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리에르

몰리에르

다른 표기 언어 Moliere
요약 테이블
출생 1622. 1. 15, 프랑스 파리에서 세례받음
사망 1673. 2. 17, 파리
국적 프랑스

요약 프랑스의 위대한 희극작가·배우. 17세기 프랑스의 교회 및 세속 당국은 그를 적대시했지만, 몰리에르의 희극적 천재성은 마침내 그에게 프랑스가 낳은 가장 위대한 작가로서의 명성을 안겨주었다.

목차

접기
  1. 초기의 연극 활동
  2. 추문과 성공
  3. 후기 희곡들
  4. 배우·극작가로서의 몰리에르
  5. 독창적 희극관
  6. 프랑스적 천재 몰리에르
몰리에르
몰리에르

몰리에르 이전에도 희극은 긴 역사를 지니고 있었고 그는 그 전통적 형식들의 대부분을 수용했으며,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새로운 양식의 희극을 창조하는 데 성공했다. 그의 희극양식은 정상적인 것과 비정상적인 것의 상호관계 속에서 바라본 이중적 시각에 기초한 것으로, 예컨대 그럴싸한 것과 진실한 것, 현학적인 것과 지혜로운 것 등의 대비가 그 희극적 원천이다.

배우이기도 했던 몰리에르는 어떤 상황을 다루더라도 그것을 생동감있게, 때로는 비현실적일 만큼 극적으로 만들어, 비록 이성의 시대에 살기는 했지만 그의 양식은 부조리한 것을 합리화하지 않고 거기에 생기를 부여했다. 그러한 예가 〈타르튀프 Tartuffe〉·〈아내들의 학교 L'École des femmes〉·〈인간혐오자 Le Misanthrope〉 같은 작품들이다.

수세기 후에 다른 매체를 통해 활동했던 가장 위대한 희극 예술가들(예를 들어 찰리 채플린과 같은 이들)이 여전히 몰리에르와 견주어짐으로 보아 그의 예술관의 참신성이 입증되고 있다.

1739년 영국에서 발행된 몰리에르 희극집
1739년 영국에서 발행된 몰리에르 희극집

초기의 연극 활동

몰리에르는 파리 중심부에서 태어났으며(또한 그곳에서 죽었음) 등기부 기록에 의하면 1622년 1월 15일에 장 바티스트 포클랭이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어머니는 그가 10세 때 죽었고, 아버지는 왕실지정 가구상으로, 그에게 콜레주 드 클레르몽(이 학교는 훗날 볼테르를 비롯해 숱한 프랑스의 재사들을 키워낸 리세 루이 르 그랑의 전신임)에서 좋은 교육을 받게 해주었다. 아버지는 아들이 자신의 뒤를 이어 왕실의 직책을 맡게 되기를 희망했으나 1643년 그 자리를 사임한 것으로 보아 그는 전통과 결별하고 무대 위에서 살아갈 방도를 구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해에 몰리에르는 다른 9명과 함께 일뤼스트르 테아트르(Illustre-Théâtre)라는 이름으로 극단을 조직하여 희극을 창작하고 공연했다. 몰리에르라는 그의 예명은 1644년 6월 28일자로 된 문서에서 처음 발견된다. 그는 이후 30년 동안 연극에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고 51세의 나이로 기진하여 죽었다.

재능있는 여배우 마들렌 베자르는 몰리에르를 설득해 극장을 세우게 했으나, 새로 생긴 극단을 유지시키지는 못했다.

1645년 몰리에르는 건물과 집기 때문에 빚을 져 2번이나 투옥되었다. 17세기의 파리는 연극 관람객의 수가 매우 적었고, 시에는 이미 2개의 극장이 있었으므로 새로운 극단이 살아남기란 거의 불가능했으리라고 보인다. 1645년말부터 13년 남짓한 기간 동안 극단은 지방순회공연으로 근근히 생계를 유지했다. 이 기간에 대해서는 지방의 행정기록과 교회 기록들을 통해 극단이 여러 곳에서 공연했다는 것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1648년에는 낭트에, 1649년에는 툴루즈에, 1652년말부터 1655년 여름까지 그리고 1657년에는 가끔씩 리옹에 있었고, 1654년과 1655년에는 몽펠리에에, 1656년에는 베지에에 있었다. 그러는 동안 극단은 분명 부침을 겪었을 것이다. 기록이 남아 있지 않은 이 기간은 몰리에르의 경력에서 결정적인 중요성을 지니는 시기로, 이 시절에 그는 배우이자 감독으로서 엄격한 훈련을 쌓는 동시에 작가들, 동료들, 관중 및 당국을 상대하는 법도 배웠을 것이다.

