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니 디드로

드니 디드로

다른 표기 언어 Denis Diderot 동의어 Pantophile Diderot
요약 테이블
출생 1713. 10. 5, 프랑스 랑그르
사망 1784. 7. 31, 파리
국적 프랑스

요약 1745~72년 계몽주의 시대의 주요저작물인 〈백과전서〉의 편집장을 맡았다. 1745년 출판인 앙드레 르 브르통은 이프레임 체임버스의 〈사이클로피디아〉의 프랑스판을 출판하려는 생각으로 드니 디드로에게 제안했다. 디드로는 〈백과전서〉는 '합리적 사전'으로서 모든 학문과 예술의 본질적 원리와 응용을 뚜렷이 드러내고 있으며, 그 바탕에 있는 철학은 합리주의와 인간정신의 진보에 관한 믿음이 존재함을 간파하고, 학자와 성직자까지 모아 이일을 진행했다. 디드로는 <백과전서>외에도 언어와 미학에 관심이 있었고, 수필도 발표했다.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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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요
  2. 청년시절과 결혼
  3. 원숙기
  4. 백과전서 작업(백과사전)
  5. 철학과 과학 저술
  6. 수필·소설·희곡
  7. 말년과 저서
드니 디드로(Denis Diderot)
드니 디드로(Denis Diderot)

개요

드니 디드로는 1745~72년 계몽주의 시대의 주요저작물인 〈백과전서 L'Encyclopédie〉의 편집장을 맡았다.

청년시절과 결혼

아버지는 널리 존경받은 도공(刀工)이었고 드니 디드로는 만년에야 아버지의 예술적인 능력을 인정했다.

실제로 교회에 소속되어 활동하지는 않았지만 1726년 출가(出家)하여 처음에는 랑그르 예수회에서 교육받았다. 1729~32년 파리의 콜레주 다르쿠르와 리세 루이르그랑 가운데 어느 한 곳이나 양쪽 모두에서 공부한 듯하며 1732년 9월 2일 파리대학교에서 문학석사학위를 받았다. 그뒤 클레망 드 리의 사무실에서 실무 수습생으로 법률을 공부했으나 언어·문학·철학·고등수학에 더 큰 관심을 가졌다. 1734~44년의 드니 디드로의 생애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드니 디드로는 연극을 해보려는 초창기의 꿈을 버리고 생계를 위해 교사나 출판보조인으로 일하며 곤궁하게 살았으며, 1편 당 50에퀴(écu)를 받고 선교용 설교문을 쓰기도 했다. 한때 성직자가 되려고 했으나 신학교에 들어간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디드로의 저작을 보면 그가 종교적 위기를 겪고 아주 서서히 가톨릭교에서 이신론(理神論)과 무신론으로 돌아섰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혼란스러운 삶은 유고(遺稿)로 출판된 소설 〈라모의 조카 Le Neveu de Rameau〉에서도 분명히 드러난다. 레장스·프로코프 등의 카페에 자주 들렀으며, 그곳에서 1741년 철학자 장 자크 루소를 만나 말다툼으로 절교할 때까지 15년동안 친구로 지냈다.

1741년 직물상의 딸 앙투아네트 샹피옹을 만났으며, 1743년 11월 6일 아버지의 반대로 비밀리에 결혼했다.

지금도 남아 있는 편지는 두 사람의 관계가 낭만적 사랑으로 이루어졌음을 보여주지만 결혼생활은 관심의 차이에서 오는 갈등으로 행복하지 못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3명의 자식 중에서 유일한 생존자인 딸 안젤리크를 사랑했기 때문에 그들의 관계를 어느 정도 유지했다. 안젤리크는 1753년에 태어나 랑그르의 상류계층인 알베르 드 방될과 결혼했다. 드니 디드로는 딸의 교육에 열성적이었고 그녀는 나중에 아버지의 삶에 관한 짧은 글을 쓰고 그의 원고도 정리했다.

귀족적인 볼테르, 평민적인 루소와는 달리 드니 디드로의 가족생활에서는 부르주아의 건실함을 찾아볼 수 있다(디드로는 항상 딸에게 일어나는 일에 관심을 쏟았고, 여동생 드니에게도 깊은 애정을 보임).

