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라신

장 라신

다른 표기 언어 Jean(-Baptiste) Racine 동의어 장바티스트 라신, Jean Baptiste Rac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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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639. 12. 22, 프랑스 라페르테밀롱에서 세례받음
사망 1699. 4. 21, 파리
국적 프랑스

요약 〈브리타니퀴스〉(1669)·〈베레니스〉(1670)·〈바자제〉(1672)·〈페드르〉(1677) 같은 고결한 비극을 발표하여 17세기의 대표적인 극작가로 알려졌다. 라신은 나중에 '고전주의'라고 불리게 된 17세기 프랑스 비극에 최고의 형태를 부여했다.

목차

접기
  1. 개요
  2. 초기생애
  3. 원숙기와 작품
  4. 연극계에서 은퇴
  5. 업적
장 라신(Jean Racine)
장 라신(Jean Racine)

개요

그의 명성은 〈브리타니퀴스 Britannicus〉(1669)·〈베레니스 Bérénice〉(1670)·〈바자제 Bajazet〉(1672)·〈페드르 Phèdre〉(1677) 같은 고결한 비극에 바탕을 두고 있다.

초기생애

파리에서 북동쪽으로 65㎞쯤 떨어진 시골에서 평범한 관리의 아들로 태어난 라신은 1세 때 어머니를 여읜 뒤, 3세 때에는 아버지마저 여의고 고아로 남게 되었다.

그가 9세 때 과부가 된 친할머니는 손자를 데리고 파리 근처의 슈브뢰즈 골짜기에 있는 포르루아얄데샹 수도원으로 갔다. 이곳에서 할머니는 수녀가 되어 이미 수녀가 되어 있던 딸과 여동생, 그리고 수녀원 근처에서 가족과 함께 살고 있던 또다른 여동생인 비타르 부인과 합류했다.

이것은 라신이 처음으로 얻은 행운이었다.

이 공동체 주위에는 유명한 학자들과 계몽된 교사들이 모여 살고 있었다. 이들은 1642년과 1656년에 로마에서 비난받은 가톨릭 신앙의 일파인 얀센주의를 지지하여, 그 종교운동의 영향으로 금욕적인 은둔생활을 하기 위해 시골로 은퇴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잠시 흩어졌을 때, 그중 3명은 라페르테의 비타르 부인 집에서 피난처를 찾았다. 그들이 세운 유명한 '작은 학교'는 10~20명의 소년으로 이루어진 소규모 집단을 주의깊게 가르쳤고, 학생수가 통틀어 50명을 넘는 적이 없었다.

비타르 부인의 친척이라는 이유로 이 학교에서 공짜로 배우게 된 라신은 그들에게서 라틴어 지식과 문학적 취향을 흡수했고, 그당시의 순수한 문필가들 가운데 가장 해박한 그리스어 지식을 얻었다. 그는 또한 원죄와 신의 은총에 대한 그들의 우울한 신학도 일부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보다 먼저 이 학교를 거쳐간 귀족 선배들은 나중에 그의 후원자가 되었다. 1653~54년에 그는 보베로 가서 이 학교와 비슷한 정신을 가진 대학에 다닌 뒤, 포르루아얄로 돌아가 '작은 학교'에서 좀더 공부하였다.

이 학교는 1656년에 왕의 명령으로 폐쇄되었지만, 라신은 그곳에 계속 머물렀다. 그에게는 이 학교가 유일한 집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숲속에서 그리스어를 계속 읽었다고 한다. 또한 그는 약간 시대에 뒤떨어진 그리스의 서술적인 운문을 모방하여 미숙하지만 재미있는 〈포르루아얄의 산책길 Prom-enades de Port-Royal〉을 썼다.

파리에서 1년 동안(1658) 법률을 공부한 뒤, 젊은 라신은 륀 공작인 샤를 오노레 달베르의 집사로 일하고 있는 할머니의 조카 니콜라 비타르에게 고용되었다.