마침내 파리로 돌아왔을 때 그가 거둔 급속한 성공이나 반대에 부딪쳤을 때의 강인함은 이 시절의 훈련에서 비롯된 듯하다. 1655년 리옹에서 공연된 〈실수쟁이 L'Étourdi ou les contretemps〉와 1656년 베지에에서 공연된 〈사랑 싸움 Le Dépit amoureux〉은 그의 이름으로 알려진 최초의 작품들이다.

몰리에르에게 명성의 길이 열린 것은 그의 극단이 1658년 10월 24일 루브르 궁의 위병소에 차려진 가설무대에서 루이 14세를 위해 공연했던 코르네유의 〈니코메드 Nicomède〉와, 뒤이어 시골 관중으로부터 인기를 얻었던 작은 여흥들 가운데 하나를 공연했을 때였다.

그 작품이 〈사랑에 빠진 의사 Le Docteur amoureux〉인데, 현재 남아 있는 것과 같은 형태였는지의 여부는 알 수 없다. 이 작품은 성공적이었고 왕제(王弟) 오를레앙 공(公) 필리프의 호의를 얻게 해주었다. 공의 후원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알기 어렵지만 7년 동안 계속되었고, 그후에는 왕 자신이 극단을 인수하여 '왕실 극단'(Troupe du roi)으로 만들었다. 극단이 다소간의 명성과 권위, 권문세가들로부터의 초대, 배우들의 후원금(종종 지불되지 않기도 했음) 등을 얻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이상의 소득은 별로 없었다.

1658년 파리에 돌아온 이후 몰리에르의 생애와 관련된 믿을 만한 사실들은 모두 작가·배우·감독으로서의 활동에 관한 것이다.

몇몇 프랑스 전기작가들이 그의 작품에서 개인사를 읽어내려 했으나, 그러한 시도들은 있을 수 있는 일을 실제 있었던 일로 오도할 위험을 지니고 있다. 전설 같은 이야기와 풍자를 제외하면 정보란 거의 없다. 몽테뉴, 플루타르크, 율리우스 카이사르, 세네카 등의 저서가 그의 서재에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그의 희곡을 읽을 때 그런 작가들을 염두에 두어야 함을 의미하지는 않는 것이다.

분명 위대한 작가였음에도 불구하고, 몰리에르는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작가는 아니었다.

왜냐하면 문학이라 불릴 만한 것, 출판하기 위한 것은 거의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희곡 외에 쓴 것이라고는 몇 편의 시와 고대 작가 루크레티우스의 미완성 번역이 전부임). 그의 희곡들은 모두 공연용으로 만들어졌으며, 그는 초기작 서문에서 표절을 피하기 위해 출판이라도 해야겠다고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다(그의 작품 2편은 실제로 표절되었음). 그는 7편의 작품을 미간(未刊)으로 남겼고, 전집이라고는 낸 적이 없으며(적어도 알려진 바로는) 작품의 출판을 위해 교정쇄를 읽은 적조차도 없다.

그에게 희극이란 공연되기 위해 만들어지는 것일 뿐이었다. 19세기는 이러한 사실을 잊고 있었다. 그의 극적인 천재성을 제대로 발견한 것은 루이 주베, 샤를 뒬랭, 장 루이 바로, 장 빌라르 등 20세기의 배우들이었다.

그는 고전작가도, 자기 뜻대로 계획하고 글을 쓸 여가를 가진 작가도 아니었다.

경쟁·생존을 위한 투쟁이야말로 몰리에르의 전 생애에서 주조(主調)였으며, 자신의 배우와 관객을 유지한다는 것은 다른 극단과의 끊임없는 투쟁을 의미했다. 그는 이런 싸움을 거의 혼자 힘으로 해냈다. 그의 극단이 유지된 것은 그의 기술적 역량과 인품 덕택이었다.

몰리에르가 파리에서 공연한 첫 희곡 〈재치를 뽐내는 여인들 Les Précieuses ridicules〉은 그의 이후 작품들을 예고해준다.

그것은 2명의 시골 아가씨가 주인 행세를 하는 2명의 하인에 의해 웃음거리가 된다는 이야기로, 한편으로는 아가씨들의 고상함에 대한 열망과 상식의 결여를, 다른 한편으로는 하인들의 평이한 언어와 아가씨들의 교양적 상투어를 대비시키고 있다. 아가씨들이 고도의 재치라고 생각하는 어리석은 언동들은 물질적인 것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뒤틀린 교양관을 반영한다.

이 잰 체하는 인물들이 제공하는 웃음거리는 지금까지도 여전히 신선한 감동을 주며 당시의 관객들에게는 한층 더 그러했을 것이다. 아마도 〈재치를 뽐내는 여인들〉은 〈스가나렐 Sganarelle〉과 마찬가지로 루브르에 인접한 프티 부르봉(Petit Bourbon) 극장에서 초연되었을 것이다. 프티 부르봉은(아무런 통지없이) 헐렸고, 극단은 1661년초 리슐리외가 팔레루아얄(Palais-Royal)에 세운 극장으로 이전했다. 몰리에르의 '파리'극들은 모두 이곳에서 공연되었다.

