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트홀트 에프라임 레싱

고트홀트 에프라임 레싱

다른 표기 언어 Gotthold Ephraim Lessing
요약 테이블
출생 1729. 1. 22, 작센 북(北)루자티아 카멘츠
사망 1781. 2. 15, 브라운슈바이크 브라운슈바이크
국적 독일

요약 독일극이 고전주의극과 프랑스극의 영향에서 벗어나는 데 이바지했으며 지금까지도 중요한 가치를 지닌 첫 독일 희곡을 썼다. 그의 비평은 독일문단에 큰 자극을 주었고 보수적 독단론에 반대해서 종교적·지적 관용과 편견없는 진실 추구를 주장했다.
1746년 가을, 레싱은 라이프치히대학교에 들어가 신학을 공부했으나 실제적인 관심은 문학·철학·예술 방면에 있었다. 곧 연극활동에 빠져들었고, 희곡을 쓰기 시작했다. 레싱은 틀에 박힌 귀족풍의 프랑스극은 독일 정신과는 맞지 않는다고 주장하면서, 대신 독일적 성격에 부합되고 현실에의 충실성을 토대로 한 진정한 민족극을 쓸 것을 요구했으며 독일의 극작가들에게 셰익스피어를 모범으로 삼을 것을 촉구했다. 늘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그는 극도의 가난 속에서 헤매다가 1766년에 방문한 적이 있었던 볼펜뷔텔에서 얼마 안 되는 보수를 받고 사서직을 맡았다. 말년에 이르러서도 그는 세계 종교의 역사에서 도덕의식의 발전을 보았고, 그로 인해 일체의 독단과 교리를 초월한 보편적인 형제애와 도덕적인 자유의 절정에 이를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

목차

접기
  1. 개요
  2. 교육과 초기 극작활동
  3. 극작가와 비평가로서의 전성기
  4. 볼펜뷔텔에서의 말년
고트홀트 에프라임 레싱(Gotthold Ephraim Lessing)
고트홀트 에프라임 레싱(Gotthold Ephraim Lessing)

개요

독일극이 고전주의극과 프랑스극의 영향에서 벗어나는 데 이바지했으며 지금까지도 중요한 가치를 지닌 첫 독일 희곡을 썼다.

그의 비평은 독일문단에 큰 자극을 주었고 보수적 독단론에 반대해서 종교적·지적 관용과 편견없는 진실 추구를 주장했다.

교육과 초기 극작활동

매우 명망높은 신학자였던 아버지는 수석목사라는 직책을 맡고 있었지만 대가족을 부양하는 데 경제적으로 몹시 곤란을 겪었다.

독서에 남다른 관심을 보였던 레싱은 12세 때 작센 선제후가 창립한 학교인 마이센에 있는 유명한 성(聖) 아프라 김나지움에 들어갔다. 이곳에서 재능있고 열성적인 학생으로 평판을 얻은 레싱은 그리스어·히브리어·라틴어 등에 대해 폭넓은 지식을 습득했다. 한편 로마의 극작가 플라우투스와 테렌시우스의 희곡에 심취하게 되었는데 이는 자신이 직접 작품을 쓰려고 결심하는 계기가 되었다.

1746년 가을, 라이프치히대학교에 들어가 신학을 공부했으나 실제적인 관심은 문학·철학·예술 방면에 있었다.

재능있고 활동적인 여배우 카롤리네 노이버의 공연으로 다시 활기를 얻게 된 라이프치히에서 연극에 매료되기 시작했고, 노이버도 이 젊은 작가에게 관심을 갖게 되어 1748년 그의 희극 〈젊은 학자 Der junge Gelehrte〉를 상연하여 성공을 거두었다. 이 작품은 허영에 차고 피상적이며, 잘난 척하고 쉽게 토라지는 어느 학자를 그린 경쾌한 풍자극인데 이 인물을 통해 레싱은 책에만 묻혀 사는 자신의 세계를 조롱하고 있다.