1661년 라신의 외가 친척들은 다시 그에게 관심을 갖고 그를 랑그도크 지방에 있는 위제스 성당으로 내려보냈다. 위제스의 주교 총대리를 맡고 있는 외삼촌이 그에게 성직을 얻어줄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약 2년 동안 그곳에서 살면서 아직도 위그노 교도가 지배하고 있는 이 지역의 격렬한 기질과 싸움을 연구하고 기록했지만, 그에 대한 외삼촌의 포부는 당장 눈에 띄는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다시 파리로 돌아온 그는 자신의 취향에 따라 작가 생활을 시작했다.

그가 사귄 문학 친구들 가운데 뛰어난 사람은 우화작가인 장 드 라 퐁텐 뿐이었다.

그당시는 희곡이 성공에 이르는 가장 좋은 길이었지만, 이것은 가톨릭교도들 중에서도 가장 앞장서서 무대를 비난하고 그것과 관련한 모든 것을 비난하는 얀센주의자인 자신의 친척과 스승들을 무시하는 행위였다. 1663년에 그는 개심하지 않는 한 포르루아얄에 발을 들여놓지 말라는 통고를 받았다.

1666년 자신의 희곡이 처음으로 성공을 거둔 후에 그는 소설가나 극작가는 공적인 죄인이라는 글(라신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음)을 써서 발표한 옛 스승 피에르 니콜에게 익명으로 멋진 공개 편지 〈'상상의 이단자'를 쓴 사람에게 보내는 편지 Lettre à l'auteur des 'Hérésies imaginaires'〉를 보내어 통렬하게 반격했다.

원숙기와 작품

라신이 점점 더 많은 성공을 거두며 시인이자 극작가로 활발하게 활동한 것은 1664~77년으로, 이 시기는 루이 14세가 친정을 베풂으로써 프랑스가 영화를 누리던 시기와 일치한다.

라신은 위제스에 가기 전에도 왕의 결혼(1660)을 축하하는 송가를 발표하여 약간의 주목을 끌었다. 그는 왕의 홍역(1663)에 대한 또 1편의 송가를 써서 약간의 하사금을 받았는데, 이것은 그후 수없이 받은 상금의 시작이었다. 남부에서 유배자 같은 생활을 하고 있을 때 쓴 편지들은 퇴짜맞은 1편의 희곡과 중도에 포기한 또 1편의 희곡(3번째 희곡도 있었을지 모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파리로 돌아온 라신은 위대한 희극 시인이자 배우 겸 감독인 몰리에르를 만났는데, 몰리에르는 라신의 첫번째 비극인 〈테바이드 : 적의 형제들 La Thébaïde ou les frères ennemis〉을 받아들여(어쩌면 주문했을지도 모름) 1664년에 상연했지만 대단한 성공은 거두지 못했다. 〈테바이드〉가 우울한 분위기와 격렬함에서 고풍스러운 맛을 풍겼듯이, 이듬해에 쓴 〈알렉상드르 Alexandre〉는 사랑과 명예라는 주제를 사용한 것 자체가 피상적이었고 지나치게 유행을 의식한 것이었다.

〈알렉상드르〉는 그런대로 성공을 거두었지만 라신은 비교적 자연주의적인 몰리에르의 연기방식에 불만을 품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그는 당시 파리에 있던 3개의 상설극장 가운데 가장 오래된 부르고뉴 극장에 몰래 대본을 가져갔고, 이 극장은 몰리에르가 6번째 공연을 하고 있을 때 실제로 그 대본을 무대에 올렸다. 몰리에르는 화가 나서 라신과 절교했고, 라신은 나머지 상업적 희곡을 모두 부르고뉴 극장에 주었다.

몰리에르 극단의 인기 여배우 뒤 파르크는 라신을 따랐고 그의 애인이 되었다. 뒤 파르크는 〈앙드로마크 Andromaque〉(1667 초연)에서 주역을 맡았는데, 라신은 이 연극에서 자신의 진가를 가장 정당하게 평가받을 수 있는 주제(그의 유일한 주제는 아니지만)가 무엇인지를 발견했다.

그것은 바로 정념적인 사랑의 맹목성과 비극적인 어리석음이라는 주제였다. 이 희곡은 시로서는 다른 어떤 경쟁작품보다도 훨씬 우수했다. 극적인 짜임새가 갖는 교묘한 효율성에서는 다른 작품의 본보기가 되었고 지나칠 만큼 빈틈이 없었다. 때로는 반영웅적인 도덕적 사실주의 때문에 이상주의적인 연애소설의 전통에 심취해 있는 사람들을 당황하게 했지만, 비판적인 트집에도 불구하고 이 연극은 선풍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이어서 라신의 유일한 희극인 3막극 〈소송광들 Les Plaideurs〉(1668)이 발표되었다.