그 첫작품이 1661년 2월에 공연된 〈나바르의 돔 가르시 Dom Garcie de Navarre, ou le prince jaloux〉인데, 허점투성이인 이 영웅 희극은 완전히 실패로 돌아가 단지의의가 있다면 몰리에르를 분발시켜 〈인간혐오자〉를 쓰게 했다는 점밖에는 없다. 그러나 그러한 실패는 드물었고 파리 극장에서의 유례없는 대성공들에 의해 가려졌다.

추문과 성공

1662년 12월 26일 초연된 〈아내들의 학교〉는, 마치 사람들이 그 무엇도 신성불가침으로 생각지 않는 희극의 천재가 나타났음을 알아차리기도 한듯 추문을 불러일으켰다.

몇몇 훌륭한 평론가들은 이 작품을 몰리에르의 걸작이요, 가장 순수한 희극이라고 평했다. 폴 스카롱이 옮긴 스페인 이야기 〈무익한 경계 La Précaution inutile〉(1655)를 바탕으로 한 이 작품은 현학자 아르놀프가 주인공인데, 그는 여성들을 두려워한 나머지 세간의 풍습을 전혀 알지 못하는 소녀와 결혼하기로 한다.

이 소녀의 깨어나기 시작하는 감수성, 관습의 속박이 없기 때문에 한층 강한 감수성의 섬세한 묘사는 이 희극의 경이로운 점이다. 극은 현학자가 소녀와 사랑에 빠지는 대목에서 절정에 달하는데, 소녀의 말을 더듬어 이해해야 하는 수고는 그가 받는 벌인 동시에 관중에게는 즐거움이었다. 1662년 이후로 그의 극단은 팔레루아얄의 극장을 이탈리아 배우들과 함께 사용했으며, 각 극단이 매주 3번씩 공연했다. 한편 몰리에르는 개인적으로 주문을 받은 희곡들도 썼는데, 이 작품들은 다른 곳에서 초연되었다. 1661년 8월 보에서 공연된 〈불쾌한 사람들 Les Fcheux〉, 1664년 베르사유에서 공연된 첫번째 〈타르튀프〉, 1670년 샹보르에서 공연된 〈부르주아 장티욤 Bourgeois Gentilhomme〉, 1671년 튈르리 궁에서 공연된 〈프시케 Psyché〉 등이 그것이다.

1662년 2월 몰리에르는 아르망드 베자르와 결혼했다.

기록에 남아 있는 대로 그녀가 마들렌의 누이였는지, 아니면 몇몇 동시대인들이 시사하듯 그녀의 딸이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이 결혼에서 세 자녀가 태어났는데, 딸 하나만이 살아 남았다. 믿을 만한 정보는 못 되나 몰리에르에 대해 적대적인 팜플렛에 아르망드의 연애사건이 실리기도 하는 등 그의 결혼생활은 행복하지 못했다.

몰리에르는 무대를 통해 비평가들에게 답변함으로써 〈아내들의 학교〉가 일으킨 반대를 오히려 극단의 신용을 얻는 방향으로 돌렸다.

1663년 6월에 공연된 〈아내들의 학교에 대한 비판 La Critique de L'Ecole des femmes〉과 10월에 공연된 〈베르사유 즉흥극 L'Impromptu de Versailles〉은 모두 단막 토론극이다. 〈아내들의 학교에 대한 비판〉에서는 자신의 희극이 지닌 새로운 스타일의 몇 가지 원칙을 표명했고, 〈베르사유 즉흥곡〉에서는 극단의 배우분장실과 연습에 포함된 뒷얘기들을 놀랄 만큼 사실적으로 그린 연극사를 제시하고 있다.

1664년 5월 첫번째 〈타르튀프〉의 공연이 일으킨 격랑과 추문은 〈아내들의 학교〉가 일으킨 분쟁보다 휠씬 심한 것이었다. 이 위대한 작품의 역사는 몰리에르가 활동하던 당시의 여건을 보여주는 동시에 그의 인내와 투지력을 입증해준다. 그는 보상을 받기까지 5년이나 기다려야 했고 극단 배우들은 생계의 위협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그는 이겼고, 그것은 그의 생애 최대의 성공이었다. 보통 사람들 같으면 진작에 싸움을 포기했을 것이었다. 오늘날 알려진 〈타르튀프〉의 처음 3막에 해당했을 〈타르튀프〉가 초연되었을 때 이미 많은 사람들은 로마 가톨릭 교회의 공연 금지령을 예상했었기 때문이다.

몰리에르는 〈동 쥐앙 Don Juan, ou le festin de Pierre〉을 무대에 올려 사태를 한층 악화시켰다.

