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비파

향비파

[ 鄕琵琶 ]

요약 향악기(鄕樂器)의 하나. 일명 오현(五絃)·오현비파(琵琶)·직경비파(直頸琵琶)·구자비파(龜玆琵琶).
향비파 본문 이미지 1

사부(絲部) 또는 현명악기(絃鳴樂器, chordophone)에 드는 향비파는 다섯 줄로 된 비파의 일종이다. 『북사』(北史) 권94(「東夷傳」) 및 『수서』(隋書) 권15(「音樂志」)와 권81(「東夷傳」)에 의하면, 오현 곧 향비파는 고구려 현악기의 하나이다. 장천(長川)1호분에 보이는 오현은 서역(西域)에서 구자(龜玆)나 안국(安國) 등을 통해 고구려에 전해졌다고 추정된다.

고구려의 멸망 이후 신라에 수용된 오현은 통일신라 이후 가야금거문고와 함께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현악기로 꼽힌다. 가야고 및 거문고와 함께 신라 삼현(三絃)의 하나인 향비파는 『삼국사기』 「악지」(樂志)에 나온다. 이 악지에서 김부식(金富軾)은 누가 향비파를 만들었는지 모른다고 서술했다. 그렇지만 신라의 향비파는 고구려의 오현 곧 오현비파를 삼국통일 이후에 수용한 현악기 중의 하나이다. 당시 당나라에서 들어온 비파인 당비파(唐琵琶)와 명칭상 구분하기 위해서 향비파라고 명명했다. 『삼국사기』 「악지」에 의하면, 당시 향비파에서 사용된 악조(樂調)는 궁조(宮調)·칠현조(七賢調)·봉황조(鳳凰調)였고, 212곡의 향비파곡이 당시에 있었다.

고려사』 권71(「악지」)에 의하면, 1076년(문종 30) 향비파의 악사(樂師)와 당비파의 악사가 고려의 왕립음악기관인 대악관현방(大樂管絃房)에 있었다. 향비파(5현비파)는 거문고·가야고 등과 함께 속악향악에 사용됐다. 고려 때 향비파는 경북대박물관 소장 보물 제258호의 석조부도(石造浮屠)에 부조(浮彫)되었다.

통일신라 범종의 파편에 부조된 향비파(동국대박물관 소장)

통일신라 범종의 파편에 부조된 향비파(동국대박물관 소장)

조선초기 향비파의 그림은 『세종실록』 권132에 처음으로 나오고, 성종(1469~1494) 때 향비파의 도설은 『악학궤범』(樂學軌範 1493) 권7에 전한다. 성현(成俔)의 『용재총화』(慵齋叢話) 권1에 의하면, 성종 당시 향비파는 궁중 밖에서도 널리 연주됐다.

향비파는 오례의(五禮儀)의 고취·전정헌가종묘(宗廟)·영녕전(永寧殿) 등가(登歌)와 헌가(軒架)에, 성종 때 전정헌가(殿庭軒架)·전정고취 및 종묘·영녕전 등가에, 문소전(文昭殿) 섭행(攝行)·친행(親行)의 전정악(殿庭樂) 및 연은전(延恩殿) 섭행의 전정악에, 그리고 정전예연여기악공배립(正殿禮宴女妓樂工排立) 및 봉래의(鳳來儀)의 초입배열도(初入排列圖) 및 학연화대처용무합설(鶴蓮花臺處容舞合設)의 초입배열도·시종회무도(始終回舞圖)에 배열된 악기의 하나이다.

향비파의 전통은 일제강점기 이왕직아악부(李王職雅樂部)의 거문고 연주자에 의해서 전승됐다. 광복 이후 비파 전공자가 없어짐으로써 그 명맥이 끊어졌다. 『악학궤범』(1493) 시절 향비파 몸통의 전면은 오동나무로, 그리고 뒷면은 참나무로 만들었고, 그 외의 부분품은 거문고와 같은 재료로 제조됐다.

성종 당시 향비파는 다음의 몇 가지 점에서 당비파와 구분됐다. 즉 다섯 줄인 점, 목 부분이 곧은 점, 거문고처럼 술대를 사용한 점, 술대가 닿는 부분을 보호하는 대모(玳瑁)가 몸통에 붙은 점, 그리고 10개의 궤(課)가 몸통과 목 부분에 나란히 배열된 점이다. 악기의 길이는 3척(尺) 3촌(寸) 3푼(分)이고, 몸통의 길이만은 2척이다.

그 복판의 넓이는 9촌 7푼이었다. 향비파의 몸통 모양은 처마에서 땅으로 떨어지려는 순간의 물방울처럼 생겼다.

참고문헌

  • 『한국음악용어론』 송방송, 권6.2414~16쪽
  • 『증보한국음악통사』 송방송, 서울: 민속원, 2007년, 156, 300쪽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송방송, 535쪽
  • 『악학궤범용어총람』 송방송, 서울: 보고사, 2010년, 389~90쪽

참조어

오현(五絃) , 오현비파(五絃琵琶), 직경비파(直頸琵琶), 직경(直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