라이프치히 시기(1747~49)에 쓴 〈노처녀 다몬 Damon, Die alte Jungfer〉·〈여성혐오자 Der Misogyn〉·〈유대인 Die Juden〉·〈자유사상가 Der Freigeist〉와 같은 희곡들은 편협함·편견·불평·부의 추구, 중매결혼, 음모, 위선, 부패, 경솔함 같은 인간의 약점들을 재치있게 풍자한 작품들이다. 그러나 이러한 배경과 대조적으로 등장인물들은 사려깊고 희생적이며, 감수성있고 친절하고 솔직하며, 사랑에 충실한 미덕을 갖춘 젊은 남녀들이다.

〈유대인〉에서는 진가를 인정받지 못하는 고귀한 정신을 찬양함으로써 당시 생활영역이 유대인 거주지역으로 제한되어 있던 유대인들에 대해 관용의 정신을 보여주고 있다.

레싱은 독일의 몰리에르가 되려는 꿈을 갖고 희극의 등장인물들을 개성을 지닌 존재로 흥미있게 그려냄으로써 전통극의 '전형'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1748년초 라이프치히에서의 연극활동에 반대하는 부모로 인해 고향으로 돌아가야 했으나 의학공부를 한다고 부모를 설득해 다시 라이프치히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러나 곧 자신도 채무가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노이버 극단의 단원들을 위해 보증을 잘못 섰다가 빚에 쪼들리게 되었다.

이 극단이 해체되자 채무자들을 피해 라이프치히를 떠나 1748년 베를린에 도착했다. 베를린에서 당시 정평있는 편집인이자 사촌인 밀리우스에게 언론가로서의 일자리를 부탁하려 했던 것이다. 그후 4년 동안 그는 여러 직업을 전전하면서 주로 프랑스·영국의 종교 및 역사서적을 독일어로 번역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가 서평 편집자로서 활동했던 〈베를린 특보 Berlinische privilegirte Zeitung〉에서 재치있고 뛰어난 비평으로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또한 자신이 직접 〈연극의 역사와 수용에 관한 기고 Beiträge zur Historie und Aufnahme des Theaters〉라는 정기간행물을 창간하여 발간했는데, 이는 1750년에 중단되고 말았다.

극작가와 비평가로서의 전성기

1751~52년 비텐베르크에서 의학학위를 취득한 후 베를린으로 돌아와 〈연극 문고 Theatralische Bibliothek〉를 발간하기 시작했으나 이 정기간행물도 4권이 발행된 후에 역시 폐간되었다.

이 시기에 가장 중요한 사건은 1753~55년 자신의 저서를 6권으로 편집, 출판한 일이었다. 이 판본에는 재치있는 경구들을 비롯하여 라이프치히에 있을 때 쓴 중요한 희극들과 독일문학사상 최초의 시민 비극(bürgerliches Trauerspiel)이자 가정비극인 〈사라 삼프손 양(孃) Miss Sara Sampson〉이 실려 있었다.

당시 중간계급 작가들은 문학에서 전통적인 신분상의 구별이 사라지기를 오랫동안 열망해왔다. 종래의 전통극에서는 귀족출신의 등장인물만이 영웅적이고 비극적인 주제를 연출해낼 수 있었고, 중간계급의 인물들은 희극에서만 등장했다. 사실 레싱이 이 전통에 도전한 최초의 독일 작가는 아니었지만, 공정히 말해 당시 독일 연극을 지배하고 있던 프랑스 고전주의극과 결정적으로 결별하게 된 것은 그의 희곡을 통해서였다.

〈사라 삼프손 양〉은 조지 릴로의 〈런던 상인 London Merchant〉(1731)과 중간계급 출신의 여성의 미덕을 찬양한 새뮤얼 리처드슨의 소설에 영향을 받았고, 18세기초 프랑스의 극작가 피에르 클로드 드 라 쇼세로부터 비롯된 '눈물의 희극'(comédie larmoyante)에서도 영향을 받았다. 또한 처음으로 시민계급 출신이 주인공으로 등장해 비극적 운명을 짊어진다는 점에서 독일 최초의 시민 비극으로 평가되며, 1755년 프랑크푸르트안데어오데르에서 이루어졌던 초연은 성공적이었다. 성찰하는 듯한 산문조의 대사는 미덕과 마음, 양심과 열정 사이의 갈등 같은 심리상황을 꾸밈없이 능란하게 드러냈고, 등장인물들의 성격묘사도 아주 뛰어났다.

