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철학

예술철학

다른 표기 언어 philosophy of art , 藝術哲學

요약 예술의 본질 또는 현상에 관하여 그 원리를 고찰하는 철학의 한 부문.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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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예술에 대한 해석
  2. 예술작품과 매개요인
    1. 개요
    2. 매개요인에 따른 예술의 분류
    3. 언어적 예술과 비언어적 예술
  3. 언어적 예술과 비언어적 예술
  4. 모방주의 예술론
  5. 표현주의 예술론
  6. 형식주의 예술론
    1. 개요
    2. 유기적 통일성
    3. 복합성 혹은 다양성
    4. 주제와 주제의 변조
    5. 전개
    6. 균형
  7. 실용주의 예술론
    1. 개요
    2. 즐거움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예술
    3. 진리 또는 지식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예술
    4. 도덕적 개선을 위한 수단으로서의 예술

예술철학에 대한 논의에 앞서 예술철학과 예술비평 사이의 개념 구분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예술비평의 목적이 주어진 예술작품을 보다 더 폭넓고 깊이 있게 이해하거나 즐기는 데 있다면, 예술철학의 목적은 비평가들에게 예술비평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개념적 기초를 마련하는 것으로 예술철학자의 과제는 비평가의 과제보다 한결 더 근본적인 것이다. 어떤 음악 작품이 '표현주의적'이라고 말하는 것이 비평가의 몫이라면, 그 작품을 '표현주의적'이라고 말할 때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또한 그러한 판단은 어떻게 해서 내려지게 된 것인가 하는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 예술철학자의 몫이다.

요컨대 예술철학자들은 비평 활동에 근거가 되는 기본 개념들을 검토하거나, '예술', '미학적 가치', '표현' 또는 비평가들이 사용하는 그밖의 개념들을 규정하고 정립함으로써 비평가들이 보다 더 조리있고 명료하게 예술작품에 대해 논의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그렇다면 예술철학자의 직접적인 관심사는 무엇인가? 물론 '예술'이 예술철학자의 주된 관심사이다.

그러나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즉 예술이란 무엇을 가리키며, 예술과 비(非)예술 사이의 구분은 무엇을 근거로 한 것인가? 이러한 물음에 대해 수많은 철학자들이 나름대로 답변을 제시해왔으며 그 답변 또한 헤아릴 수 없이 다양하다. 그러나 예술작품과 관련하여 모든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인정하는 것은 '예술작품이란 인간이 만든 것, 즉 자연물이 아닌 인공물'이라는 점이다. 물론 이와 같은 정의에도 문제는 있다. 즉 우리가 보통 예술작품이라고 말하는 것 이외에도 건물·가구·도시, 심지어 쓰레기도 인공물이란 정의에 포함된다.

말하자면 아름다운 것이든 추한 것이든, 또는 선한 것이든 악한 것이든, 유익한 것이든 파괴적인 것이든 간에 자연에 인간이 무언가의 변화를 가한 경우 그것은 예술작품으로 정의될 수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예술작품이라는 개념은 한결 더 좁은 의미로 사용된다. 예술작품이라는 말은 미학적 반응을 유도하는 대상을 지칭하는 데 사용된다. 이와 관련하여, '미적 예술'(fine art)과 '실용 예술'(useful art) 사이의 구분이 가능하다.

'미적 예술'이란 실용적 목적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하여 즐기는 예술작품을 지적하는 데 쓰이는 개념이며, '실용 예술'은 일차적으로 효용성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지만 미학적 기능도 지닌 예술작품을 가리키는 데 쓰이는 개념이다. 미술·음악·문학이 전자의 영역에 속한다면 공예품·자동차·도자기 등이 후자의 영역에 속한다. 양자의 경계선 사이에 놓이는 것으로 건축물을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어떤 건축물의 경우에는 실용적 목적이 주가 되고 미학적 측면이 부차적인 것이 되지만, 어떤 건축물은 실용적 목적을 떠나 미학적 측면만을 지니는 것도 있다.

후자의 예로 고대 그리스의 신전과 같은 유적을 들 수 있는데, 이와 관련하여 이 건축물이 원래 신을 숭배하기 위한 실용적인 목적에서 건축된 것이라는 점도 아울러 고려해야 한다. 이경우 실용성은 창작자의 의도를 고려하여 제기될 성질의 문제가 아니라 오늘날의 기능과 관련하여 제기될 성질의 문제인 것이다. 바꾸어 말해 문제의 작품이 '실용 예술'인가 아닌가는 창작자의 의도와 상관없이 현재 어떤 기능을 하는가에 따라 결정될 수도 있는 것이다.

예술에 대한 개념 규정이 보다 더 협소한 관점에서 이루어질 수도 있다.

먼저 '예술'이라는 개념은 시각예술, 그 중에서도 일부 특정한 시각예술 작품에 한정되어 사용되기도 한다. 물론 예술철학의 관심 대상으로서의 예술은 시각예술뿐만 아니라 음악이나 연극·시 모두에 적용되는 개념이다. 한편 예술이라는 개념은 무언가 미적 가치를 지닌 대상에 적용되는 개념으로 쓰이기도 한다. 미술관에서 작품을 감상하며 "그건 예술이라고 할 수 없다"라고 누군가가 말할 때, 예술이란 가치 판단의 개념으로 쓰인 것이 된다.

예술이라는 개념은 일반적으로 창작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 산물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지만, 창작 행위의 과정을 지칭하는 데 사용되기도 하는 것이다.

어떤 방향으로 논의를 전개하든 항상 유의해야 할 사항은 예술에 대하여 내린 모든 정의가 실제로는 정의라고 할 수 없고 다만 예술의 본질에 관한 이론이라는 점이다. 즉 세상에 존재하는 무언가를 예술작품으로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이 선험적으로 존재한다는 식의 논리를 전제로 하여 정립된 이론인 것이다.