그 볼만한 결말에서 무신론자는 지옥에 떨어지지만, 그것은 그가 실컷 즐기고 관중을 분개시킨 다음이었다. 〈동 쥐앙〉은 급한 재정적 필요에서 만들어졌으나, 값비싼 실패로 끝났다. 15회 공연된 뒤 무슨 이유에서인지 중단되었지만 몰리에르는 그것을 공연하거나 출판하지 않았다. 그러나 〈동 쥐앙〉은 그의 예술의 둘도 없는 본보기였다. 주인공 동 쥐앙은 극단적 귀족주의 원칙을 고수하여 부모나 의사, 상인이나 신에 대한 온갖 종류의 의무들을 거부하는 반면,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에 대한 의무들을 수행할 것을 요구한다.

그의 순박하고 겁많고 미신적인 하인 스가나렐은 모든 면에서 그와는 반대이다. 이 두 인물은 돈 키호테와 산초에 대응하는 프랑스적 전형들이다.

당국과의 싸움에 휘말린 와중에서도 몰리에르는 극단을 혼자 힘으로 이끌어나갔다. 배우도 작가도 확보할 수 없었던 그는 더 많은 작품을 씀으로써 작가의 부족을 메워나갔다. 1664년 그는 장 라신의 첫 희곡 〈라 테바이드 La Thébaïde〉를 무대에 올렸으나, 다음해에 라신은 자신의 2번째 희곡 〈알렉산더 대왕 Alexandre le Grand〉을 몰리에르의 배우들이 공연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보다 오랜 전통을 지닌 다른 극장에 넘겼다.

몰리에르는 당국으로부터 끊임없이 괴로움을 당했다. 이러한 장애들은 몰리에르에 대한 왕의 호의로 인해 어느 정도 완화되었을지 모르나, 왕의 호의란 변덕스러운 것이었다. 약속된 연금은 지불되지 않을 때가 많았다. 궁정에서는 위대한 작품보다도 경쾌한 극을 원했다. 그의 극단의 수입은 불확실하고 유동적이었다. 파리에서 보낸 14년 동안 몰리에르는 무대에 올린 95편의 희곡 중 31편을 썼다. 자신의 질병, 대왕대비의 승하에 따른 7주간의 극장 폐쇄, 〈타르튀프〉 및 〈동 쥐앙〉의 공연금지 등 잇단 불운을 타개하기 위해 그는 한 시즌(1666~67)에 5편의 희곡을 쓰기도 했다.

이 5편 중에서 〈억지 의사 Le Médecin malgré lui〉만이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다음 시즌에는 〈인간혐오자〉가 거의 처음부터 식견있는 관객들로부터 걸작으로 평가되었다. 이 작품은 별다른 출전없이 몰리에르 극단의 자체적 요소들로부터 만들어진 응접실 희극이다. 몰리에르는 몸소 알세스트 역을 맡았는데, 이 인물은 새로운 종류의 바보로서 고매한 원칙들과 엄격한 표준을 지녔으나 천성적으로 모든 사람에 대한 맹목적인 비판자이다.

알세스트는 클리멘(몰리에르의 아내 아르망드가 연기했음)과 사랑에 빠지는데, 그녀는 탁월한 희극적 인물로서 어떤 경우에도 막힘이 없는 사교계의 총아이다. 극의 구조는 시적이리만큼 단순하다. 알세스트는 우울한 얼굴로 극 전체를 휩쓸고 다니며, 어떤 '정직한' 사람도 자신과 뜻이 맞지 않는다고 불평한다. 그 또한 타르튀프만큼이나 자신의 본성을 알지 못한 채, 자신의 눈에 들어 있는 들보는 보지 않고 남의 눈에서 티끌을 찾기에만 열심이다.

교회는 몰리에르에 대한 싸움에서 거의 승리함으로써, 〈타르튀프〉를 5년간, 〈동 쥐앙〉을 평생동안 공연금지시켰다.

5막짜리 〈타르튀프〉는 1667년에 단 1번 공연되었으나 경찰총장에 의해 금지되었고, 대주교는 그것을 다시 공연하면 파문하겠다고까지 위협했다. 이에 대해 몰리에르는 다시금 왕을(심지어 전쟁터에서도) 설득하는 한편, 〈사기꾼의 희극에 대한 서한 Lettre sur la comédie de l'Imposteur〉을 발표해 자신의 극을 옹호했다. 1668년 한 해 동안 그는 〈앙피트리옹 Amphitryon〉(1. 13)·〈조르주 당댕 George Dandin〉(7. 18 베르사유)·〈수전노 L'Avare〉(9. 9) 등을 공연해 극단을 결속시켰다.

몰리에르처럼 독창적인 희극작가는 어느덧 고대의 희극적 인물인 구두쇠의 근대적 묘사를 시도하게 되었다. 그의 1668년 희극들 중 마지막 작품인 〈수전노〉는 운문처럼 읽히는 산문인데, 상투적인 상황들이 모두 재연되나, 그 정신은 몰리에르의 다른 희극들과 달랐으며 모든 사람의 기호에 맞는 것도 아니었다. 그가 창조한 구두쇠는 살아 있는 역설로서, 돈에 대한 숭배에서는 비인간적이지만 존경과 애정을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는 극히 인간적이다.

