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왕직아악부

이왕직아악부

[ 李王職雅樂部 ]

요약 일제강점기 조선왕조 왕립음악기관의 후신. 일명 아악부(雅樂部).

1910년(隆熙 4) 대한제국의 멸망 당시 아악대에는 (咸在韻) 이하 189명의 음악인이 있었다.

1913년 아악대를 이왕직아악부로 개칭할 때, 이 189명 중 84명을 해고하고 105명을 남겨 두었다. 또한 (掌樂)을 (雅樂師)로, (典樂)을 (雅樂手長)으로, 그리고 악생(樂生)과 악공(樂工)을 (雅樂手)로 개칭하였다. 1915년 다시 105명 중 48명을 해고하고 57명만을 이왕직아악부에 남겼다. 이 57명은 아악사장 함재운을 비롯해 아악사 2명과 아악수장 8명 및 아악수 47명이었다. 1915년 당시 아악부의 인원 현황은 이러했다.

아악사장: 함재운; 아악사: (明完璧)·(金寗濟); 아악수장: (安德秀)·(李源根)·(姜熙鎭)·함화진(咸和鎭)·(李壽卿)·(崔淳永)·(朴德仁)·(高益三); 아악수: (崔聖浩)·(徐元河)·마성운(馬成雲)·(金興植)·(李奉基)·(朴疇鉉)·(李龍振)·(李永枝)·(權興元)·(李順龍)·(田明善)·(李昌鶴)·(金永琦)·(姜在興)·이창식(李昌植)·(咸在煥)·(李聖昌)·(朴德壽)·(李慶玉)·(韓光雲)·(朴容植)·(金壽天)·(高永在)·(金炯澤)·(金鍾聲)·(朴允根)·(曺尙俊)·(金桂善)·황종순(黃鍾淳)·(韓國鉉)·(金斗鉉)·(朴德俊)·(金永集)·(崔奉哲)·(安興德)·(李德化)·(黃漢俊)·(金予善)·(吳元植)·(高興三)·(黃德俊)·(韓正根)·유의석(劉儀石)·(朴德鉉)·(成載寬)·(徐完吉)·(朴永石).

당시 아악부는 서울 종로구 당주동(唐珠洞) 128번지에 위치한 (奉常寺)의 주고(酒庫)를 청사로 쓰고 있었다. 1919년 아악부는 아악생양성소규정(雅樂生養成所規定)을 제정하고, 1920년 4월 1일 1기생 9명을 모집하였다.

1920년 소집된 아악생(雅樂生) 9명을 3년 동안 교육시켜 졸업 후 (雅樂手補)로 임명하여 아악부에 근무토록 했고, 계속 아악생들을 모집하여 교육시켰다. 아악부의 주된 활동은 아악생의 교육과 전통악곡의 연주였다. 대외활동은 라디오 방송과 정기적으로 (宗廟祭享) 및 문묘제향(文廟祭享) 때 제례악을 연주하는 것이었다.

1921년 일본 궁내성악부(宮內省樂部)의 촉탁으로 재직하던 다나베 히사오(田邊尙雄)가 아악부를 시찰한 후 아악부 청사의 신축과 아악수의 처우개선 및 아악의 보존을 건의하는 보고서를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에 제출했고, 이로 인해 아악부의 사정이 호전됐다.

1922년 관제(官制)의 개정으로 아악사장은 주임대우(奏任待遇)로, 아악사와 아악수장은 판임대우(判任待遇)로, 아악수는 고대우(雇待遇)로, 그리고 아악수보는 용원대우(傭員待遇)로 각각 승격됐다. 1925년 당주동 청사를 종로구 운니동(雲泥洞)으로 옮겨 해방을 맞을 때까지 청사로 사용하였다.

이왕직아악부의 주된 업무는 아악생의 양성 및 궁중음악의 보존과 전승이었다. 대외적 활동은 라디오방송 출연과 정기적으로는 (宗廟祭禮樂)과 (文廟祭禮樂)의 연주였다. 한편 악서 및 악보 편찬사업도 활발했다.

1933년부터 (肄習會)를 통하여 아악수 및 아악수보의 연주기량을 발전시켰다. 이왕직아악부의 전통은 해방 직후 (舊王宮雅樂部)를 거쳐 (國立國樂院)으로 전승됐다.

참고문헌

  • 『한국음악용어론』 송방송, 권4.1767~68쪽
  • 『증보한국음악통사』 송방송, 서울: 민속원, 2007년, 551~52쪽
  • 『文藝總鑑』, 서울: 한국문화예술진흥원, 1976년, 26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