극의 구성은 한 시민층 가정의 순진무구하고 감수성 풍부한 여주인공이 중심인데, 그녀는 일체의 구속과 금기를 무시하고 사랑을 쟁취하려는 흡혈귀 같은 마르우드 부인의 희생양이 되고 그녀의 애인이었던 우유부단한 멜레폰트는 결국 죽음으로 자신의 죄를 보상하게 된다.

이 시기의 글에서는 특히 날카로운 문체와 명확한 논증으로 자신의 '정당함을 입증'(Rettungen)하려는 노력이 크게 부각되고 있다.

4편의 평론은 종교개혁 시대에 중상모략당하고 부당한 박해를 받던 작가 요하네스 코크라에우스와 게롤라모 카르다노와 같은 자유 사상가들을 변호하고 있다. 또한 날카롭고 신랄한 반론 〈자무엘 고트홀트 랑게 씨(氏)를 위한 편람 Vade Mecum für den Herrn Samuel Gotthold Lange〉(1754)에서 호라티우스의 시를 경솔하고 거짓되게 번역한 거만한 학자 S.G. 랑게를 공격하여 그가 문학적 명성을 잃게 만들었다.

이때부터 레싱은 날카롭고 세련된 필체를 무기로 하여 문학적인 반대자들을 거침없이 공격했기 때문에 모두가 두려워하는 인물이 되었다. 베를린에서 사귄 친구들 중에는 철학자 모제스 멘델스존과 작가이자 출판업자인 C.F. 니콜라이가 있었는데, 이들과 함께 비극의 미학에 관해 획기적인 내용의 서신을 교환했으며, 이는 후에 〈비극에 관한 서신교환 Briefwechsel über das Trauerspiel〉(1756~57)으로 출판되었다.

레싱은 여기서 비극이란 도덕성을 설교해서는 안 되며 오히려 관객들의 감정이입의 증거인 감탄이나 연민을 불러일으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1755년 11월부터 1758년 4월까지 다시 라이프치히에서 보낸 후, 1758년 5월에 베를린으로 이주해서 1760년 11월까지 살았다. 베를린에서 니콜라이가 발행하는 주간지 〈최근 문학동향에 관한 서한들 Briefe, die neueste Literatur betreffend〉에 정기적으로 기고하면서, 당대문학에 관한 비평을 썼다.

이 평론들의 중요 쟁점은 영향력있는 연극평론가 J.C. 고체트를 격렬히 비난하는 것으로, 고체트는 프랑스극 특히 17세기 비극작가 피에르 코르네유의 극을 본보기로 삼는 연극을 옹호했다. 레싱은 틀에 박힌 귀족풍의 프랑스극은 독일 정신과는 맞지 않는다고 주장하면서, 대신 독일적 성격에 부합되고 현실에의 충실성을 토대로 한 진정한 민족극을 쓸 것을 요구했으며 독일의 극작가들에게 셰익스피어를 모범으로 삼을 것을 촉구했다.

17번째의 〈문학서신 Literaturbrief〉에서는 그 자신이 쓰다 만 파우스트극 가운데 감동적인 장면들을 발췌하여 수록했다. 이 장면에서 악마와의 계약에도 불구하고 끊임없는 탐구정신으로 인해 끝내는 신의 인정을 받게 되는 '사악함 없는 파우스트'를 그려냄으로써 당시 젊은이였던 요한 볼프강 폰 괴테와 그의 위대한 파우스트극 탄생을 위한 길을 닦아놓았다.

1759년에는 크게 보아 사회비평에 속하는 산문우화들을 대가다운 솜씨로 써서 발표했고, 아울러 우화의 교훈적·비유적인 구조를 분석함으로써 이 장르에 특수한 법칙을 공식화한 논문을 발표했다.

1760년 슐레지엔 지방의 군정장관인 타우엔치엔 장군의 비서로 브레슬라우에 갔고, 브레슬라우 도서관에서 철학과 미학을 공부하여 〈라오콘:회화와 문학의 한계에 관하여 Laokoon:oder über die Grenzen der Malerei und Poesie〉(1766)라는 뛰어난 논문을 탄생시켰다. 여기서 헬레니즘 시대(BC 1세기경)의 유명한 조각작품인 라오콘(뱀에 휘감겨 죽는 성직자 라오콘과 그의 아들의 모습)에 대한 해석을 둘러싸고 당대 예술사가 요한 빙켈만과 대립된 의견을 피력하면서, 레싱은 회화와 시문학의 기능이 근본적으로 다른 것임을 설명하려 했다.