아리스토파네스의 〈말벌〉을 재치있게 각색한 이 희곡은 원작과는 사뭇 동떨어진 것이라 그당시 사람들 중 누구도 이 작품이 아리스토파네스를 차용했다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어서 모두 로마 제국을 무대로 한 우울한 작품 〈브리타니퀴스〉와 감동적인 〈베레니스〉가 발표되었다. 첫번째 희곡은 나이 든 연극광들의 쇠퇴하는 우상인 피에르 코르네유와 공공연한 불화를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고, 첫날 밤 공연을 본 코르네유는 라신에 대한 적개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베레니스〉는 이것과 거의 동시에 상연된 코르네유의 희곡과 똑같은 역사적 사건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이런 경쟁은 지극히 정상적이었다. 라신의 〈테바이드〉는 부르고뉴 극장이 상연한 비극에 대한 반격으로 보이며, 〈이피제니 Iphigénie〉·〈페드르〉는 같은 제목과 주제를 가진 경쟁 작품들을 만나게 되었다.

원문으로 판단하건대, 두 극작가는 상대편이 무엇을 쓰고 있는가를 서로, 또는 일방적으로 조금은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코르네유의 희곡도 실패작은 아니었지만 이번에도 라신의 희곡이 승리를 거두었다. 라신은 일부러 경쟁자와 자신의 작품을 대비시킴으로써 경쟁자의 약점을 폭로했다. 당시 코르네유의 약점은 모든 줄거리에 다양한 주제와 관심사를 복잡하게 짜넣는 데 있었다. 그 점은 〈브리타니퀴스〉·〈베레니스〉의 서문에 정확하게 지적되어 있었다.

'줄거리의 단순함'에 대한 이런 옹호가 라신의 전부는 아니었다.

그는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는 작업을 멈추지 않았고, 거의 동시대의 터키 역사에서 주제를 선택한 다음 작품 〈바자제〉가 음모와 위험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은 그런 끊임없는 노력의 결과였다. 〈미트리다트 Mithridate〉(1673)에서는 아시아의 늙은 전제 군주와 그리스의 여주인공이 대결한다. 1674년 베르사유에서 왕실 야유회가 열렸을 때 야외무대에서 초연된 〈이피제니〉는 그리스 시인 에우리피데스가 쓴 〈아울리스의 이피게네아〉를 각색한 것이지만, 줄거리에 사랑이 들어가 있고 행복하게 끝이 난다는 점이 다르다.

〈페드르〉도 역시 에우리피데스의 작품을 차용한 것이지만 그보다 훨씬 더 성공적이었다.

〈이피제니〉는 놀랄 만큼 오랫동안 공연되었고, 35세의 작가를 작가생활의 정점에 올려놓았다. 라신은 이제 문단의 지도자가 되었으며, 강력한 후원을 받고 있었다. 그는 공식 후원을 얻어 1672년 프랑스 문학과 프랑스어를 조정하는 공인기구인 아카데미 프랑세즈의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1674년 그는 명예 자문 귀족인 프랑스 출납관 자리를 얻었다. 1662년에는 빚더미에 올라앉아 있었고 장래의 전망도 전혀 없었던 사람이 1669년부터는 저금을 신중하게 투자하여 돈을 모으면서 작가치고는 유복하게 살고 있었다. 1676년 라신의 작품전집이 나왔는데 원래의 작품 서문에 들어 있던 심술궂고 논쟁적인 구절이 빠진 대신 새로 쓰거나 고쳐 쓴 서문들이 의식적으로 학자풍의 이미지를 이루고 있었다. 〈페드르〉는 파리 무대에 오른 비극들 가운데 가장 심오하고 가장 시적인 마지막 작품이었다.

