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랑베르

달랑베르

다른 표기 언어 Jean Le Rond d'Alembe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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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717. 11. 17, 파리
사망 1783. 10. 29, 파리
국적 프랑스

요약 프랑스의 수학자·철학자·저술가.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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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요
  2. 어린시절
  3. 수학
  4. 백과전서
  5. 후반기의 문학적·과학적·철학적인 업적
  6. 달랑베르에 대한 평가
달랑베르(Jean Le Rond d'Alembert)
달랑베르(Jean Le Rond d'Alembert)

개요

유명한 〈백과전서 Encyclopédie〉의 기고가·편집자로서 상당한 명성을 얻기 전에는 수학자·과학자로서 명성을 얻었다.

어린시절

그는 유명한 살롱의 주인인 테스캥 부인과 그녀의 정부들 중의 한 명인 훈작사, 데투슈-카농 사이에서 서자로 태어났다.

그는 태어나자마자 파리의 생장드롱 교회의 계단에 버려졌는데, 그의 세례명은 그 교회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테스캥은 결코 그녀의 아들을 인정하지는 않았지만, 데투슈는 아이를 찾아 유리직공의 아내에게 맡겼는데 달랑베르는 항상 그녀를 어머니로 여겼다. 아버지의 영향력 덕분에 달랑베르는 일류의 얀센주의 학교에 입학하여 처음엔 장 바티스트 다르망베르그로 등록했지만, 후에는 발음의 편리를 위해서인지, 달랑베르로 이름을 바꾼 듯하다. 데투슈는 자신이 달랑베르의 아버지임을 밝히지 않았지만, 자신의 아들에게 연금 1,200루불을 남겼다.

초기에 달랑베르의 선생들은 사도 바올로의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에 대한 그의 해설서에 자극 받아서인지 그에게 신학공부를 시키려 했다. 그러나 그들은 달랑베르에게 일생 동안 신학에 대한 반감만 안겨주었다. 그는 2년 간 법률을 공부하여 1738년 변호사가 되었으나 개업하지 않았다. 1년간 의학을 공부한 뒤 마침내 그는 수학에 몰두했다. 그는 후에 "수학이야말로 내가 흥미를 느낀 유일한 직업이다"라고 했다.

달랑베르는 약간의 개인교습을 받은 것 외엔 거의 독학으로 공부했다.

수학

1739년 달랑베르는 과학 아카데미(1741년 회원이 됨)에 논문을 발표했다.

26세에 그의 유명한 달랑베르의 원리를 포함한 역학에 대한 기본적인 책인 〈역학론 Traité de dynamique〉(1743)을 출판했다. 달랑베르의 원리란 뉴턴의 운동에 대한 제3법칙(모든 작용에는 같은 크기의 반작용이 있다)이 고정된 물체뿐만이 아니라 자유로운 운동을 하는 물체에 대해서도 성립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다른 수학적 업적들을 간단히 언급하면 다음과 같다. 1744년 그는 〈유체의 평형운동론 Traité de l'équilibre et du mouvement des fluides〉에서 그의 원리를 유체의 평형과 운동에 관한 이론에 적용했다.

이어 미적분론의 한 분야인 편미분 방정식을 만들었고, 이에 관한 그의 첫번째 논문이 〈기류의 일반적인 원인에 대한 고찰 Réflexions sur la cause générale des vents〉(1747)에 실렸다. 이것으로 인해 그는 베를린 아카데미에서 상을 받았으며, 같은 해에 회원으로 뽑혔다. 1747년 〈진동하는 현에 대한 연구 Recherches sur les cordes vibrantes〉에서는 그의 새로운 미적분을 진동하는 현들의 문제에 적용했다.

1749년에는 그의 원리를 일정한 형태의 물체의 운동에 적용하는 방법을 고안하여 〈지축과 세차에 대한 연구 Recherches sur la précession des équinoxes et sur la nutation de l'axe de la terre〉에서 분점이동(지구궤도 위치의 점차적인 변화)의 해(解)를 찾아 그 특성들을 결정하고, 지축의 장동현상(章動現象)을 설명했다.

1752년 그는 여러 가지 독창적 생각과 새로운 관측 등에 관한 평론 〈유체 저항에 대한 새로운 이론에 대한 평론 Essai d'une nouvelle théorie de la résistance des fluides〉을 출판했다. 이 책에서 그는 공기를 작은 입자들로 구성된 비압축성 탄성유체로 생각했다. 또한, 저항은 움직이는 물체가 충격을 받는 순간에 운동량손실에 관련된다는 고체 역학의 원리로부터 유추하여, 공기 입자들의 저항은 0이라는 놀라운 결과를 도출했다.

그러나 달랑베르는 스스로 이결과에 불만을 느꼈으며 '달랑베르의 역설'로 알려져 있는 이 결론은 현대 물리학자들에게도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베를린 아카데미의 〈회고록 Mémoirs〉에 수치값의 변화율을 이용한 변수들의 관계를 고안한 적분학에 대한 연구결과를 출판했는데, 적분학은 그가 상당한 공헌을 한 수리과학의 한 분야이다.