대부분의 경우 이 이론들은 '이론'으로도 만족할 만한 것이 되지 못한다. 그러나 적어도 예술작품은 자연물이 아닌 인간이 만든 것이며, 부분적으로든 전체적으로든 미학적 체험과 관계되는 것이라는 점, 그리고 미학적 특성은 예술가의 의도와 전혀 관계없는 것일 수 있다는 점 등이 예술철학에 관한 논의에서 최소한 고려되어야 할 사항이다.

예술에 대한 해석

예술작품과 관련하여 '해석'과 '평가'의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그러나 평가의 문제는 '미학'과 관련된 주제이므로 여기에서 새삼스럽게 문제삼지 않기로 한다. '해석의 문제에 대해서 어떤 요인이 예술작품에 대한 해석 행위의 지침이 되어야 하는가'라는 원론적인 문제 하나만을 짚고 넘어가기로 한다.

하나의 극단적 견해로 '고립주의'가 있다. 이러한 입장에 의하면 예술가에 대한 전기적(傳記的) 정보라든가 역사적 배경, 그밖의 요인들은 작품의 의미를 파악하는 데 관계가 없거나 심지어 해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변 요인들에 기대지 않고 작품에 대한 이해를 끊임없이 시도하는 가운데 작품에 대한 최상의 이해에 도달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또 하나의 극단론은 '맥락주의'인데, 예술작품은 그것과 관련된 맥락 또는 배경 속에 놓고 볼 때 비로소 제대로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이다. 맥락을 중시하는 사람들에 의하면, 문학작품뿐만 아니라 음악이나 미술과 같이 비표현적 예술작품도 이와 같은 방법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두 극단론 중 어느 하나를 고집할 이유는 없다.

경우에 따라 고립주의를 택할 수도 있고, 맥락주의를 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느 쪽을 택하든 맥락을 중시하는 사람들이 예술작품의 감상에 필요하거나 도움이 된다고 주장하는 다음과 같은 사항들에 대해 누구나 한번쯤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첫째, 동일 예술가가 창작한 여타의 작품들을 연구하는 것이다. 한 예술가가 문제의 작품 외에 작품들을 창작했다면, 특히 동일한 장르에 속하는 작품의 경우 이 작품들에 대한 이해는 문제의 작품을 이해하는 데 적지않은 도움이 될 수 있으며, 주어진 작품에 대한 이해와 감상을 보다 충실한 것으로 만들 수 있다.

둘째, 다른 예술가들이 창작한 동일 장르의 작품들, 특히 양식 혹은 전통의 면에서 공통점을 지닌 작품들을 연구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J. 밀턴이 남긴 전원시 〈리시더스 Lycidas〉를 이해 또는 감상하고자 하는 경우, 전원시 전통에 대한 연구가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셋째, 예술 매체와 관련된 사실에 관한 연구는 독일의 작곡가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 시대에 파이프 오르간이 악기로서 어떠한 문제점과 이점을 지녔는가, 또는 고대 아테네의 극장에서 비극 공연에 어떤 표현 형식이 사용되었는가 등에 관한 연구는 예술가가 채용한 예술적 전통이나 작풍과 함께 작품에 대한 이해를 증진시키고 오해를 불식시킬 수 있다.

넷째, 예술가가 살았던 시대에 관한 연구, 특히 시대 정신과 당시 유행하던 사상, 당대의 미학적·사회적·경제적·정치적 조건 및 지역 조건과 같이 예술가의 정신적 성장에 영향을 미쳤던 복합적 요인에 관한 연구는 때때로 예술작품을 이해하는 데 별 도움이 되지 않을 수도 있으나, 문학 작품을 이해하는 데는 상당한 도움이 될 수 있다. 다섯째, 예술가의 생애에 관한 정보는 예술작품 자체로부터 주의를 분산시킬 수도 있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작품에 대한 이해를 고양시킬 수 있다.

예술가에 대한 전기적 정보가 작품 자체에 대한 이해와 어떤 연관성이 있는가에 대한 논란이 있을 수 있다는 점과, 예술가의 전기는 오로지 목적에 대한 수단으로 예술작품에 대한 감식과 이해를 강화시키기 위한 수단일 뿐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여섯째, 작가의 의도에 관한 연구는 20세기 중엽에 격렬한 논쟁을 일으켰던 문제이다.

여러 가지의 서로 대립되는 해석이 존재할 때, 또는 작품을 어떤 각도에서 이해해야 할 것인가의 문제가 생길 때,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라는 물음에 대해 다음과 같은 답변이 있을 수 있다. 예술가가 남긴 기록이나 회고록, 또는 그를 아는 사람들의 증언을 참조하고, 이를 바탕으로 주어진 작품이나 문제의 부분과 관련하여 작가의 의도가 무엇이었는가를 찾아내어야 한다는 답변이 있을 수 있다. 이런 종류의 답변을 옹호하는 사람들에 의하면, 작품에 관한 한 그 작품의 창작자 자신의 발언과 의도가 곧 '법'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에 대해 일군의 이론가들은 '의도의 오류'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강력하게 비판하고 있다. 이들은 예술가가 '의도한 바'가 그대로 작품의 의미라고 믿는 것은 일종의 오류라고 지적하면서, 예술작품이란 예술가의 도움없이 자체의 힘으로 홀로 설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예술가의 뜻이 작품에 충분히 구현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외적인 정보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면, 이는 작품 자체의 예술적 결함으로밖에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일단 예술가가 작품을 완성하여 세상에 내놓게 되면, 이것은 이미 그 예술가에게 속한 것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작품의 해석이 문제될 경우에도 예술가는 단지 수많은 해석자들 중 1명으로 존재할 뿐이라는 것이다. 이때문에 예술가의 말을 존중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최종의 권위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는 어느 정도 타당한 것이며, 사실 예술가의 진술이 예술작품의 비밀에 도달하기 위한 유일한 열쇠일 수 없다. 그러나 최소한 여러 열쇠 중 하나일 수는 있으며, 이런 이유 때문에 필요할 때 쓰지 않을 이유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예술작품과 매개요인

개요

예술작품이 존립에 관여하는 매개요인에 초점을 맞출 때 다음과 같은 사항들이 문제시될 수 있다.