여주인공은 근친상간적인 정열과 타락에 대한 죄의식으로 괴로워한다. 이 희곡은 라신이 연극과 결정적으로 손을 끊기 전에 나왔기 때문에 흔히 지난날의 잘못을 뉘우치고 젊은 시절의 도덕으로 되돌아가는 저자의 마음을 반영하는 작품으로 여겨진다.

연극계에서 은퇴

〈페드르〉가 초연된 지 8개월 만에 이 위대한 극작가는 상업무대와 완전히 손을 끊고, 신앙심은 깊지만 지성을 갖추지 못한 25세 정도의 젊은 여성(비타르 가문과 인척관계에 있는 여성)과 결혼한 뒤 친구이자 비평가이며 풍자작가인 니콜라 부알로와 함께 국왕의 치세에 대한 공식 역사를 쓰라는 영광스러운 분부를 받아들였다.

라신이 이처럼 갑작스럽게 연극계에서 은퇴한 동기에 대해서는 앞으로도 많은 논란이 있을 것이다.

당시 그의 애인이었던 여배우 샹 메슬레가 그를 배반했기 때문이라는 말도 있다(그 여자는 난잡하기로 유명했음). 〈페드르〉가 잠시 경쟁 희곡의 도전을 받은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라신은 친구 부알로와 함께 상스러운 소네트를 써서 경쟁상대인 극작가 자크 프라동을 지지하는 느베르 공작 필리프 망시니를 비난했다고 의심받는 불쾌한 사건에 말려들기도 했지만, 이런 것은 지나가는 구름에 불과했다. 라신은 나중에 죄많은 방탕한 생활에서 떠났을 뿐이라고 말했고, 그의 전기를 쓴 아들은 근본적인 회심을 은퇴의 유일한 이유로 제시하고 있다.

일부 근대학자들은 라신이 〈페드르〉에서 할 말을 다 해버렸기 때문이라고, 또는 신들이 사악해질 수 있는 세계를 묘사하고 나서 그 세계의 모습에 스스로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암시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의 야심과 안전에 대한 갈망도 그가 은퇴한 이유의 일부라고 생각한다. 그는 많은 것을 희생하고 작가생활을 선택했지만 항상 후원자의 환심을 사려고 애썼으며, 예술은 많은 가치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가 살던 사회에서는 별로 귀중하게 여겨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왕의 총애를 받는 몽테스팡 부인의 영향력을 통해 얻은 새로운 지위(왕의 치세에 대한 공식역사를 쓰는 사료편찬관)는 예기치 않은 영광이었고, 보수도 놀랄 만큼 좋았다.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그것은 거절하기 어려운 자리였고 인간적으로도 아마 거절할 수 없었을 것이다. 무대는 또한 점점 더 종교계의 눈총을 받고 있었고, 〈페드르〉의 작가 자신도 나중에 똑같은 견해를 밝히게 된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글을 쓰는 사람으로 남아 있었다.

그는 이미 최고수준의 문필가(그리고 자신의 명성을 잃지 않으려고 어느 때보다도 신경질적으로 마음을 쓰는 문필가)가 되어 있었다. 그는 자신의 희곡을 계속 수정하여 개정판(1687, 1697)을 냈는데, 책의 형태로 나온 이 희곡들은 무대에 올려졌을 때보다 비난의 여지가 적어 보였다. 그가 죽기 직전에 쓴 유언장에서 말했듯이 '지난 생활의 추문'은 모두 극작가 생활에서 유래했고 극작가 생활과 함께 끝났다. 지금까지 알려진 그의 연애 상대는 그가 배역을 주고 연기를 지도한 2명의 일류 여배우뿐이다.

첫번째 애인인 뒤 파르크와 열렬히 연애했던 것 같다. 이 연애 사건은 뒤 파르크의 죽음으로 끝났는데, 아마도 낙태가 사인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1679~80년에 벌어진 독물사건과 악마숭배자들의 검은 미사를 조사하는 범죄 심리과정에서 평판이 좋지 못한 사람이 뒤 파르크의 죽음을 초래한 혐의로 라신을 고발했는데 이 고발 내용의 사실여부는 끝내 규명되지 않았다(일설에 따르면 뒤 파르크는 그전에 라신의 딸을 낳았지만 어릴 때 죽었다고 함).

