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희

황희

[ 黃喜 ]

시대 조선
출생 - 사망 1363년(공민왕 12년) ~ 1452년(문종 2년)
본관 장수(長水)
이명 : 구부(懼夫)
: 방촌(庬村)
초명 : 수로(壽老)
직업 문신

조선 초기 문신. 자는 구부(懼夫), 호는 방촌(庬村), 초명은 수로(壽老), 본관은 장수(長水), 개성 출생.

1389년(공양왕 1) 문과에 급제하고 90년에 학록에 임명되었다. 92년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에 은거하다 94년(태조 3), 조정의 요청과 두문동 동료들의 천거로 성균관 학관에 임명되면서 세자우정자(世子右正字)를 겸했다. 정종대에 언관으로서 여러 차례 파직되었다가 1401년(태종 1) 태종에게 천거되어 경력에 발탁되었다. 이후 형조·병조·예조·이조판서를 거쳐 18년 판한성부사가 되었는데, 이해 세자폐출의 불가함을 간하다가 태종의 진노를 사 교하(交河)에 유배되었다. 세종의 치세가 진행되면서 상왕인 태종의 노여움도 풀려, 22년(세종 4) 직첩과 을 환급받고 참찬으로 복직되었다.

31년 영의정부사에 오른 뒤 49년 물러나기까지 국정을 총괄했으며, 물러난 뒤에도 중대사는 세종의 자문에 응하는 등 영향력을 발휘했다. 세종의 신임을 배경으로 세종성세를 이루는 데 이바지하여 조선왕조를 통해 가장 명망있는 재상으로 일컬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