첫째, 주어진 예술작품의 생성 기원에 대한 문제로서 작품 창작 당시 예술가의 의식적 또는 무의식적 정신 상황, 작품과 관련된 예술가의 의도, 당시의 정신 상황을 유도한 모든 외재적·내재적 요인들이 문제될 수 있다. 둘째, 공적으로 접근 가능한 대상으로서의 예술작품 또는 예술가가 사람들에게 제시한 물리적 실체로서의 예술작품에 있어서 예술작품을 이루는 물리적 매개요인으로는 색채(그림), 나무나 석조(조각), 소리(음악), 언어(문학)가 있으며, 이들 요인을 매개로 하여 사람들은 자신의 감각을 통해 예술작품을 수용한다.

셋째, 미학적이든 비미학적이든 작품을 체험한 사람들(감상자)에게 작품이 미친 영향이 문제될 수 있다. 예술작품 그 자체에 관심을 갖고 작품에 접근하는 경우의 작품에 대한 체험을 미학적 체험이라고 한다면, 무언가 다른 목적을 갖고 예술작품에 관심을 갖는 경우의 체험을 비미학적인 체험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미학적 체험이란 예술작품의 소비자와 관계되는 것이고, 이에 대응되는 개념으로 예술가의 예술적 체험이 있을 수 있다.

매개요인에 따른 예술의 분류

목적이나 의도 또는 효과에 따라 예술의 분류가 가능하긴 하나, 가장 일반적이고 근본적인 예술 분류의 기초는 물리적 매개요인이다.

시각예술에는 삽화나 회화와 같이 2차원적인 작품 및 조각이나 건축과 같은 3차원적인 작품이 속한다. 청각예술에는 노래나 오페라, 그밖에 문학과 음악을 혼합하여 놓은 작품이 아닌 모든 형태의 음악이 속한다. 시각예술의 매개요인이 시각적 자료이듯이 청각예술의 매개요인은 소리이다. 언어예술로서 문학은 명백히 시각예술 및 청각예술과 구분이 된다.

물론 시의 경우 소리내어 낭송할 때도 있고, 이때 소리가 문제되지만, 소리만을 문제삼는다면 문학이란 가장 빈약한 예술이 될 것이다. 시에서 소리가 효과적인 가치를 지니게 되는 것은 낭송되는 단어의 의미가 99% 이해될 때이다. 알지 못하는 언어로 된 시나 연극의 대사를 누군가가 낭송하는 것을 듣는 경우, 문학에서 말의 의미가 왜 중요한가를 쉽게 이해하게 될 것이다.

유사한 논리로 문학은 시각 예술일 수도 없다. 비록 인쇄된 내용을 눈으로 읽는 것이 문학에 접근하는 방법이긴 하지만, 활자화된 문자도 낭송되는 말과 같이 의미를 전달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요컨대 문학은 시각예술이나 청각예술과 분류되어야만 한다.

혼합예술은 그밖의 예술과 위에 열거한 3가지 유형의 예술을 혼합하여 놓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우선 연기와 관계되는 모든 예술이 여기에 속한다. 연극은 언어예술(대사)과 시각예술(의상·무대)의 혼합물이며, 오페라는 음악과 언어예술(가사), 시각예술(의상·무대)의 혼합물이다.

무용은 몸의 움직임이나 무대 등과 같은 시각적 요소와 음악을 혼합해놓은 것이며, 때때로 언어적 요소(대사)가 가미되기도 한다. 노래는 음악과 언어적 요소를 결합해놓은 것이며, 영화는 시각적 요소와 언어적 요소, 그리고 일반적으로 음악적 배경까지 동반한 혼합예술이다.

이상의 분류는 다시 공간예술과 시간예술로 재분류될 수 있는데, 모든 시각예술을 공간 예술로 분류한다면 모든 청각예술과 언어예술은 시간 예술로 분류할 수 있다.

시간예술에서는 부분이 연속적으로 제시되나, 공간예술에서는 전체가 한꺼번에 제시된다. 공간예술의 경우에도 작품에 대한 감상은 부분을 연속적으로 살핌으로써 가능하지만, 전체가 동시에 주어져 있으며 어떤 부분을 먼저 보는가의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 반면 시간예술의 경우 순서를 바꾸어놓게 되면 작품의 의미가 상실되거나 미학적으로 위기감이 조성될 수 있다. 회화와 문학이 이러한 장르와 관계없이 선행적으로 존재하는 매개요인을 사용하고 있다면, 음악은 그렇지 않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음악에서 망치 소리를 흉내내는 경우, 이는 악기를 통해 내는 무언가 독특한 소리일 뿐 이에 대한 모방이 아니다.

악기에서 나오는 소리는 명백히 일반적인 소음과는 다른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문학이나 시각예술이 실제 세계와 상응 관계를 지닌다면, 음악은 그렇지 않다는 점에서 특이한 예술 장르이다.

언어적 예술과 비언어적 예술

예술에서 무엇보다도 문제되는 변별점은 언어적인가 아닌가에 있다.

문학은 일반적으로 의미가 부여된 일련의 상징 체계로 이루어지며, 언어에 따라서 소리에 각각 다른 의미가 부여되기도 한다. 기호가 다르기 때문에 상이한 언어로 씌어진 문학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언어를 알아야만 한다. 다른 예술의 경우 이와 같은 문제가 따르지 않는다. 예를 들어 형체나 색채, 음조에는 의미가 부여되어 있지 않다. 물론 이 요소들이 예술작품에서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다.

예를 들어 붉은색은 용기를 상징한 것이라는 식의 의미 부여는 가능하다(상징주의). 또한 어떤 색조나 음조가 강렬한 정서적 효과를 가져다준다는 점에서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문제되는 것은 다만 일종의 효과일 따름이다. 바꾸어 말해 색채나 음조에는 고유하게 부여된 의미가 존재하지 않으며, 나름의 정서적 효과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러나 문학의 경우 어떤 어휘나 말의 의미를 안다는 것은 문학의 이해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며, 이로 인해 문학과 그밖의 예술 형태 사이에 존재하는 엄청난 차이를 문제삼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한편 문학은 인습적인 상징 체계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다른 형태의 예술과 달리 번역의 문제가 따른다.

