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재총화

용재총화

[ 慵齋叢話 ]

요약 성현(成俔 1439~1504)의 문집.

(1469~1494) 때 예조판서로 『』(樂學軌範 1493) 편찬의 주역을 맡은 성현이 당시 음악·문화·시·회화·인물평·사화(史話) 등의 글을 모은 수필집이 『용재총화』이다. 권1에는 당시 음악계의 여러 인물에 대한 이야기가 전하므로 많이 인용되고 있다. 1934년에 출간된 『대동야승』(大東野乘)에 『용재총화』가 포함됐고, 그 후 번역판이 간행됐다. 다음은 권1 소재 당시 음악인 및 (李亇知)·(宋田守)·(黃孝誠)에 관한 기록이다.

"에는 전악 송태평과 그의 아들 송전수·(都善吉)을, 에는 향비파에도 능한 송전수·(金臣番)을 들었다. 명수로는 세종대왕에게 알려지게 되어 궁중에 출입했던 맹인 연주가 (李班), 성현이 어린 시절 그의 연주를 듣고 거문고 소리를 흠모하게 됐다는 (金自麗), 성현의 거문고 스승이 된 이마지가 있었고, 북의 명수로는 전악 (金福), 그리고 김복보다 더 북을 잘쳐서 당시 제일의 북쟁이로 알려졌다는 악공 (鄭玉京), (上林春) 등이 있었다. 명수로는 (黃貴存)이 있다고 했으나, 성현 자신은 그의 연주소리를 듣지 못했다고 했다. 또 (金卜山)이 타는 가야금 소리는 질박하다고 평가하였다. 의 명수로 (金都致)라는 사람이 있는데 나이가 여든을 넘었어도 소리가 약하지 않았다고 평가했다. (金小材)란 사람이 있었다고 하는데 역시 아쟁을 탔지만 일본에서 죽었다고 하였다." ···

"악(樂) 가운데 거문고는 가장 좋은 것이며, 악을 배우는 문호(門戶)이다. 이반(李班)이라는 장님이 있었다. 세종(世宗 1418~1450)에게 알려져 궁중에 드나들었다. 김자려(金自麗)라는 자도 또한 거문고를 잘 탔다. 내가 어렸을 적에 그 소리를 듣고 흠모하였지만 지법을 배우지는 못했다. 지금 영인(伶人)들의 악에 비하면 고태(古態)를 면치 못했다. 영인 (金大丁)·이마지·(權美)·(張春)은 모두 한 시대의 사람들이다. 당시에 논하는 사람이 말하기를, '김대정의 간엄(簡嚴)한 것과 이마지의 오묘한 것이 각각 극에 이르렀다'고 하였다. 그러나 김대정은 일찍이 주살(誅殺)당하여, 그 소리를 듣지 못하였다. 권미와 장춘은 모두 평범한 솜씨였고, 이마지만이 사림(士林)의 사랑을 받았으며, 임금의 사랑을 입어 두 번이나 전악(典樂)이 되었다.

내가 일찍이 (鄭希亮)·(伯仁)·(子安)·(許琛)·진(珍)·(而毅)·(蔡壽)와 함께 이마지에게 가서 거문고를 배웠으므로 날마다 만나고, 어떤 때는 같이 자기도 하여 매우 익숙히 들었다." "향비파도 또한 당비파를 본받아 만들었으므로, 그 설괘(設掛)가 거문고와 같다. 그런데 배우는 사람이 줄을 고르고 채[撥]를 퉁기는 것을 어렵게 여기니, 잘 타지 못하면 들을 수가 없다. 예전에는 전악 송태평이 잘 탔는데, 그에게서 타는 법을 배운 아들 송전수는 더욱 절묘하였다. 내가 어렸을 적에 맏형 성임(成任) 댁에서 그 소리를 들었을 때, 마고(麻姑)가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것 같아 잇달아 듣고 싶었으며 싫증이 나지 않았다. 그러나 도선길에 비하면 미치지 못했다. 송전수 이후로는 오직 도선길이 송태평에 가까웠을 뿐, 그 밖의 사람들은 미치지 못했으며, 지금도 제대로 하는 사람이 없다. 당비파에선 역시 송전수의 솜씨가 으뜸이다. 도선길이 그와 더불어 이름을 가지런히 하였다. 요즘은 능숙한 영인(伶人)이 많은데, 사서인(士庶人)은 악(樂)을 배울 때에 반드시 비파를 먼저 한다." ···

"내가 악(樂)을 하는 데는 세 가지가 있다. 5음 12율의 근본을 알아서 이것을 활용해야 하고, 절주(節奏)의 완급(緩急)을 알아서 보(譜)를 만들어야 하며, 타고난 자질이 오묘하여 손길이 정(精)해야 한다. 황효성은 근본을 깨닫고 잘 활용할 뿐만 아니라, 완급을 알고 보(譜)를 많이 지어 세조에게 알려져 관직이 어모장군(禦侮將軍)에까지 이르렀다고 전한다"라고.

참고문헌

  • 『한국음악용어론』 송방송, 권4.1639쪽
  • 『옛 음악인 이야기』 宋芝媛, 서울: 태학사, 2009년, 210~12쪽
  • 『樂人列傳』 허경진, 서울: 한길사, 2005년, 224~25, 348~58, 44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