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비파

당비파

[ 唐琵琶 ]

요약 조선시대 당악기(唐樂器)의 하나. 일명 사현비파(四絃琵琶)·곡경비파(曲頸琵琶).

사부(絲部)와 현명악기(絃鳴樂器, chordophone)에 드는 당비파는 향비파(鄕琵琶)와 함께 쌍벽을 이루는 류트(lute) 계열 현악기다. 당비파를 사현비파 또는 곡경비파라고 한 까닭은 다섯 줄짜리의 향비파인 오현비파 또는 곧은 목을 가진 향비파인 직경비파(直頸琵琶)와 구분하기 위해서 붙여진 악기명이다.

당비파가 향비파와 함께 신라 사회에서 널리 연주된 사실은 673년(문무왕 13) 계유명아미타불삼존석상(癸酉銘阿彌陀佛三尊石像), 682년(신문왕 2) 감은사(感恩寺) 청동제사리기(靑銅製舍利器), 725년(성덕왕 24) 상원사범종(上院寺梵鍾), 그리고 904년(효소왕 8) 봉암사(鳳巖寺)의 지증대사적조탑(智證大師寂照塔)에 나온다.

감은사 청동제사리기와 그 사리기에 조각된 네 주악상(횡적·요고·당비파·동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감은사 청동제사리기와 그 사리기에 조각된 네 주악상(횡적·요고·당비파·동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당비파의 명칭은 『고려사』 권80의 「식화지」(食貨志)에 처음으로 나왔다. 그 「식화지」에 1076년(문종 30) 당비파업사(唐琵琶業師) 1명이 대악관현방(大樂管絃房)에 소속되어 있었다고 적혀 있다. 『고려사』 권71(「악지」)에는 4현의 비파가 방향(方響)·퉁소(洞簫)·[당]적(唐笛)·당피리(唐觱篥)·아쟁(牙箏)·대쟁(大箏)·장고(杖鼓)·교방고(敎坊鼓)·박(拍), 이상 9종과 함께 당악조(唐樂條)에 나온다. 당시에 당비파를 사현비파라고 부른 이유는 『고려사』 권71(「악지」)의 당악조에 나오기 때문이다. 또한 당비파는 경북대박물관 소장 보물 제258호의 석조부도(石造浮屠)에 부조(浮彫)되었다.

『세종실록』 권132에 보이는 당비파는 세종(1418~1450) 때 당악(唐樂) 이외 향악(鄕樂) 연주 때에 거문고·가야금과 함께 사용됐다. 성종(1469~1494) 때에는 향악과 당악에 모두 연주됐음을 『악학궤범』(樂學軌範 1493) 권7에 나오는 당악의 상조(上調)와 하조(下調) 및 향악의 평조(平調)와 계면조(界面調)를 위한 당비파의 산형(散形)이 증명하고 있다.

봉암사의 지증대사적조탑에 부조된 주악상(생·횡적·비파·동발·피리·박)(『한국악기대관』)

봉암사의 지증대사적조탑에 부조된 주악상(생·횡적·비파·동발·피리·박)(『한국악기대관』)

조선초기 당비파의 몸통 길이는 2척 4촌이 조금 넘고, 넓이는 1척 4촌이며, 목의 길이는 7촌 2푼이어서 총 길이가 약 90㎝가량이었다. 몸통의 모양은 물방울이 떨어질 때 모양과 비슷하고, 목 부분이 ㄱ자형으로 굽었으며, 굽은 목에 네 개의 주아(周兒)가 좌우로 꼽혔다. 몸통 뒤에는 악기를 멜 수 있도록 달아 놓은 담조아(擔條兒)라는 끈이 달렸다. 목 부분의 앞에 네 개의 주아가 볼록 튀어나왔고, 몸통의 앞에 여덟 개의 주(柱)가 붙었으며, 총 12개의 주 위로 자현·중현·대현·무현, 이상 네 줄이 상하로 매어져 있다.

『악학궤범』 권7 소재의 당비파

『악학궤범』 권7 소재의 당비파

성종 당시 음악을 배우려는 사람은 당비파를 먼저 배워야 한다고 성현(成俔)은 그의 『용재총화』(慵齋叢話) 권1에서 밝혔다. 또한 당시 당비파의 명수는 전악 송태평(宋太平)과 송전수(宋田守)·도선길(都善吉)이라고 『용재총화』 권1에 언급하였다. 조선초기 당비파의 이런 전통이 궁중 밖의 풍류방에서 전승됐음은 안상이 지은 『금합자보』(琴合字譜 1572) 소재 당비파보(唐琵琶譜)에서 확인된다.