어떤 특정한 언어로 된 문학 작품을 보다 광범위한 독자들에게 읽히고자 하는 경우 번역이 요구되는데, 번역 과정에 원작이 지닌 특성이 상당 부분 상실되고 만다. 특히 시의 번역에서는 '소리', '사전적 의미', '다양한 암시적 의미'와 같은 세 요소가 문제되는데, 번역을 할 때 어느 요소에 무게 중심을 두는가에 따라서 상대적으로 다른 요소들이 희생되는 경향이 있다.

언어적 예술과 비언어적 예술

예술에서 무엇보다도 문제되는 변별점은 언어적인가 아닌가에 있다. 문학은 일반적으로 의미가 부여된 일련의 상징 체계로 이루어지며, 언어에 따라서 소리에 각각 다른 의미가 부여되기도 한다. 기호가 다르기 때문에 상이한 언어로 씌어진 문학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언어를 알아야만 한다.

다른 예술의 경우 이와 같은 문제가 따르지 않는다. 예를 들어 형체나 색채, 음조에는 의미가 부여되어 있지 않다. 물론 이 요소들이 예술작품에서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다. 예를 들어 붉은색은 용기를 상징한 것이라는 식의 의미 부여는 가능하다(→ 상징주의). 또한 어떤 색조나 음조가 강렬한 정서적 효과를 가져다준다는 점에서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문제되는 것은 다만 일종의 효과일 따름이다. 바꾸어 말해 색채나 음조에는 고유하게 부여된 의미가 존재하지 않으며, 나름의 정서적 효과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러나 문학의 경우 어떤 어휘나 말의 의미를 안다는 것은 문학의 이해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며, 이로 인해 문학과 그밖의 예술 형태 사이에 존재하는 엄청난 차이를 문제삼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한편 문학은 인습적인 상징 체계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다른 형태의 예술과 달리 번역의 문제가 따른다. 어떤 특정한 언어로 된 문학 작품을 보다 광범위한 독자들에게 읽히고자 하는 경우 번역이 요구되는데, 번역 과정에 원작이 지닌 특성이 상당 부분 상실되고 만다. 특히 시의 번역에서는 '소리', '사전적 의미', '다양한 암시적 의미'와 같은 세 요소가 문제되는데, 번역을 할 때 어느 요소에 무게 중심을 두는가에 따라서 상대적으로 다른 요소들이 희생되는 경향이 있다.

모방주의 예술론

'예술은 모방'이라는 견해는 최소한 고대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을 정도로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모방론' 또는 '모방주의 예술론'이 오늘날 그렇게 많은 사람들의 호응을 받고 있는 것은 아니나 오랜 세월에 걸쳐 이 입장이 행사해온 영향력에 비추어볼 때, 예술의 기능에 대한 설명으로 이 입장이 지니는 설득력을 쉽게 부정하기란 어렵다. 우선 개념상의 혼란을 막기 위해 다음과 같은 입장 정리가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예술가가 자신의 작품을 통해 인간과 세상사를 '묘사한다'라고 말하지, '모방한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모방이라는 표현은 '다른 예술가의 작품을 모방한다'와 같은 용법으로 쓰일 때 한결 더 자연스럽다. 사람들은 흔히 "이 그림을 통해 예술가는 보리밭을 묘사하고 있는데, 표현 양식의 면에서 보면 빈센트 반 고흐의 작품을 모방한 것이다"라고 말한다. 요컨대 예술 철학자들이 모방론을 논의할 때 그가 실제 문제삼는 것은 '모방'(imitation)이 아니라 '묘사'(representation)이다.

묘사에는 항상 어느 정도 추상화(抽象化)가 뒤따르기 마련이다.

즉 묘사 대상의 특성 중 어떤 부분을 생략하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아무리 사실적인 인물화라고 하더라도 그 인물화는 실제 인물과 거리가 있기 마련이다. 최소한 이와 관련하여, 실제 인물은 3차원적인 존재인 반면, 그림은 2차원적인 것이라는 점에 유의하기 바란다. 그림은 그림일 뿐 실제 존재하는 묘사 대상은 아닌 것이다. 그러나 추상화의 정도는 작품에 따라 다를 수 있으며, 심한 경우 원래의 묘사 대상이 무엇인지를 알아보기 힘들 수도 있다.

그림의 경우 이런 종류의 작품을 '비묘사적(non-representational) 그림' 또는 '추상화'(抽象畵)라고 한다. 인간의 능력이 허락하는 한 최상의 정확한 묘사가 하나의 극점을 이룬다면, 무엇을 묘사했는지 전혀 알아차릴 수가 없는 경우가 반대편의 극점을 이룬다고 할 수 있다. 모든 그림은 양극단 사이의 어느 지점에 속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시각예술과 방식은 다르지만 문학도 묘사적일 수 있다. 문학에서의 묘사는 언어를 통해 이루어지는데, 작가는 대상 또는 사건을 언어로 기술함으로써 묘사 작업을 수행한다. 그러나 모든 문학을 묘사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 어떤 사람의 감정만을 드러내는 시가 1편 있다면 이는 바로 비묘사적인 작품으로 꼽힐 수 있을 것이다. 언어 예술적 요소를 포함하고 있는 연극이나 영화와 같은 혼합예술은 문학과 마찬가지로 묘사적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연극이나 영화는 문학이 지니지 못하는 이점을 지닌다. 언어를 사용하는 이외에 인물과 인물의 행동을 보여줄 수 있기 때문에 보다 더 편리하고 효과적인 묘사가 가능하다. 이들 예술은 언어적일 뿐만 아니라 시각적이며 공간적이면서 동시에 시간적이기 때문에 이중으로 묘사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음악의 경우에도 묘사적이라는 표현이 적용될 수 있을까? 시각적 특성도 언어적 특성도 지니고 있지 않는 음악의 경우, '음조'가 묘사의 수단이 될 수는 없을까? 음악 작품 중 특히 표제음악을 놓고 사람들은 묘사적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그러나 음악에서 묘사란 개념은 결코 합당한 것이라고 할 수 없다. 그 이유는 표제를 제거하고 음악만 남겨놓는 경우, 어디에서도 그 음악이 무언가를 묘사하고 있다는 단서를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무언가를 연상시키는 부분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이를 근거로 주어진 음악이 전체적으로 그 무언가를 묘사하고 있다는 식의 주장을 펴기란 불가능하다. 연속되는 음조의 변화가 무언가를 연상시켜준다고 하더라도, 음악을 이루는 음조가 무언가를 묘사하고 있다고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주장이 지나친 것이라고 하여 이에 반대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풍경을 묘사하는 그림이 있듯이, 파도 소리를 묘사하는 음악도 있지 않은가? 그 예로 클로드 드뷔시의 〈바다 La Mer〉를 제시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문제가 있는데, 곡목이 무엇인지 알려주지 않은 채 〈바다〉를 처음 들려 주는 경우, 거의 아무도 곡목을 추측해내거나 바다를 묘사한 것이라는 점을 알아차리지 못할 것이다.