1677년부터 라신의 직업과 생활방식은 나무랄 데 없이 훌륭했다.

그의 아내는 두 아들과 딸 다섯을 낳았는데, 딸 하나는 그가 죽기 직전에 수녀가 되었고 또 하나는 그가 죽은 직후에 수녀가 되었다. 그는 엄격하면서도 자애로운 아버지였다.

그는 포르루아얄과 다시 관계를 맺고, 포르루아얄을 돕기 위해 자신의 영향력을 발휘하는 용기를 보여주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속세와 관계를 끊은 것은 아니었다. 그는 왕 가까이에 머물러 있어야 했고, 왕의 역사를 기록하기 위해 수많은 원정에 따라다녔다. 그의 펜은 왕과 몽테스팡 부인의 뜻대로 움직였고, 나중에는 비천한 신분으로 루이 14세의 후궁이 된 맹트농 부인의 뜻대로 움직였다.

그는 사교적 재능이 풍부하여 궁정에서 환영을 받았으며, 그의 출세를 시샘하는 사람들은 그를 위선자라고 비난했다. 새로운 명예가 잇따라 그를 찾아왔다. 1690년에는 왕의 침실에서 시중을 드는 시종이 되었는데, 이것은 출납관보다 확고한 귀족의 칭호로서 2번째로 높은 계급이었다. 게다가 이 칭호는 1693년 왕의 새로운 허가를 받아 세습칭호가 되었다.

지극히 예외적인 일이지만 이 모든 것은 왕이 아무 대가도 받지 않고 공짜로 준 선물이었다. 그러나 그가 1696년에 돈을 주고 산 장관직은 공짜 선물이 아니었다(그가 장관직을 산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음). 그 지위를 사는 데 든 돈과 1698년에 그 지위에 부과된 세금은 그때까지 유복했던 그의 경제사정을 완전히 뒤흔들어놓았고, 결국에는 그가 얻은 사회적 신분을 유지할 여유가 없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라신이 마지막으로 쓴 2편의 희곡 〈에스테르 Esther〉와 〈아탈리 Athalie〉는 맹트농 부인이 가난한 귀족의 딸들을 위해 생시르에 세운 학교에서 공연하려고 주문한 것이었다.

〈에스테르〉(1689)의 서문은 막간에 부르는 노래와 더불어 도덕적으로 유익한 대사를 짜넣는다는 계획이 그리스 연극의 2가지 특징, 즉 합창과 종교적 영감을 되살릴 수 있는 뜻밖의 기회였다는 점을 설명하고 있다(서문에는 언급되지 않았지만 이 희곡이 본보기로 삼은 또 하나의 형식은 오페라였음). 〈에스테르〉는 궁정에서 화려하게 공연되었다.

라신의 초기 희곡이 열정적이고 치밀한 줄거리를 가진 것과 비교해볼 때 다소 동화 같은 요소를 가진 이 3막극은 합창 부분의 시적 표현으로 그 결점을 보완하고 있다. 이유는 확실치 않지만 라신이 살아 있는 동안 1번도 공연되지 않은 〈아탈리〉(1691)는 합창 부분을 포함하여 5막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나머지 희곡의 대부분(또는 전부)과 다르기는 하지만 작품의 질에 있어서는 대등한 것이다. 라신은 18개월 동안 특히 더 엄격한 금욕생활을 보낸 뒤 간종양(어쩌면 암이었을지도 모름)으로 죽었다.

그는 그 자신의 요구에 따라 포르루아얄의 묘지에 묻혔다. 포르루아얄이 칙령으로 파괴되자(1710) 그의 유해는 생테티엔뒤몽 묘지로 이장되었다.

업적

라신은 나중에 '고전주의'라고 불리게 된 17세기 프랑스 비극에 최고의 형태를 부여했다.

그는 어떤 장르에서나 가장 위대한 프랑스 시인이었고, 오늘날에는 비극의 진정한 음조(그것이 어떻게 정의되든 간에)를 정확히 표현한 프랑스의 유일한 극작가로 간주된다. 그는 또한 지위도 돈도 없이 태어나 궁정 신하가 되고 귀족이 되었으며, 재산과 영향력을 가진 사람으로 세상을 떠난 최초의 프랑스 작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