성종 때 당비파(唐琵琶)의 조현법(調絃法)

성종 때 당비파(唐琵琶)의 조현법(調絃法)
구분 악조
당악 향악
상조(上調) 하조(下調) 평조 계면조
줄 이름 자현(子絃)

임종(林鍾)

임종(林鍾)

치(徵)

치(徵)

중현(中絃)

탁임(濁林)

탁임(濁林)

궁(宮)

궁(宮)

대현(大絃)

협종(夾鍾)

태주(太簇)

궁(宮)

궁(宮)

무현(武絃)

탁무(濁無)

탁남(濁南)

탁치(濁徵)

탁치(濁徵)

당비파의 몸통 뒷면의 재목으로 화리(華梨)가 제일 좋지만 철양(鐵楊)·황상(黃桑)·산유자(山柚子)·괴목(槐木)·산행(山杏)·박달(朴達)처럼 단단하고 빛깔 좋은 나무가 쓰인다. 몸통 앞면의 재목으로는 두충(杜沖)이 제일 좋으나, 노목(盧木)이나 아목(牙木)처럼 부드럽고 결이 곧은 나무도 좋다. 머리·목·장식에 쓰이는 재료는 화리·오매(烏梅)·탄시(炭柿)·산유자처럼 단단한 나무들이다. 주(柱)는 반죽(斑竹)으로 만들고, 둘러메는 고리는 은(銀)이나 주석(朱錫)으로 만들며, 둘러메는 줄인 담조아는 홍진사(紅眞絲)를 쓴다.

무현(武絃)이 제일 굵고, 대현(大絃)과 중현(中絃)이 그 다음으로 굵으며, 자현(子絃)이 제일가는데, 모두 명주실을 꼬아서 만든다. 오늘날 서양악기 기타 주자가 악기를 잡는 방법처럼 당비파 연주자는 왼손의 모지로 악기의 목 부분을 꼭 잡고서, 식지(食指)·장지(長指)·무명지(無名指)·소지(小指)로 괘(棵)나 주(柱)를 짚었다. 연주자는 악기의 목 부분을 왼손으로 잡고서 오른 손가락의 가조각(假爪角) 또는 발목(撥木)으로 줄을 뜯어서 소리를 냈다. 줄을 안으로 뜯을 때 연주자는 식지와 장지만을 사용했지만, 줄을 밖으로 튕길 적에는 식지·장지·무명지를 동시에 사용했다.

주의 사용은 향악과 당악의 경우에 서로 달랐다. 즉 당악 연주 때에는 오직 목 부분에 붙은 네 개의 주만이 사용됐지만, 향악을 연주할 경우에는 목과 몸통에 붙은 주가 모두 사용되었다. 다시 말해서 평조로 된 곡을 연주할 때에는 제3주에서 제11주까지 아홉 개의 주가 사용됐고, 계면조의 곡에서는 제2주에서 제11주까지 열 개의 주가 사용됐다.

조선시대 당비파의 전통은 일제강점기 이왕직아악부(李王職雅樂部)로 전승됐지만, 광복 후에는 국립국악원에 전승되지 않아 현재 당비파의 명맥은 끊어졌다. 향비파에 비해서 당비파의 특이점은 줄이 4현이고 목 부분이 곡경이라는 점 외에도 연주 때 발목이나 가조각을 사용하는 점, 당악 연주 때 12개의 주(柱) 중에 목 부분의 네 개만이 사용되는 점, 그리고 악기를 서양의 기타처럼 메고 연주할 수 있도록 만든 일종의 멜빵인 담조아가 달렸다는 점이다.

참고문헌

  • 『한국음악용어론』 송방송, 권2.570~72쪽
  • 『증보한국음악통사』 송방송, 서울: 민속원, 2007년, 56, 93~94, 156, 177, 281, 300쪽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송방송, 119~23쪽
  • 『악학궤범용어총람』 송방송, 서울: 보고사, 2010년, 82~8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