물론 곡목을 알려줌으로써 음악을 듣는 사람들의 반응을 일정한 방향으로 이끌어갈 수는 있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음조가 바다 소리를 닮았기 때문은 아니다. 우리가 듣는 것은 다만 악기들이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음조일 뿐 바다가 들려주는 소음과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따라서 전자는 후자를 묘사한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드뷔시가 작곡한 또 하나의 표제 음악 〈물에 비치는 그림자 Reflets dans l'eau〉라는 작품을 문제삼는 경우, 이 점은 더욱더 명백해진다. 수중 반사 현상은 아무 소리도, 심지어 소음조차 만들지 못한다. 드뷔시의 음악이 이를 '묘사한 것'이라고 보기는 정말로 어려울 것이다.

묘사와 관련하여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문제삼아야 할 점은 묘사의 본질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 묘사란 현실의 '재생산'이 아니라 현실의 '변형'일 뿐이다. 그렇다면 예술에서 변형은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일까? 어떤 방식으로 대답하든 논란의 여지가 있겠지만, 모든 장르와 모든 양식의 예술작품 또한 개별적 예술작품 하나하나는 나름의 고유한 방식으로 현실을 변형한다는 잠정적인 답변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표현주의 예술론

'예술은 모방'이라는 입장은 오늘날 심각한 도전을 받고 있을 뿐만 아니라, 지난 1세기 이상의 세월에 걸쳐 적어도 몇몇 예술 분야에서 급격히 영향력을 상실해왔다.

모방론을 대신하여 요즈음 주류를 이루는 이론은 '표현론' 혹은 '표현주의 예술론'으로, 예술이란 외적 세계를 반영하는 것이라기보다 예술가의 내적 세계를 반영하는 것이라는 입장이 사람들 사이에 보다 더 설득력을 갖게 된 것이다. '표현'(expression)이라는 말이 지니는 핵심적인 의미는 '내적 상태의 외적 표출'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표현주의 예술론의 기본적 입장은 우선 '예술이란 외재적 존재에 대한 묘사가 아니라 인간의 내적 삶에 대한 표현'으로 정리될 수 있다.

그러나 '표현하다' 또는 '표현'과 같은 용어는 그 자체의 모호성 때문에 다른 뜻으로 사용될 수도 있다. 즉 '표현하다'라는 말은 과정을 나타낼 수도 있으며 과정의 산물 또는 결과를 나타낼 수도 있다. 하나의 예로 "음악은 감정을 표현한다"라는 말에 대해서는 2가지의 해석이 가능하다. 먼저 '작곡가가 곡을 작곡할 때 자신의 감정을 표현한다'의 의미를 지닐 수 있으며, '감상중인 음악이 인간의 감정을 표현한다'의 의미를 지닐 수도 있다.

첫번째 의미에 초점을 맞추는 경우 예술 창작에 관한 이론이 문제되며, 2번째 의미에 초점을 맞추는 경우 창작 과정을 통해 제시된 예술작품의 표현적 특성 및 내용에 관한 이론이 문제된다.

예술작품의 창조는 언어·색채·음조와 같은 매개요인들을 새롭게 조합함으로써 가능해진다. 물론 매개요인들은 예술작품의 경우에서와 같이 독특한 결합 양상을 띠고 있지 않았을 뿐, 예술작품이 존재하기 이전에도 존재하고 있었던 것들이다.

결국 예술작품의 창작이란 기존의 자료들을 새롭게 구성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논리는 예술창작이 아닌 어떠한 곳에도 적용된다. 따라서 표현론자들은 이러한 논리에 덧붙여 예술창작이란 '자기 표현'의 과정, 또는 '감정 표현'의 과정, 나아가서 '이념이나 사상 표현'의 과정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표현주의적 예술관의 근거는 감정 표현이 예술창작의 본령이라는 낭만주의적 예술관에 있다. 아울러 감정 표현으로서의 표현주의 예술론이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의를 지니면서 발전해왔음에도 유의해야 할 것이다.

감정 표현과 관련하여 예술 창작의 과정을 문제삼는 경우,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예술에서의 감정 표현을 통제되지 않은 우발적 감정 표현과 구분해야 한다. 만일 시가 워즈워스의 주장대로 '강력한 감정의 자발적인 분출'이라면, 시란 흘러내리는 눈물이나 뜻을 알 수 없는 중얼거림과 다를 것이 없다. 예술창작의 경우, 표현은 물리적 매개요인, 그것도 예술가의 의지에 저항하는 매개요인과 타협하지 않을 수 없다. 예술가가 자신의 뜻을 굽혀 표현을 위한 일종의 타협점을 모색해야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표현주의를 옹호하는 사람들이 문제삼는 쟁점들 가운데 주목해야 할 것은 '예술가'(artist)와 '기능공'(craftsman)의 작업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이다.