그의 광기는 잔인성과 병적인 고독, 심지어는 정신이상까지 시사하는 것으로, 이 희극은 희극에서 웃음을 기대하는 사람들에게는 너무 삭막하다. 그래서 괴테는 그것을 차라리 비극적이라고도 했으나, 이전 작품들에서와 마찬가지로 정신과 의지의 힘은 비인간적인 목표들에 봉사하며 본능 및 극히 '인간적인' 본성에 반대된다.

희극적 요소의 기초가 되는 것은 명랑함보다는 이러한 부조리와 부조화이다.

흔히 소극(笑劇)으로 불리는 1668년의 2번째 희극 〈조르주 당댕〉은 몰리에르가 만든 가장 위대한 작품들 중의 하나이다. 그 주인공인 바보는 자신의 어리석음을 인정하면서도 지혜가 그에게 별다른 도움이 되지 못하리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만일 사태가 정말로 나쁘게만 돌아간다면 현명해봐야 소용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실 자신이 옳다고 하더라도 그 사실을 그는 결코 증명할 수 없다. 이 희극의 주제는 사소한 듯하나 무한한 암시력을 갖는 것으로, 전혀 새로운 범주의 희극을 제시한다.

1669년에는 웬일인지 공연허가가 얻어졌고 〈타르튀프〉의 장기공연이 시작되어 그해에만도 60회 이상 공연되었다.

다른 어떤 작품보다도 몰리에르를 곤경에 빠뜨렸던 이 희곡의 주제는 한 지방의 위선자가 그의 여주인을 유혹하는 것을 보고 얻은 듯하다. 작품의 3가지 형태 중에 마지막 것만이 전해진다. 1664년 왕 앞에서 공연되었던 첫번째 〈타르튀프〉는 3막으로 구성되었는데, 부르주아 가정에 들어간 철저한 사기꾼에게 주인이 자기 딸을 주고 자신의 아들에게서 상속권을 빼앗는다는 이야기이다. 당시에는 세속의 신앙지도자들이 가정에 자리잡고 생활을 훈계 지도하는 것이 흔한 일이었다.

이 '성스러운' 인물은 고용주의 아내와 정사를 벌이다가 발각되자, 거창한 자기비난으로 위신을 회복하고 주인을 설득해 자기를 용서하게 할 뿐 아니라 가능한 한 자주 아내를 돌볼 수 있게 만든다. 몰리에르는 이 주제에서 훨씬 더 큰 희극적 가능성들을 엿보았던 듯 5막으로 확대했는데, 오늘날 남아 있는 5막짜리 〈타르튀프〉는 2개의 유혹 장면을 포함하며 타르튀프 자신의 희극적 역설(비인간적이리만큼 금욕적인 체하면서 실제로는 극히 인간적인 난봉꾼이라는)로 흥미를 옮기고 있다.

신심 깊은 자들의 마음을 거스르기에는 이보다 더 적합한 주제도 없을 것이다. 〈아내들의 학교〉의 아르놀프처럼, 타르튀프도 재치만을 믿고 본능을 잊었기 때문에 불행을 자초하고 있다.

피에르 브리사르가 그린 〈타르튀프〉 삽화
피에르 브리사르가 그린 〈타르튀프〉 삽화

후기 희곡들

몰리에르는 〈타르튀프〉 분쟁으로 지친 나머지 반복되는 질병을 이기고 새 희곡들을 써낼 힘이 없었던 것 같다. 사실상 그는 이후 4년밖에 더 살지 못했다. 그러나 1669년에는 샹보르에서 왕을 위해 〈푸르소냐크 씨 Monsieur de Pourceaugnac〉를, 1670년에는 〈부르주아 장티욤〉을 공연했다.

〈부르주아 장티욤〉은 부르주아, 즉 중·상류층의 사회적 상승이라는 당대의 주제를 다룬 작품으로, 그의 모든 희극들 중 가장 근대적인 주제를 다루고 있다. 주인공 주르댕은 불유쾌한 아첨꾼이라기보다는 어리석지만 즐겁고 순진하며 성실한 인물이다. 그의 어리석음은 그자신이 경멸해 마지않는 인정많은 기질 속에 들어 있다. 이것은 몰리에르의 가장 행복한 형태의 희극이다. 남자 주인의 어리석음은 아내와 하인의 상식으로 상쇄된다.

