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방

풍류방

[ 風流房 ]

① 조선후기 (歌客)과 (律客)들이 모여서 풍류활동은 전개하던 곳을 풍류방이라고 했다. 가령 영조(1724~1776) 때 시조가단(時調歌壇)의 거두로 『』(靑丘永言)의 저자 (金天澤)과 『』(海東歌謠)의 저자 (金壽長) 등을 중심으로 가객들이 모여 친목을 도모하며 하며 풍류를 즐기기 위한 집단이 (敬亭山歌壇)은 대표적인 풍류방의 하나로 꼽힌다.

가객 중심의 풍류방에서는 가곡·가사·시조를 주로 불렀고, 율객 중심의 풍류방에서는 영산회상 같은 기악합주가 연주됐다. 기악합주를 연주하던 풍류방을 율방(律房)이라고 불렀다. 조선후기 풍류방의 모습을 1884년(헌종 10) 한양거사(漢陽居士)는 그의 "한양가"에서 다음과 같이 읊었다.

"금객(琴客) 가객(歌客) 모였구나/거문고 임종철(林宗哲)이/노래에 양사길(梁四吉)이/계면에 공득이(孔得伊)며/오동복판(梧桐腹板) 거문고는/줄 골라 세워놓고/치장(治粧) 차린 새 양금(洋琴)은/떠난 나비 앉혔구나/생황(笙簧) 퉁소 죽장고(竹杖鼓)며/피리 저 해금(奚琴)이며/새로 가린 큰 장구를/청서피(靑鼠皮) 새 굴레에/홍융사(紅絨紗) 용두머리/단단히 죄어 매고/태극 그린 큰북 가에/쌍룡(雙龍)을 그렸구나/화려한 거문고는/안족(雁足)을 옮겨 놓고/문무현(文武絃) 다스리니/농현(弄絃) 소리 더욱 좋다/한만(閑慢)한 저 다스림/길고 길고 구슬프다/피리는 춤을 받고/해금은 송진 긁고/장고는 굴레 죄어/더덕을 크게 치니/관현의 좋은 소리/심신(心身)이 황홀(恍惚)하다/거상조(擧床調) 내린 후에/소리하는 어린 기생(妓生)/한 손으로 머리 받고/아미(蛾眉)를 반쯤 숙여/우조(羽調)라 계면(界面)이며/소용이(搔聳伊) 편락(編樂)이며/"춘면곡"(春眠曲) "처사가"(處士歌)며/"어부사"(漁父辭) "상사별곡"(相思別曲)/"황계타령"(黃鷄打令) "매화타령"(梅花打令)/잡가 시조 듣기 좋다/춤추는 기생들은/머리에 수건(手巾) 매고/"상영산"(上靈山) 늦은 춤에/"중영산"(中靈山) 춤을 몰아/잔영산 입춤 추니/무산선녀(茂山仙女) 내려온다/배따라기 북춤이며/대무(對舞) 남무(男舞) 다 춘 후에/안 올린 벙가지며/ ··· 운운."

② 일제강점기 (巫樂) 관련자들이 모이던 장소. 일명 율방. 노량진(露梁津)에 있었던 풍류방은 무악인(巫樂人)의 무업(巫業) 관련 문서를 보관한 사무실이었다. 풍류방의 인적 구성은 전악(典樂: 남자 해금잽이)·계대(啓對: 장구잽이)·자비(自備: 여자 징잽이)로 이루어졌다고 아키바 다카시(秋葉隆)와 아카마쓰 지조(赤松智城)의 『朝鮮巫俗の研究』에 나온다.

참고문헌

  • 『한국음악용어론』 송방송, 권6.2297, 2390~92쪽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송방송, 503쪽

참조어

신청(神廳) , 율방(律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