이들에 의하면, 일반적으로 기능공은 무엇인가를 제작할 때 처음부터 어떤 형태와 크기로 만들 것인가, 또한 어떤 목적을 갖는 것으로 제작할 것인가를 염두에 두고 있다는 것이다. 반면 예술가의 작업은 그러한 절차를 통해 이루어지지 않는데, 완성될 때까지 자신의 작품이 어떤 모습을 드러낼 것인가에 대해 말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술가는 표현하는 작업이 완결될 때까지 자신이 무엇을 표현하고 있는가에 대해 알 수 없다"라는 말을 표현론자들은 즐겨 좌우명으로 사용한다.

이러한 주장이 나름대로 타당성을 지니고 있기는 하지만, 반드시 표현주의와 관련된 것인지 단언하기가 어렵다. 예술가와 기능공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는 일반적인 예술 창작론과 관련된 것이며, 반드시 표현론의 입장에서 논의될 성질의 것은 아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문제가 되는 것은, 창작 과정과 관련하여 어떤 방향으로 논의를 전개하든 간에, 확고한 결론에 도달하기란 쉽지 않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먼저 예술가의 창작 과정은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에 어떠한 의미있는 일반화도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며, 현재의 심리학이나 신경학으로는 복잡하고 미묘한 창작 과정 자체에 대해 별다른 것을 밝힐 수 없기 때문이다.

논의는 자연스럽게 '창작 과정'이라는 문제에서 '예술작품의 표현 능력'이라는 문제로 옮겨가지 않을 수 없다. 일반적으로 예술작품은 그 나름의 표현 능력을 지닌 것처럼 이야기된다. 즉 어떤 음조가 슬픈 정조를 띠고 있다거나, 어떤 그림이 차분한 분위기를 갖고 있다는 식의 논의가 이루어진다.

요컨대 우리는 작품 자체가 실제 어떤 특성을 소유하고 있는 것처럼 말한다. 문제는 슬프다든가 차분하다든가의 표현은 사람들에게나 적용되는 것이라는 점에 있다. 엄밀하게 말해 음악이나 그림은 그와 같은 특성을 지니고 있지 않으며, 우리는 다만 은유적으로 그렇게 표현할 수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은유적 표현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예술가가 창작의 과정에 감정을 표현한 것이라고 말하는 대신, 작품이 모종의 감정을 표현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면, 이는 어떤 의미에서 그러한가? 무엇보다도 예술 작품을 감상하는 일은 단순히 무엇인가를 듣거나 보거나 하는 일과는 다르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따라서 예술 감상을 단순한 감각의 자극이라는 측면에서만 논의할 수는 없다. 사람들은 예술작품에서 무엇인가를 '읽어내게' 되며, 이 과정에 인간의 감정·기분·정서에 대응되는 특성이 작품 안에 존재한다고 생각하게 된다. 문제는 어떤 음악이 하필이면 즐겁지 않고 슬픈가 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표현주의자들이 인정하는 이론에 의하면, 어떤 음악이 즐겁지 않고 슬픈 이유는 인간이 슬플 때 느끼는 어떤 특질들이 음악에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즉 정서적 특질들이 주어진 예술작품 자체 안에 구현되어 있다는 것이다. 아마도 이런 논리를 따르게 되면, 예술작품의 표현 능력에 대한 논의는 정당화될 수 있을 것이다(음악이론).

형식주의 예술론

개요

예술의 기능에 대한 모방론과 표현론 이외에, 20세기의 특징적 이론으로 주목을 받는 것이 바로 '형식론' 또는 '형식주의 예술론'이다.

형식론이 지니는 예술철학적 의의는 형식론자들이 무엇에 반대하여 자신들의 이론을 정립하게 되었는가를 확인하는 경우 쉽게 드러난다. 이들은 모방론자들과 표현론자들의 이론에 반대 입장을 취할 뿐만 아니라, 예술을 지식 전달의 수단으로 보는 이론이나 도덕적 정화 및 사회 개량의 수단으로 보는 이론에 대해서도 반대 입장을 취한다. 형식론자들에 의하면, 이들 이론이 상정하는 바의 기능을 예술은 수행할 수 없다는 것이며 이 이론들의 요구대로 예술에게 '엉뚱한' 기능을 수행하도록 강요하는 경우, 예술의 진정한 목적은 훼손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 형식론자들의 주장이다.

'인생을 위한 예술이 아닌,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는 형식론자들의 구호는 이 같은 맥락에서 의미를 갖는다. 즉 예술은 즐기고 감상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일 뿐이며, 예술에 대한 진정한 의미에서의 감상은 다만 선·색채·음조·언어의 복잡하고 미묘한 배열과 조합을 감식하는 가운데 가능하다는 것이다.

물론 이들 매개요인을 이용하여 대상을 묘사하거나 인생의 한 단면을 보여줄 수도 있으며, 인생에서 느끼는 정서를 표현할 수도 있다. 그러나 형식론자들은 이러한 종류의 작업들은 예술 자체의 본원적 목적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주장한다.

대부분의 형식론자들은 특히 시각예술에 주목하는데, 시각예술을 감상하기 위한 필수 조건으로 형태와 색채를 구분해내는 감각, 3차원적 공간 감각을 들고 있다. 이 감각으로 무장하는 경우 시각예술을 감상하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갖춘 셈이 된다는 것이다.

형식론자들에 의하면, 인생이라는 영역에서 이들 감각 이외에 다른 요인들을 끌어들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그 이유는 사람들의 주의가 엉뚱한 데로 쏠릴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예술작품 자체의 미적 특성을 젖혀놓고 이해하기가 한결 쉬운 세속적 측면으로 사람들의 주의를 돌릴 수 있다는 것이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예술작품 감상에 도움이 되지 않는 불필요한 지식을 털어버리고 순수한 시선으로 예술작품에 접근하는 경우, 사람들은 예술작품이 그의 시선에 '직접적으로' 제시하는 바를 볼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음악과 관련해서도 형식론자들은 비슷한 논리를 전개하고 있다.