원숙기

생계를 위해 번역일을 하면서 드니 디드로는 1745년 샤프츠버리 백작 3세의 〈덕에 관한 연구 Inquiry concerning Virtue〉를 번안·출판하여 백작의 명성과 영향력을 프랑스에 퍼뜨렸다.

드니 디드로의 〈철학적 사색 Pensées philosophiques〉(1746)은 새롭고 폭발적인 반(反)그리스도교 사상을 담고 있는 독창적 작품으로, 샤프츠버리의 것을 그대로 옮기거나 그에게서 영감을 받은 많은 문구가 들어 있고 생동감 넘치는 산문체로 표현되어 있다. 외설소설로 전해지는 〈무례한 아이들 Les Bijoux indiscrets〉 등의 출판으로 얻은 수입은 정부 마들렌 드 퓌죄의 요구를 채우는 데 쓰였다. 그러나 몇 년 뒤 디드로가 뱅센에서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 두 사람의 관계는 끊어지고 말았다.

1755년 드니 디드로는 소피 볼랑을 만나 서로의 공동 관심, 자연스런 공감, 깊은 우정을 바탕으로 20년이 넘게 애정을 나누었다. 소피와 나눈 편지들에는 디드로의 인격·정열·사상이 나타나 있고, 격의없이 지낸 루이 데피네, F.M. 그림, 올바크 남작, 페르디난도 갈리아니, 그밖의 이신론 저술가와 사상가(계몽주의 철학자) 등 지적 동료에 관한 흥미진진한 기록이 들어 있다. 루소를 통해 디드로는 철학자 콩디야크를 만났고 세 사람은 한때 파니에 플뢰리에서 함께 저녁을 먹곤 했다.

사생활에서 드니 디드로는 도덕가치를 확립하는 바탕이 되는 우정을 소중히 여겼으며 자신의 이러한 생각을 단편소설 〈부르본의 두 친구 Les Deux Amis de Bourbonne〉에 썼다. 독일의 작가 괴테와 실러는 이 책, 특히 그 결론부분인 '이것은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다'에 관심을 보였다.

백과전서 작업(백과사전)

1745년 출판인 앙드레 르 브르통은 이프레임 체임버스의 〈사이클로피디아 Cyclopaedia〉의 프랑스판을 출판하려는 생각으로 드니 디드로에게 접근했다.

이때는 이미 2명의 번역가가 손을 들고 물러난 뒤였다. 드니 디드로는 뛰어난 수학자 장 르 롱 달랑베르와 공동편집을 맡아 수록영역을 넓히고 급진적이고 혁명적인 견해를 담음으로써 책의 성격을 근본적으로 바꾸었다. 디드로는 헌신적인 문학가와 과학자, 심지어 성직자를 모아 같이 일했으며 이들은 당시에는 알려져 있지 않았으나 만년에는 명성을 얻었다.

이들은 모두 지식을 발전시켜 교회와 정부에 둥지를 틀고 있는 반동세력을 완전히 무너뜨리려는 공동의 열망으로 불타고 있었다. 〈백과전서〉는 '합리적 사전'(dictionnaire raisonné)으로서 모든 학문과 예술의 본질적 원리와 응용을 뚜렷이 드러내고 있으며, 그 바탕에 있는 철학은 합리주의와 인간정신의 진보에 관한 믿음이었다. 1749년 드니 디드로는 촉각을 사용하여 장님의 읽기교육을 제안하는 유명한 〈장님에 관한 편지 Lettre sur les aveugles〉를 출판했다.

이런 제안은 다음 세기에 루이 브라유가 더욱 발전시켰다. 또 적자생존 진화론의 초기 단계를 보여주는 이 책에서, 드니 디드로는 인간이 감각인상에 의존함을 강조하고 유물론적 무신론을 대담하게 주장했기 때문에 3개월 동안 뱅센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그러나 〈백과전서〉 작업은 오래지 않아 재개되어 1750년 〈취지문 Prospectus〉을 출판했고 달랑베르는 이 책을 기념비적 작품인 〈예비적 논의 Discours préliminaire〉(1751)로 확대시켰다.