〈천체계의 중요한 다른 점들에 대한 연구 Recherches sur différents points importants du système du monde〉(1754~56)에서 그는 몇 년 전에 베를린 아카데미에 제출했던 행성들의 궤도변화를 나타내는 섭동(攝動) 문제의 해(解)를 완성했고, 〈수학 소논문집 Opuscules mathématiques〉(8권, 1761~80)을 출판했다.

백과전서

달랑베르는 잠시 활동적인 사교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유명한 상류사회 모임에 자주 출입하여 재치있는 좌담가와 흉내를 잘 내는 사람으로 상당한 명성을 얻었다. 이성과 자연법칙(권위와 계시에 대립하는)을 믿고 낡은 교리와 제도에 대항하던 그의 동료 철학자들처럼 그도 사회의 개량에 관심을 돌렸다. 자유로운 사상을 가진 합리주의 사색가였던 그는 종교에 반대하고 관용과 자유토론을 지지했다. 그들은 낡은 귀족정치를 새롭고 지적인 귀족정치로 대치시킬 수 있는 개화된 왕이 다스리는 자유주의 주권국가를 추구했다.

또한 인간은 자기자신의 능력에 의존해야 한다는 믿음으로 기독교 윤리를 대체할 새로운 사회도덕을 보급했다. 지식의 유일한 참된 원천인 과학은 사람들의 이익을 위해 대중화 되어야 했으며 그가 1746년경에 백과전서파와 관계를 맺게 된 것도 이러한 이유였다. 에프레임 체임버의 영문판 백과사전을 데니스 디드로의 편집하에 프랑스어로 번역, 새로운 내용으로 바꾸고 있을 때 달랑베르는 수학과 과학에 대한 글을 기고했다. 그는 일반적인 편집업무를 돕고 다른 주제에 대한 기고를 했을 뿐만 아니라 영향력있는 집단에서 사업을 위한 후원자를 확보하려고 노력했다.

1751년 그는 이 작품의 제1권을 소개하는 〈예비논문 Discours préliminaire〉을 썼다. 이것은 당대의 지식을 통합한 견해를 보여주는 놀랄만한 시도였는데, 지식의 다양한 분야들의 발전과 상호관계를 추적하고 지식의 각 분야들이 어떻게 하나의 구조로 응집된 부분을 형성하는지 보여주었다. 〈예비논문〉의 2번째 단락은 르네상스 시대 이후 유럽의 지적인 역사에 관한 것이었다.

1752년 달랑베르는 제3권의 서문을 썼는데, 이는 백과전서파의 비평가들에 대한 원기왕성한 답변이었다. 한편 제5권(1755)의 서문으로 쓰였던 〈몽테스키외 찬사 Éloge de Montesquieu〉에서는 능숙하긴 했지만 다소 솔직하지 않게 몽테스키외를 백과전서파의 후원자들 중의 하나로 소개했다. 실제로 몽테스키외는 '민주정치'와 '전제정치'에 대한 글을 써달라는 요청을 거절했으며, '취미'에 대한 글은 그가 1755년에 죽을 때까지 끝내지 않은 채로 남아 있었다.

1756년 달랑베르는 볼테르와 함께 머물기 위해 제네바로 떠났다.

그곳에서 〈백과전서〉의 항목인 '제네바'를 위한 정보를 수집하기도 했는데, 그 글은 제네바의 목사들의 원칙과 예배를 칭찬하는 것이었다. 1757년에 기사가 나왔을 때 제네바에서는 거센 항의가 일었다. 그 이유는 이 글이 많은 사제들이 더이상 그리스도의 신성함을 믿지 않는다고 주장하였고, 또한 볼테르의 부추김을 받았는지, 그가 극장의 건립을 지지하였기 때문이었다. 이 글은 〈백과전서〉에 음악에 관한 글을 썼던 루소를 자극하여 루소는 그의 〈연극에 관해 달랑베르에게 보내는 편지 Lettre à d'Alembert sur les spectacles〉(1758)에서 극장은 퇴폐적인 작용을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달랑베르는 날카롭고 비우호적인 〈제네바의 시민 장자크 루소에게 보내는 편지 Lettre à j.-j. Rousseau, citoyen de Genève〉로 응수했다. 그러나 달랑베르는 늘어나는 재정적인 어려움으로 점차 용기를 잃어갔다. 1758년초에는 자신의 편집권을 포기했으며, 그 이후로는 수학과 과학 기사의 집필에도 제한을 두었다.

후반기의 문학적·과학적·철학적인 업적

그는 초기에 문학과 철학적인 활동을 해 〈문학·역사·철학 논문집 Mélanges de littérature, d'histoire et de philosophie〉(1753)을 출판했다.

이 작품엔 인상적인 〈서간문 작가들에 대한 평론 Essai sur les gens de lettres〉이 포함 되어 있는데 그는 여기에서 작가들은 '자유와 진리와 가난'을 추구해야 한다고 권고하고, 귀족 후원자들에게는 그러한 작가들의 재능과 독립성을 존경하라고 주장하였다.