그들은 올바른 음악 감상을 위해, 표제 음악적 요소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적 감정을 배제할 것을 권고한다. 물론 이때 배제해야 할 감정이란 사랑이나 공포, 슬픔과 같은 세속적인 감정을 말하며, 순수한 형식 자체를 감상하거나 이해하는 데 필요한 감정은 여기에 해당되지 않는다. 한편 문학을 포함하여 언어적 요소가 문제되는 모든 형태의 예술과 관련하여 형식주의적 이론을 정립하기는 쉽지 않다. 실제로 형식론자들은 그들의 이론을 문학에 적용시키는 데 그다지 열의를 보이지 않는다. 그 이유는 문학의 매개요인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 언어이고, 언어적 의미란 다름아닌 인생의 영역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문학은 다만 복합적인 의미를 지닐 때 심오하고 아름다운 것이 되며, 의미를 배제한 소리만을 문제삼는다면 문학이란 대단치 않은 것이 되거나 아예 문학으로 존재할 수조차 없게 된다. 말할 것도 없이 문학도 음악이나 미술과 같이 형식적 특성을 지니며, 경우에 따라 극도로 엄격하고 철저하게 형식적으로 짜여진 문학 작품이 존재한다. 따라서 문학의 경우 형식적 특성만을 문제삼을 수 없다는 한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문학의 형식에 초점을 맞춘 형식주의적 이론이 전개될 수도 있다.

사실상 20세기초 러시아의 문학계를 풍미하던 형식주의 논쟁이나, 20세기 중엽 미국에서 시작된 '신비평 운동'은 형식주의라는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또한 시카고대학교를 중심으로 20세기 중엽에 시작된 문학 연구도 형식주의적 성향을 보이고 있다. 다만 이 경우 러시아의 형식주의나 신비평과 달리 실증주의적이며 역사적인 특성을 지녀 문학의 분야에서도 다양한 형태로 형식주의 이론이 시도되어왔으며, 나름대로 세계를 형성하고 있다.

끝으로 형식론자들이 예술작품의 특성으로 문제삼는 요소들에는 어떤 것이 있는가 살펴보기로 한다.

예술작품에서 확인되는 형식적 특성에 관한 설명은 일찍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 이미 시도된 바 있으며, 보통 다음과 같은 요인들이 주목의 대상이 되고 있다.

유기적 통일성

형식론자들이 예술작품에 대하여 요구하는 통일성은 일상의 사물들에서 확인되는 통일성, 즉 단순한 의미에서의 부분과 부분 사이의 조화로운 집합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들이 의도하는 통일성이란 고등 생명체가 지닌 것과 같은 유기적 통일성으로 부분과 부분이 서로 유기적 관계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어느 한 부분만이라도 제거하는 경우 전체가 제대로 기능을 할 수 없는 상태를 말한다.

복합성 혹은 다양성

유기적 통일성과 짝을 이루는 개념으로 예술작품이란 단조롭고 일률적인 부분들이 모여 형성된 것이 아니라, 극도로 다양하고 복잡한 요소들이 모여 통일체를 이룬 것이라는 가정이 전제되고 있다.

여기에서 '다양성 안의 통일성'과 '통일성 안의 다양성'이라는 평가 기준이 가능하게 된다.

주제와 주제의 변조

작품 안에 존재하는 여러 부분들의 중심이 되는 지배적 요소로 주제는 작품의 부분부분에 따라 상이한 방법으로 변조될 수 있다.

'다양성 안의 통일성'이라는 표현이 바로 여기에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전개

시간예술작품의 경우 여러 요소들이 일정한 순서에 따라 배열되는 것을 의미한다.

순서가 바뀌면 작품 자체의 미학적 완성도가 깨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이 개념은 중시된다.

균형

예술작품의 성공도는 다양한 부분들이 얼마만큼 전체적으로 조화롭게 배열되어 있는가(균형)에 따라 평가될 수도 있다.

일반적으로 대립이나 대조를 통해 균형이 성취될 수 있다.

실용주의 예술론

개요

예술의 기능과 목적에 대한 주장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그러나 예술작품이란 그것이 외적인 것이든 내적인 것이든 무언가의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모든 사람이 의견의 일치를 보이고 있다. 이 점을 염두에 두고, 예술작품 자체의 본질에 대한 논의에서 벗어나 예술작품이 수용자에게 미치는 영향의 측면에서 논의를 계속하기로 한다.

즐거움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예술

예술은 즐거움을 얻기 위한 수단이라는 입장이 있을 수 있다.

이 입장에 서는 사람들에 의하면, 예술은 교훈을 주기도 하고 무엇인가를 묘사하거나 표현할 수도 있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예술작품의 수용자를 즐겁게 하는 일이다. 이들에겐 즐거움을 많이 주면 줄수록 성공적인 예술작품이 된다(쾌락주의). 이와 같은 입장을 수용하는 경우, 겉보기에만 그럴 듯하고 내용이 없는 작품이 최고의 예술작품이라는 식의 잘못된 논리를 유도할 수 있다. 비록 예술적으로 뛰어난 작품들이 결국 보다 큰 즐거움을 주기는 하겠지만, 가치 없는 작품들이 보다 훌륭한 작품으로 오인될 가능성도 있다.

여기에서 즐거움이라는 개념을 단순한 의미에서의 '즐거움'이 아닌 '미학적 즐거움'이라는 뜻으로 받아들이자는 제안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미학적'이라는 개념을 어떤 의미로 사용하는 것이 논리적으로 타당한가 하는 문제가 따르게 된다. 이것 또한 결코 간단한 문제가 아니어서 예술작품을 단지 즐거움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여기는 입장은 쉽게 받아들여지기가 어렵다. 비록 예술이란 수용자에게 즐거움을 주는 것이어야 한다는 주장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겠지만, 즐거움만이 예술작품의 목적이라는 식의 지나친 단순화는 항상 경계해야 할 것이다.