1751년 첫권의 출판에서 1772년 마지막 권의 배포에 이르는 〈백과전서〉의 역사는 파란만장했지만 결국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1758년 7권을 출판할 때 1차례 고비가 있었다. 이때 달랑베르는 자신이 쓴 항목 〈주네브 Genève〉에 문제가 있다는 경고를 듣고 루소의 논박을 읽은 뒤 사임했다.

또 파리 의회가 〈백과전서〉의 요약판으로 불리는 엘베시우스의 〈정신론 De l'esprit〉을 소각하기로 결정했을 때는 〈백과전서〉 자체가 발행금지당하는 심각한 위기에 직면했다. 드니 디드로는 프랑스 밖에서 출판을 계속하자는 볼테르의 요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끈질기게 파리에 머물렀다. 그러나 디드로는 1764년 르 브르통이 10장 분량의 교정쇄에서 문제의 소지가 있는 내용들을 몰래 없앴음을 알고 낙망했다.

상당한 관심을 끌었지만 이때 삭제된 문구들이 〈백과전서〉의 내용에 영향을 미친 것 같지는 않다. 드니 디드로는 17권의 원문과 도판에 철학사('절충주의')·미학('미')·기계기술 등에 관한 항목을 수없이 집필했다. 이 항목들 중에는 디드로가 독창적으로 쓴 것도 있고 여러 원전을 참고하여 쓴 것도 있다. 디드로는 정열적인 편집장으로, 역사가들이 오늘날에도 높이 평가하는 뛰어난 질의 3,000~4,000개의 도판을 감독했다.

마침내 〈백과전서〉가 완성되자 드니 디드로의 수입원도 없어졌다. 재정적 근심을 덜어주기 위해서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대제(大帝)는 파리에서 대리인을 통해 디드로의 책을 사면서 자기가 필요할 때까지 보관해달라고 부탁했고, 그후 그를 사서로 임명하여 일생 동안 연봉을 주었다. 1773년 디드로는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가서 그녀에게 감사의 뜻을 전했고 따뜻한 환대를 받았다.

드니 디드로는 그녀를 위해 〈러시아 정부를 위한 대학 계획 Plan d'une université pour le gouvernement de Russie〉을 썼다. 그러나 5개월 동안 머물면서 사회악의 해결책으로서의 계몽적 전제주의에 환멸을 느끼게 되었고, 〈황제원이 신하에게 주는 가르침에 관하여 Observations sur les instructions de Sa Majesté Impériale aux députés〉에서 볼 수 있듯이 디드로의 정치사상은 더욱 견고해졌다.

작가이자 선전가 기욤 레날의 〈두 인도의 역사 Histoire des deux Indes〉에 나오는 매우 혁명적인 문구들 가운데 상당수는 실제로 혁명을 정당화했던 드니 디드로가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철학과 과학 저술

1751년 드니 디드로는 언어의 기능을 연구하고 미학의 논점을 다루는 〈농아자에 관한 편지 Lettre sur les sourds et muets〉를 출판했다.

1754년에는 18세기 철학 탐구방법으로 칭송되는 〈자연 해석에 관한 사색 Pensées sur l'interprétation de la nature〉이 나왔다. 그러나 드니 디드로는 일생 동안 다른 저작을 거의 출판하지 않았다. 디드로의 글들은 필사본 형태로 친구들과 〈문예통신 Correspondance littéraire〉의 한정된 독자들에게만 알려졌다. 〈문예통신〉은 그당시 그림 남작이 편집해서 필사본으로 배포한 일종의 사설신문이었다.

드니 디드로의 철학저서 가운데 특별히 언급할 만한 책은 〈달랑베르와 디드로의 대화 L'Entretien entre d'Alembert et Diderot〉·〈달랑베르의 꿈 Le Rêve de d'Alembert〉·〈생리학의 기초 Eléments de physiologie〉 등이다. 이 저작들에서 디드로는 찰스 다윈의 진화론을 예견하면서 물질의 세포구조에 관한 최초의 근대적 이론을 전개하는 유물론 철학을 발전시켰다.