병석에서도 창작을 계속했던 몰리에르는 1671년 〈프시케〉와 〈스카팽의 간계 Les Fourberies de Scapin〉를 썼다. 뒤이어 1672년에는 〈유식한 여자들 Les Femmes savantes〉이 나왔는데, 이런 주제는 자칫 지적인 여성들에 대한 풍자가 되기 쉽지만(어떤 이들은 몰리에르의 작품이 바로 그렇다고 생각했음) 몰리에르는 자기 주장이 강하고 유식한 아내를 은근히 두려워하는, 분별있는 부르주아를 묘사한 것이다. 〈기분으로 앓는 사나이 Le Malade imaginaire〉는 죽음과 의사를 두려워하는 우울증 환자에 대한 것으로, 몰리에르의 마지막 희극이다.

그것은 의학적 전문용어들과 직업주의의 자세한 묘사, 지식은 있으되 양식(良識)은 전혀없는 사이비 의사의 우둔함, 그리고 다른 인물들의 미신과 탐욕과 야바위에 대항하는 젊고 분별있는 연인들의 온건함 등이 어우러져 강한 효과를 자아내는 희극이다. 1673년 2월 17일 이 희곡의 4번째 상연 도중에 몰리에르는 무대 위에서 쓰러졌고 리슐리외가에 있는 집으로 실려갔으나 끝내 일어나지 못했다. 그는 성사를 통해 배우라는 직업을 형식적으로나마 포기할 기회를 갖지 못했기 때문에 2월 21일 해가 진 뒤에 예식없이 매장되었다.

배우·극작가로서의 몰리에르

몰리에르의 연기는 실망과 동시에 영광의 원천이었다.

그는 비극 배우가 되기를 원했으나 당대의 취향은 그와 반대되는 것으로, 관중은 성내고 기뻐하는 위풍당당한 비극적 문체를 선호했다. 몰리에르는 체격과 유연성, 풍부한 얼굴 표정을 지닌 타고난 희극배우였다. 무대를 떠나서는 그리 말을 많이 하지도 않았고 명랑하지도 않았으나, 실생활 그대로의 말씨를 모방하고 구사할 줄 알았으며 배우의 지치지 않는 원기를 지니고 있었다. 그는 사소한 사건으로도 희극적인 장면을 연출할 줄 알았으며 자신을 무대에 올려놓을 만반의 태세가 되어 있었다.

그는 한 인물에게는 자신의 기침을, 다른 인물에게는 자신의 기분을 부여했으며, 실제 연습을 통해 작품을 만들었다. 그가 창조해낸 위대한 희곡 속의 인물은 실제 그의 극단 멤버들과도 같다. 그가 실제로 병들어 있었을 때 병자 역을 연기하다가 죽었다는 것은 그에게 걸맞은 일이었다.

그의 연기는 창작에도 영향을 미쳐, 그는 자신이 아주 자연스럽게 연기할 수 있는 것만을 썼다.

그는 성마른 역할, 하인 역할, 오쟁이진 남편 역할, 어리석은 부르주아 역할, '몰리에르 녀석'을 저주하는 미신적인 노인 역할(찰리 채플린과의 비교는 지금까지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음) 등을 맡았다. 그에게는 동물적인 에너지나 모방에 대한 재능 이상의 무엇, 극적 비전의 강렬함이라고밖에 부를 수 없는 자질이 있었다. 이 점에서도 배우들은 학자들이 간과했던 그의 천재적 양상, 즉 무대 위에서의 격렬함을 재발견했다.

그의 희곡들을 이성에 대한 옹호론으로 본다면 그 생생함을 놓치게 될 것이다. 그의 이성은 그로 하여금 부조리한 것에 생기를 부여했다. 그의 인물들은 쉽게 흥분할 뿐만 아니라 앞뒤가 맞지 않을 정도로 흥분한다. 그는 극의 생생함과 생명감을 위해 플롯을 희생하며, 고전 작가이기는 하지만 창작의 엄격한 규칙들을 쉽사리 저버린다.

몰리에르가 이성의 냉정한 수호자이며 자신의 극에 등장하는 보다 이성적인 인물들과 관점을 같이 한다는 주장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고 있으나, 그가 활동하던 당시의 환경을 감안한다면 믿기 어렵다.

당시만 해도 희극이란 설교가 아니며, 희극에서 어떤 교훈이 얻어질 수 있다 해도 부차적 효과일 뿐 교훈주의와는 정반대된다고 생각했다. 생각들이 표현되는 것은 관중을 즐겁게 하기 위해서이지, 작가의 견해를 전달하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만일 그에게 위선이나 무신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는다면, 그는 그런 질문에 놀라면서 극장은 '견해'를 제시하는 곳이 아니라고 답변을 회피했을 것이다.