진리 또는 지식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예술

어떤 이론가들은 예술작품의 '인지 기능'(cognitive function)에 초점을 맞추어, 예술은 진리나 지식을 얻기 위한 수단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예술은 인간이 획득할 수 있는 최상의 진리에 도달하기 위한 길을 제공한다는 식의 주장은 결코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다.

이와 같은 주장과 관련하여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제기될 수 있는 문제는 예술을 통해 얻는 지식이 우리가 보통 말하는 의미에서의 지식과 동일한 종류의 것일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즉 예술을 통해 무엇을 얻는다고 하더라도, 이를 과연 지식이라고 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적어도 문학의 경우, 시나 소설 등은 언어로 이루어져 있고, 이로 인해 진위 개념에 따라 판단이 가능한 진술문을 담고 있기 때문에, 지식을 얻기 위한 수단이라는 주장이 적용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여전히 문학적 진술이 역사적 진술이나 과학적 진술과 같이 반드시 진위 개념에 따라 판단할 성질의 것인가의 문제도 제기될 수 있다. 말할 것도 없이 문학적 진술의 옳고 그름을 '사실'(事實)의 관점에서 판단할 수는 없다. 사실과 틀림없이 맞아떨어지는 진술이 반드시 예술적으로 훌륭한 문학 작품을 보장해 주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개연성이라는 개념을 문제삼을 수 있을 것이다. 일찍이 아리스토텔레스는 시가 역사보다 더 진리에 가깝다고 말하면서, 그 이유는 전자는 후자와 달리 보편적 진리를 제공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여기에서 그가 문제삼고 있는 것이 바로 개연성 또는 보편성이라는 개념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개념조차 애매모호한 것이며, 개연성을 지닌 문학 작품이 과연 미학적으로 탁월한 작품인가라는 문제도 제기될 수 있다.

개연성을 확인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이것이 바로 작품의 탁월성을 판가름하는 유일한 준거는 아니라는 점에 유의해야 할 것이며 음악과 같이 장르에 속하는 작품 모두가 진리·지식·개연성 등의 개념과는 전혀 관계없는 경우도 있다는 점도 잊어서는 안 된다. 결론적으로 예술작품을 지식이나 진리를 제공하는 수단으로 여기는 것은 바람직한 입장이라고 할 수 없다.

도덕적 개선을 위한 수단으로서의 예술

하나의 예술작품이 미학적으로 탁월하다고 말하는 것과 도덕적으로 훌륭하다고 말하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이다.

그러나 비록 판단 기준이 다르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양자가 전혀 관계없는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따라서 도덕을 문제삼을 때 다음과 같은 3가지 견해가 제시될 수 있다. 첫째, 도덕주의적 입장에 따르면, 예술의 1차적인 기능은 어떤 체계의 도덕이든 그 도덕에 봉사하는 데 있다. 따라서 어떤 종류든지 도덕적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노력을 보이지 않는 작품이 있다면, 이를 도덕론자들은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거나 존재 가치를 좀체로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도덕주의적 예술론은 주로 어떤 특정 종류의 종교적·정치적 입장이 지배하고 있는 사회에서 그 영향력을 행사하는 다소 소박한 논리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도덕주의가 예술을 지배할 때 잃은 것은 바로 예술 자체인 경우가 흔하고, 위대한 예술은 이념과 신조에 적대적이거나 무관심한 경우가 적지 않다. 대표적인 도덕주의자로는 시가 젊은이들에게 해로운 영향을 미친다고 하여 시인 추방론을 주장했던 플라톤과 그리스도교적 박애주의에 심취했던 톨스토이가 있다. 둘째, 미학주의적 입장은 도덕주의와 정반대의 위치에 서는 입장으로, 예술이 도덕을 전파하기 위한 수단은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도덕이 예술을 위해 봉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예술적 체험은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체험 중 가장 강렬하고 위대한 것이며, 따라서 예술적 체험에 방해가 되는 것은 도덕 또는 다른 어떤 것도 용납할 수 없기 때문이다. 비록 예술에 도덕적으로 바람직하지 못한 측면이 있다고 하더라도, 예술 체험의 강렬성과 중요성에 비추어볼 때 이는 결코 문제가 될 수 없다는 것이 미학주의적 입장에 서는 사람들의 주장이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극단론을 옹호하는 사람은 거의 없으며, 아무리 예술을 신봉하는 사람이라도 예술의 가치가 모든 가치에 우선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비록 예술적 체험이 가장 위대한 인간적 체험이라는 주장을 인정하더라도, 그것이 인간 체험의 전부라고 말할 수는 없다. 이런 맥락에서 미학주의적 입장의 편협성이 지적될 수 있다. 셋째, 도덕주의적 입장과 미학주의적 입장은 모두 일종의 극단론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 극단론 사이에 서서 양자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려는 것이 절충주의적 입장인데, 이들은 예술과 도덕이 서로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으며, 어느 하나도 다른 하나가 없으면 제대로 기능을 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물론 양자 사이의 관계를 정확하게 파악하기란 쉽지 않으나, 최소한 문학의 경우 다음과 같이 단순화시켜 설명할 수 있다. 문학은 인간의 상상력을 자극함으로써 소중한 도덕적 교훈을 깨우쳐줄 수 있으며, 문학이 그러한 도덕적 역할을 할 수 있는 까닭은 바로 예술적 감화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예술 전반에 걸쳐 비슷한 논리를 전개할 수도 있거니와, 날카로우며 섬세하고 유연성이 있는 도덕론은 예술에 기원을 두고 있으며, 예술과 단절될 때 도덕론은 자체의 생명력을 잃게 된다는 것이 절충론자들의 주장으로 예술적 체험이 갖는 강렬성 때문에 인간의 삶에 무한한 영향을 미칠 수 있고, 이로 인해 넓은 의미에서의 인간의 도덕성에 막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