회화는 반드시 공간적으로 접근하여 관찰해야 하므로 사건의 발생 순간과 일련의 사건들 중 사태를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순간을 선택해야 하는 반면, 문학은 사건을 유기적이고 시간적인 순서에 따라 기술해야 한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시문학의 본질은 묘사에 있는 것이 아니고 가변성 즉 움직임을 표현하는 데 있다고 했다.

브레슬라우에 체류하고 있는 동안 얻어진 문학적 결실은 걸작 희극 〈미나 폰 바른헬름 Minna von Barnhelm〉(1767)이다.

이는 독일 최초의 고전주의 희극으로서, 후에 괴테는 이 작품이 당대를 배경으로 국가적 중대사였던 7년전쟁에서 프로이센과 작센 간의 갈등을 중심주제로 삼았다는 점을 높이 평가했다. 주인공인 프로이센 소령 텔하임과 적국 튀링겐 출신의 예절바른 처녀 미나와의 관계는 텔하임의 곧은 양심과 엄격한 명예에 대한 관념으로 인해 위험에 빠지게 되고, 매력있고 고귀한 성품의 미나는 그들의 문제를 직접 해결하려 한다.

자신의 애정을 바탕으로 그들의 결합에 걸림돌이 된 전쟁과 점령이란 장애물을 결연히 극복하고 양심과 행복의 갈등을 해결한다. 이처럼 이 두 남녀는 계몽주의의 전형적인 대표자처럼 사고하고 행동하면서도 결국은 보통 사람들처럼 처신해 레싱의 인본주의관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준다. 이 두 주인공들은 주변인물들에 의해 더욱 부각되고 있으며, 대화의 묘미는 극적 행동의 생동감을 강화시켜 지금까지도 관객의 주의를 끌 수 있는 극이 되었다.

1765년 베를린으로 돌아온 레싱은 궁정도서관장의 지위를 원했으나 프리드리히 대왕의 궁정에서 총신으로 지냈던 볼테르와 반목했기 때문에 독일 작가들을 경시하던 왕에게 거절당했다.

그후 몇몇 함부르크 상인들로부터 그들이 개인적으로 기금을 조성해서 설립한 국민극장의 고문 및 비평가로서 활동해 달라는 제의를 받고 수락했다. 그러나 이 사업은 1년도 못 되어 실패했고, 결국 아직은 독일 국민극장을 설립할 시기가 아니라는 쓰라린 결론에 도달했다. 그러나 그는 50편 이상의 공연에 대한 논평을 〈함부르크 연극론 Hamburgische Dramaturgie〉(1767~69)이라는 제목으로 출판했는데, 이 책은 희곡의 근본 원칙에 대해 쓴 104편의 짤막한 평론 형식으로 되어 있다.

여기서 레싱은 동시대의 프랑스 작가 드니 디드로가 중산층의 삶을 사실적으로 묘사했다는 점을 칭찬하고 있으나, 코르네유와 볼테르의 극을 모방해 쓴 비극에 대해서는 반론을 제기했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의 비극적 카타르시스(정화작용)라는 유명하고 논의분분한 개념을 관객이 많은 긴장을 가져다주는 비극적 사건을 본 후에 느끼는 이완감으로 해석하면서, 연민과 공포에 의해 생겨난 정서적 감동은 후에 관객에게 도덕적 영향을 주어 미덕을 지닌 행동으로 변형되어야 한다고 결론을 맺었다.

한편 1768~69년에는 할레대학 교수인 C. A. 클로츠의 허식적인 지식과 엘리트적 태도를 비난한 〈시대에 뒤떨어진 내용의 편지 Briefe antiquarischen Inhalts〉를 출간했다. 이와 같은 주제로 명쾌하고 이해하기 쉬운 평론 〈고대인의 죽음에 대한 이해 Wie die Alten den Tod gebildet〉를 쓰기도 했다.