몰리에르가 결혼이나 교회, 지옥, 계급 간의 격차 등에 대해 자기 의견을 표명하려 했다는 증거자료는 전혀 없으며, 엄격히 말해 이런 문제들에 대한 그의 견해는 알 수 없다. 알려진 것이라고는 그가 극장 안에서 극을 위해 일했고 놀라운 극적 환기력으로 그 어떤 상상적 장면에도 생기를 부여했다는 사실뿐이다. 만일 그가 무신론자에 대해 동정적인 초상을 남겼다면 그것은 자유사상을 옹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는 촌스러운 하인도 생생하고 동정적으로 그렸다. 그의 희곡들이 사물을 증명하고 교훈을 전달하는 것이라고 보는 학자들은 그의 작품을, 작품이 지닌 환상과 상상력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몰리에르의 작품이 갖는 힘은 그 언어의 창조적 활기에 있으므로, 그의 작품들을 풍속희극·인물희극·소극으로 나누는 전통적 분류는 별 소용이 없다.

그는 어떤 경우에도 특정한 종류의 희곡을 쓰려는 의도를 가지고 출발한 것 같지는 않다. 그는 〈강제 결혼 Le Mariage forc〉에서는 라블레의 인물 파뉘르주가 표명하는 결혼에 대한 회의로부터, 그리고 〈억지 의사〉에서는 매를 맞지 않으려고 의사인 척하는 나무꾼에 대한 중세의 우화로부터 시작한다. 그러한 대강의 골격을 기초로 하여 생동하는 인물을 창조할 뿐만 아니라 그 인물이 전혀 다른 성격을 드러냄으로써 처음 표현된 역할들이 역전되는 토론의 장을 마련한다.

극의 매력은 실제 일어나는 일보다는 지적인 리듬에, 이야기보다는 토론에 있으므로, 플롯을 다시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는 본질을 전달하지 못한다.

독창적 희극관

몰리에르에 대한 공격들은 거기에 대한 답변으로 명백한 미학적 진실들을 표명할 기회를 그에게 제공했다.

가령 〈아내들의 학교에 대한 비판〉에서는 비극은 영웅적일 수도 있지만 희극은 자연에 거울을 들이대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려진 인물들이 살아 있는 전형들로 보이지 않는다면 희극에서 성공했다고 할 수 없다……점잖은 사람들을 웃긴다는 것은 이상한 노릇이다." 그리고 혹자들이 작가들에게 부과하려 애쓰는 규칙들에 대해서는 "나는 기쁨을 주는 것이야말로 황금률이며, 성공하는 극은 올바른 방식을 따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하고 있다(예술철학,유머).

〈아내들의 학교〉에 대한 공격들은 〈타르튀프〉나 〈동 쥐앙〉이 일으킨 폭풍에 비하면 사소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작품들에 대한 공격은 시인으로부터 예술적 원칙에 관한 값진 진술들을 끌어냈다. 〈동 쥐앙〉은 공식적으로 비난된 적이 없으므로 그것에 대한 공개 답변도 없다. 〈타르튀프〉를 옹호하는 자료들로는 왕에 대한 2편의 상소문, 1669년의 초판본에 실린 서문(이것들은 모두 몰리에르의 자비로 발간되었음)과 1667년의 〈사기꾼의 희극에 대한 서한〉이 있다. 상소문들과 서문이 미학적으로 실망스러운 것은 몰리에르가 그의 적대자들이 선택한 쟁점에서 싸울 수밖에 없었고, 따라서 희극도 교훈적이어야 한다고 인정하고 있기(몰리에르가 그렇게 생각했다는 다른 증거는 없으므로, 그가 그런 식으로 논한 것은 강요되었을 때뿐이라고 할 수 있음) 때문이다.

〈사기꾼의 희곡에 대한 서한〉은 훨씬 더 중요한 자료로서, 의미심장한 몇 줄 속에 〈타르튀프〉뿐만 아니라 몰리에르의 새로운 희극 개념의 미학적 기초를 표명하고 있다.

"희극적인 것이란 자연의 혜택이, 우리가 그것을 보고 피할 수 있도록, 모든 비이성적인 것에 부여한 외적이고 가시적인 형태이다. 희극적인 것을 알기 위해 우리는 이성적인 것을 알아야 하는 바, 희극적인 것은 이성적인 것의 부재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부조화야말로 희극적인 것의 핵심이다.

따라서 모든 거짓말, 위장, 속임수, 가장, 사실이 아닌 모든 외적인 현시, 단일한 근원에서 나오는 행동들간의 모든 모순, 이 모든 것은 본질적으로 희극적이다."

여기에서 몰리에르는 희극적인 것에 대해 자신의 개념이 갖는 새로운 점을 정확히 지적하고 있다. 희극이란 현명한 것과 어리석은 것, 옳은 것과 그른 것을 나란히 놓고 보았을 때 생겨나는 항구적인 이중성에 기초하며, 우스움이란 우발적 효과라는 것이다. 이러한 희극관이야말로 그의 창안이고 그의 영예이다.

몰리에르의 주요한 기술적 양태는 여러 층위 내지는 문맥을 뒤섞는 것이다.

