독관으로서 1615~42년에 재직하면서 이 28년의 대부분을 왕실 저택의 건축과 개축·개량 등의 일에 바쳤다. 최초로 이룩한 중요 작품인 런던 근교 그리니치의 여왕전은 피렌체 근처 메디치가(家) 별장인 포조 아 카이아노를 일부 모방한 것이었으나 세부 양식은 팔라디오나 빈센초 스카모치(1552~1616)에 더 가깝다.

이 작품은 1619년 앤 왕비의 죽음으로 중단되었다가 1635년 찰스의 왕비인 헨리에타 마리아를 위해 겨우 완성되었다. 이 건물은 상당한 개조를 거쳐 지금은 국립해양박물관으로 쓰인다. 1619년 화이트홀가의 연회장이 불에 타 소실되었다. 존스는 1619~22년에 이를 재건해 최고의 걸작이라 평가받는 건물로 바꾸어 놓았다.

이 연회장은 볼트 천장이 있는 지하실 위에 세운 하나의 거대한 방으로, 건물 내부는 비트루비우스가 제시한 형태를 따른 바실리카처럼 지어졌으나 아일(側廊)이 없으며 벽에 붙인 중첩된 기둥이 평평한 보로 된 천장을 받치고 있다. 이 천장의 중심판에는 찰스 1세의 위촉을 받은 루벤스가 그려 1635년 끼워놓은 우화적인 그림들이 있다. 건물 외부는 내부 배치를 그대로 반영해 거칠게 마감한 석조벽에 벽기둥과 직4각형 기둥들을 세웠다.

연회장은 2개의 정면만 완성되었고, 나머지는 완성되지 못했다. 이 사실은 건물을 더 큰 전체의 일부로 설계한 것이라는 추측을 불러일으킨다. 이 추측이 맞을 수도 있는데, 연회장이 지어진 지 20년쯤 뒤에 찰스 1세가 존스에게 화이트홀 궁전 전체를 개축하도록 설계를 준비하라고 지시했기 때문이다. 이 설계안은 옥스퍼드의 우스터 칼리지와 채츠워스 저택에 보관되어 있으며 그의 작품 중 가장 흥미로운 창작물에 속한다.

화이트홀 궁전 (Whitehall Palace)
화이트홀 궁전 (Whitehall Palace)

형식은 마드리드 근처에 있는 에스코리알 궁전과 비슷한 점이 있으나 부분적으로는 팔라디오와 스카모치로부터, 또 존스가 직접 연구한 고전건축에서 얻은 건축 표현기법을 구사했다.

존스는 왕궁만 설계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런던 시내의 건물 법규에 깊이 관여했고 이를 통해 1630년에는 코번트 가든에 있는 베드퍼드 4대 백작의 영지에 조성할 계획안을 마련했다. 이 계획안에 따르면 북쪽에 드넓은 개방공간이 있고 동쪽에는 아케이드로 된 주택들, 남쪽에는 베드퍼드 백작의 정원 담장, 서쪽에는 양쪽으로 2채의 단독주택에 연결되는 출입로를 낸 교회가 있다.

이 설계는 이탈리아 리보르노의 광장과 파리에 있는 루아얄 광장(지금의 보주 광장) 형식을 일부 따온 것으로 생각된다. 그때의 주택들은 현존하지 않으나 세인트폴 교회는 많이 바뀌긴 했어도 아직 남아 있다. 이 교회의 포티코는 당시 유럽에서는 독특하게도 초기 토스카나식 오더를 채택한 예를 보여준다. 코번트 가든에서와 마찬가지로 존스는 정형적인 런던 도시계획, 즉 최초의 런던 '광장'을 도입했다.

1638년부터 링컨스인필즈가의 주택배치를 계획하면서 또 하나의 광장을 만드는 데 참여한 것 같으며, 그곳의 린지 저택(링컨스인필즈가 59, 60번지에 현존함)은 그의 작품으로 여겨진다.

그가 공직 후반기에 맡은 가장 중요한 일은 1634~42년의 세인트폴 대성당 복원 작업이었다. 이 공사를 통해 14세기에 지었던 성가대석 부분을 보수했을 뿐만 아니라 거칠게 다듬은 돌로 로마네스크식 네이브(身廊)와 트랜셉트(翼廊) 전체를 다시 씌우고 새로 서쪽 정면을 만들며 10개의 기둥이 있는 높이 17m의 포티코를 만들었다.

이 포티코는 존스의 최고 야심작이자 치밀하게 계산된 작품으로 꼽혔으나 불행히도 1666년 런던 대화재 이후 성당이 재건되면서 사라졌다. 그러나 세인트폴 대성당에서 그가 이룬 성과는 크리스토퍼 경에게 상당한 영향을 주어 렌이 이 대성당 재건을 위해 초기에 만든 설계안과 몇몇 도시 교회에도 반영되었다.

1642년 영국내란(청교도혁명)이 일어나자 공사감독관직을 물러나 런던을 떠나야 했다.

1645년 베이징 저택이 포위되면서 붙잡힌 그는 일시적으로 영지를 몰수당하고 무거운 벌금형을 받았으나 이듬해에 상원에서 사면이 확정되었으며 영지도 반환받았다. 찰스 1세가 처형당한 1649년에 그는 펨브로크 백작을 위해 윌턴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곳에 있는 정6면체를 2개 겹친 모양의 기다란 방은 대부분 제자인 존 웨브의 작품으로 보인다. 웨브는 존스가 훈련시킨 제자로 1660년 왕정복고 후에 존스의 전통을 어느 정도 되살렸다.

존스의 유해는 런던 폴스훠프의 세인트버닛 교회 내 그의 부모 묘지 곁에 묻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