볼펜뷔텔에서의 말년

극도의 가난 속에서 헤매다가 1766년에 방문한 적이 있었던 볼펜뷔텔에서 얼마 안 되는 보수를 받고 사서직을 맡았다(1770). 이 시기는 불행하고 험난했으나 업적에 있어서는 많은 성과를 얻었다.

죽은 지 얼마 안 된 성서비평가이자 학자 라이마루스의 논문에서 극단적인 견해들을 발췌해 〈한 익명자의 단편 Fragmente eines Ungenan-nten〉(1774~77)을 출간했을 때 레싱은 자신의 생애에서 가장 격렬한 논쟁에 말려들게 되었다. 여기서 레싱 자신은 그리스도교 교리에 반기를 든 라이마루스의 극단적인 견해에 대해 다소 유보적인 입장을 취했으나, 신학자들은 이 책의 출간을 정통 그리스도교에 대한 정면 도전으로 받아들였다.

급기야 그들의 지도자였던 함부르크 주임목사 J.M. 괴체와의 격렬한 논쟁을 서두로 정통파 목사들에 대한 싸움으로까지 확산되었으며, 레싱은 이 편협하고 엄격한 교리주의자에 반대하는 〈반(反)괴체 Anti-Goeze〉(1778)를 비롯해 여러 통렬한 논박문들을 발표하게 되었다.

〈반괴체〉에서 그는 진실의 추구가 정통 교리주의자들이 집착하는 원리원칙보다 더 가치가 있다는 신념을 밝히고 있다.

1772년에 공연된 비극 〈에밀리아 갈로티 Emilia Galotti〉는 강렬하고 예리한 산문체의 뛰어난 구성 작품으로 어느 이탈리아 왕궁에서 일어난 왕자의 양심의 갈등을 다루고 있다. 약강격의 운문으로 이루어진 '극시'(劇詩) 〈현자 나탄 Nathan der Weise〉(1779)은 깊은 윤리적 문제를 익살스런 필치로 다룬 신학적·철학적 성격의 교훈극으로서, 고도로 시적이고 극적 긴장이 조성된 작품이다.

〈현자 나탄〉은 각각의 윤리적 기반을 감안하면서 세계 3대 종교가 동등한 위치에 있음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이는 편견없이 인류를 위해 헌신하는 '사랑'이라는 인간의 진정한 종교를 찬양하고 있기 때문이다(종교적 관용). 이슬람교도(살라딘)·그리스도교도(성전기사)·유대교도(나탄)인 3대 종교의 대표자 가운데, 유대인(레싱은 자신의 옛친구인 모제스 멘델스존을 기리며 주요인물로 삼았음)만이 완전한 인본주의 이상에 부합하는 인물로서 완전히 자신을 극복할 수 있으며, 권력 앞에서도 진실을 말할 용기를 지니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각자 다른 종교의 대표적 인물들이 결국에는 서로가 한 핏줄을 나눈 혈연관계에 있음을 깨닫게 된다는 사실에서 그들 모두 인류라는 대가족의 구성원임이 강조된다.

현자 나탄(Nathan der Weise)
현자 나탄(Nathan der Weise)

마지막 저서 〈인류의 교육 Die Erziehung des Menschengeschlechts〉(1780)은 레싱의 정신적 활동을 가장 잘 반영하고 인류의 완전성에 대한 믿음을 나타낸 논문이다. 그는 세계 종교의 역사에서 도덕의식의 발전을 보았고, 그로 인해 일체의 독단과 교리를 초월한 보편적인 형제애와 도덕적인 자유의 절정에 이를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

이처럼 볼펜뷔텔에서 보낸 마지막 10년 동안 철학과 문학 연구에서 풍부한 수확을 거두었지만, 정작 자신의 삶은 시련의 연속이었다.

건강이 악화되기 시작했고 단조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시도한 몇 차례의 여행을 제외하고는 외로운 삶을 살았다. 1776년 오랜 친구였던 한 함부르크 상인의 미망인 에바 쾨니히와 결혼했으나, 그녀는 1778년 출산중 죽었다. 결국 그는 말년을 고독과 가난 속에서 보냈으며 장례도 공비(公費)로 치러져 어느 빈민가의 무덤에 쓸쓸하게 묻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