인물들은 한 가지 역할을 하도록 만들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실을 잊어버린 듯 엉뚱한 때에 나서며 역할을 과장되게 연기한다. 그래서 이러한 부수적 전개에 주의하는 사람은 뒤섞인 층위들을 끊임없이 의식하게 된다. 〈억지 의사〉에서 사람을 두드려패 의사인 척하게 만든다는 발상은 그리 세련되지 못한 것이지만, 몰리에르는 이러한 발상을 가지고 놀듯 나무꾼으로 하여금 새로운 역할을 즐기고 전문용어들을 주워섬기다가 나중에는 그것을 가지고 어찌할 바를 모르게 만든다.

그는 히포크라테스에 대해 공허한 말을 지껄이고, 라틴어를 모르는 환자를 만나자 말뜻에 신경쓸 필요가 없으므로 기뻐한다. 오른쪽에서 심장을 찾다가 실수를 들킨 그는 저 유명한 대사로 태연자약하게 대꾸한다. "우리가 그걸 다 바꿔놓았다오." 돈을 강탈당한 구두쇠는 비감하지만 그가 내뱉는 부조리한 언어는 비감하기는커녕 웃음을 자아낸다. "……다 끝났다……나는 죽는다……나는 죽었다 ……나는 묻혔다." 그는 그렇듯 불합리하고 과장된 어조로 정의를 요구하며 법정들을 고발하겠다고 위협한다. 몰리에르의 〈인간혐오자〉는 이상으로서의 정의와 사회제도로서의 정의가 어떻게 뒤섞이는가를 잘 보여준다.

"나는 정의를 내 곁에 두었는데도 재판에서 졌다!" 자신에게는 세계질서의 수치라고 생각되는 것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의 머리가 돌았다는 증거일 뿐이다. 몰리에르의 극적 언어는 그러한 간결성을 얻고 있다.

프랑스적 천재 몰리에르

볼테르가 몰리에르를 "프랑스의 화가"라고 한 것은 그의 희극들이 그리고 있는 프랑스적 태도의 범위를 시사해준다. 그때문에 프랑스인들은 그를 특별한 의미에서 자신들의 작가라고 생각하며 그에 대해 각별한 흥미를 가져왔다.

그들은 외국인들이 간과하기 쉬운 몰리에르 작품의 양상들을 강조하는데, 그중에서 3가지가 주목할 만하다.

첫째, 그의 작품들은 고도의 형식성을 지니고 있다. 그는 결코 사실주의(있는 그대로의 삶)만을 제시하지 않으며, 거기에 항상 빛과 운동, 음악과 춤과 언어를 융합하는 양태와 형식을 부여한다. 그의 극에서 막간극을 생략하는 현대 제작들은 본래의 효과를 상실한 것이다. 인물들의 이합집산, 장면과 대사들의 배열, 희극적인 대화들도 사실주의를 무시하고 이루어진다.

둘째, 외국인들이 심리학을 보는 곳에서 프랑스인들은 시를 본다. 그들은 그의 희곡들을 사회적 광기에 대한 연구가 아니라 사상들을 잠깐 스쳐 요점을 만들어내는 환상의 양태라고 본다. 〈인간혐오자〉는 사례연구나 프랑스적 '햄릿'이 아니라 교묘하게 어우러진 목소리들과 태도들의 합창으로서 개인주의에 대한 비판을 싣는다. 그의 희곡은 그 중심주제를 끊임없이 환기함으로써 사람들을 매료시킨다. 사람이 자기 마음을 말하는 방식은 여러 가지여서, 이상주의적이거나 중상모략적이거나 거칠거나 원한에 차 있거나 또는 단순히 어리석다. 프랑스인들이 보기에 몰리에르의 뛰어난 점은 사회 내에서 자기중심성이라는 신비를 희롱하는 이러한 환상에 있다.

셋째, 프랑스에서 높이 평가되는 몰리에르의 자질은 인간의 여러 측면을 보편적 인간으로부터 구별해내는 그의 지적인 예리함이다. 몰리에르에게 깊은 영향을 미친 16세기의 수필가 몽테뉴는 지식이나 예의, 기술처럼 후천적으로 얻어지는 자질들과, 인간성·동물성처럼 다른 수식 없이 '인간 본성'이라 할 만한 것을 구별한 바 있다. 몰리에르는 이런 식으로 자신이 창조한 인물들을 대비하기를 즐겼는데, 그의 극에서는 종종 사회적 표피가 벗겨져나가고 진짜 인간이 나타나며 극 중의 많은 대화들은 예의바르게 시작하여 공공연한 모욕으로 끝나기도 한다.

몰리에르는 여러 가지 형태로 자연과 재치를 대립시켰다. 그의 희극들은 생각할 수 있는 것과 그 너머의 것까지도 포함하며, "그건 상식에 어긋나는데요, 하지만 어떻든 사실은 사실이지요"라고 〈앙피트리온〉에서 매맞은 하인이 말하듯이 이성과 사실이 양립하는 적은 별로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