과학분야에 대한 드니 디드로의 사색도 상당히 흥미롭지만 이 사색을 탁월한 변증법적 화려함으로 표현하는 것도 특이하다. 종종 역설 형태와 항상 대화체로 제시되는 디드로의 사상은 인간본성에 내재하는 복합성과 모순성에 대한 깊은 이해와 현실감각에서 나온 것이다. 디드로는 꿈에 관한 이론을 전개하여 이후 프로이트에게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수필·소설·희곡

개인경험을 바탕으로 쓴 수필 〈나의 낡은 목욕옷에 대한 유감 Regrets sur ma vieille robe de chambre〉·〈아버지와 자식의 대화 Entretien d'un père avec ses enfants〉는 드니 디드로의 소설 〈수녀 La Religieuse〉·〈운명론자 자크 Jacques le fataliste〉·〈라모의 조카〉와 양식과 문체가 같다.

특히 〈운명론자 자크〉는 피카레스크식 소설과 '철학 이야기'의 전통에 서 있다. 드니 디드로는 과학적 결정론을 주장했지만 철학적 관점은 양면적이다. 〈라모의 조카〉의 윤리적 관점 역시 양면적이다. 여기서 디드로는 기생적이고 괴팍한 비도덕적 인간을 생생하고 극적인 필치로 그려냄으로써 당시 사회를 풍자했다. 〈부갱빌 여행기 부록 Supplément au voyage de Bougainville〉에서는 관용과 성(性) 해방에 바탕을 둔 자유사회에 관한 디드로의 생각을 밝혔다.

주요희곡 〈사생아 Le Fils naturel〉·〈한 가정의 아버지 Le Père de famille〉는 오늘날에 읽기에는 지루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드니 디드로의 희곡론은 〈사생아론 Entretiens sur le fils naturel〉·〈극시론 Discours sur la poésie dramatique〉에 설명되어 있으며, 그의 저서는 〈함부르크 연출법 Hamburgische Dramaturgie〉(1767~69)으로 유명한 독일 극작가 고트홀트 레싱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디드로는 진지한 부르주아 희곡을 상연하고, 등장인물을 그들의 직업·환경과 관련시켜 표현함으로써 관객들에게 더 큰 도덕적·사회적 영향력을 주는 사실주의를 추구했다.

드니 디드로는 연출법과 무대장치를 바꿀 것을 주장했고 '움직이는 그림'(tableaux vivant)을 사용해서 관객을 감동시키려고 했다. 〈연기의 패러독스 Paradoxe sur le comédien〉에서는 위대한 시인과 마찬가지로 위대한 배우는 감수성이 지나치게 발달해서는 안 되고 우화적인 꼭두각시로 남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드니 디드로는 문예비평을 쓰기도 했지만 〈문예통신〉에 기고하기 위해 살롱과 연례 예술전람회를 누비고 다닌 최초의 위대한 예술비평가로 가장 유명하다. 디드로가 가진 취향과 스타일의 빼어남과 함께 예술·예술가·회화기법에 관한 분석은 그가 죽은 뒤에야 빛을 보았으며, 특히 〈회화 시론 Essai sur la peinture〉은 괴테와 19세기 시인이자 비평가 샤를 보들레르의 찬사를 받았다.

말년과 저서

1774년 늙고 병든 드니 디드로는 엘베시우스가 쓴 〈인간론 De l'homme〉 이전에 빛을 보지 못했던 〈정신론〉을 확장한 글을 썼다.

드니 디드로는 〈마레샬과 철학자의 대화 Entretien d'un philosophe avec la Maréchale〉를 썼고 1778년에는 〈클라우디우스와 네로의 통치론 Essai sur les règnes de Claude et de Néron〉을 출판했다. 보통 〈세네카의 삶에 관한 에세이 Essai sur la vie de Sénègue〉로 알려진 이 작품은 로마의 풍자가이자 철학자인 세네카에 대한 변론으로 여겨진다. 에피네 부인과 달랑베르가 먼저 세상을 떠나고 친구라고는 그림과 올바크만 남자 디드로는 점점 개인적·가족적 삶에 빠져들었다.

1784년 2월 소피 볼랑의 죽음으로 커다란 슬픔을 겪은 지 몇 달 뒤에 예카테리나 대제가 선사한 리슐리외 가(街) 저택에서 관상동맥혈전증으로 죽었다. 드니 디드로는 "철학을 향한 첫걸음은 의심하는 것이다"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사위의 중재로 생로에 있는 성지에 묻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