작가들과 과학자들에게 뛰어난 사교모임 진행자였던 달랑베르는 드팡 부인의 지속적인 운동으로 1754년 프랑스 아카데미에 선출되었다.

그는 열정적인 회원이 되었고 프랑스 아카데미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열심히 일했으며 피로조프 학파의 이상에 동감하는 회원을 뽑으려고 끊임없이 노력했다. 1772년 종신서기가 되었을 때 그의 개인적 위치는 훨씬 더 영향력을 가지게 되었다. 그의 임무 중의 하나는 〈아카데미 회원 전기 Histoire des membres de l'Académie〉를 계속 쓰는 것으로 이것은 1700~72년에 고인이 된 모든 회원들의 전기를 쓰는 것이었다.

그는 아카데미의 공개회의에 전달된 〈찬사 Éloges〉를 통하여 그의 선배들에게 존경을 표했다. 비록 그 문학적인 가치가 한정적이긴 했지만, 이것은 당시의 수많은 문제들에 대한 그의 태도에 흥미로운 빛을 주었고, 또한 아카데미와 대중 사이의 연계를 확립하고자 하는 그의 바램을 나타냈다.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는 1752년부터 달랑베르에게 베를린 아카데미의 회장이 되어 줄 것을 설득했다.

그러나 달랑베르는 1755년 베젤의 라인 마을에 잠시 왕을 방문하러 간 후, 1763년에 포츠담에 더 오래 머문 것으로 만족했다. 달랑베르는 오랫동안 왕에게 아카데미를 운영하는 방법과 새로운 회원을 뽑는 것에 대해 조언을 했다. 1762년 러시아의 군주 예카테리나 2세는 달랑베르에게 그녀의 아들 폴 대공의 가정교사가 되어 달라고 초청했지만 이 초청 역시 거절했다. 달랑베르는 외국에 거주하여 건강과 개인적인 지위에 해를 입는 것을 두려워하지는 않았지만, 파리의 지적인 생활로부터 격리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비록 회의적이기는 했지만, 달랑베르는 기독교에 대한 철학자들의 반감을 기꺼이 지지했다.

그러나 그는 너무 신중해서 공개적으로 공격하지는 않았다. 프랑스로부터 예수회가 추방당하자 달랑베르는 〈프랑스 예수회의 파멸에 대한 해설 Sur la destruction des Jésuites en France〉(1765)을 처음에는 익명으로, 그후엔 자기 자신의 이름으로 출판했다. 이 책에서 그는 예수회가 학자와 교육가로서의 자질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파멸한 것은 권력을 지나치게 좋아하였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이 기간 동안에 달랑베르는 음악이론에 흥미를 가지게 되었다. 그는 〈음악의 요소 Eléments de musique〉(1752)에서 작곡가 장 필리프 라모(1683~1764)의 이론을 상세히 설명하려 했는데, 라모는 당대의 음악적 여러 요소들을 1900년경까지 서양음악을 지배한 화성체계로 정리한 사람이다.

1754년 달랑베르는 음악 전반과 특별히 프랑스 음악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한 〈음악일반과 프랑스 음악에 관한 고찰 Réflexions sur la musique en général et sur la musique fran이미지aise en particulier〉이라는 평론을 발간했다. 또 그는 소리의 물리학인 음향학을 다룬 수학적인 〈소품들 opuscules〉을 출판했고, 〈백과전서〉에 음악에 대한 몇몇 글들을 게재했다. 1765년에 중병으로 인해 그의 계모의 집을 떠나 쥘리 데 레스피나스의 집에서 살았으며, 그녀와 사랑에 빠졌다.

달랑베르는 그녀의 사교모임에서 지도적 인물이었고, 이 모임은 프랑스 아카데미의 중요한 집회장소가 되었다. 비록 그들이 짧은 기간 동안 친근하게 지냈지만, 달랑베르는 곧 확고한 우정의 역할에 만족하였음에 틀림없었다. 그는 1776년 쥘리가 죽고나서야 그녀가 다른 여러 사람들과도 관계를 가졌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는 루브르에 있는 아파트로 옮겨 그곳에서 죽었는데, 그때까지 그는 아카데미의 서기장이었다.

달랑베르에 대한 평가

달랑베르의 명성을 볼테르 다음가는 것으로 생각했던 당대의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달랑베르에게는 자식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수리과학에 대한 그의 독창적인 공헌에도 불구하고 지적인 소심함으로 인해 그의 문학적·철학적 업적은 위대성을 인정 받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합리주의자들의 이상이었던 모든 지식의 궁극적인 통합으로부터 영감을 얻어 과학의 다양한 분야를 서로 연결하게 해준 원리인 하나의 과학철학에 공헌할 수 있었다. 또한 달랑베르는 그의 생애와 모든 업적 전반에 걸쳐 전형적인 18세기의 철학자였다. 사생활에 있어 그는 겸손하고 검소하여 부를 추구하지 않았다. 가능한한 언제나 자선을 베풀었고 항상 청렴하려고 주의했으며 그의 영향력을 국내외에서 '계몽'의 발전을 촉진시키는 데 사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