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우일모

구우일모

(아홉 구, 소 우, 한 일, 터럭 모)

[ 九牛一毛 ]

요약 아홉 마리 소 가운데서 뽑은 터럭 하나.
즉 대단히 하찮은 것을 가리킴.

한 마리 소에서 터럭 하나를 뽑아도 알아볼 사람 하나 없을 텐데 하물며 아홉 마리 가운데서 터럭 하나를 뽑는다고요? 당연히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을 만큼 하찮은 일이겠지요. 이 표현은 참으로 안타까운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한 충신의 편지로부터 비롯되었거든요.
《사기》를 집필한 불후의 역사가 사마천은 사실 일찌감치 죽었어야 하는 인물입니다. 왜? 궁형(宮刑)을 당했거든요. 궁형이란 남성의 생식기를 발라내는 형벌로, 선비라면 이런 치욕을 당하기에 앞서 자결하는 것이 관행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사마천은 왜 이런 형벌을 받았고, 왜 수치를 견디며 살아남았을까요?

사마천이 활동하던 시기, 한나라의 가장 큰 걱정거리는 북방의 흉노족이었습니다. 진시황이 만리장성을 축조한 것도 흉노족의 침입을 막기 위한 것이었고, 한나라 건국 후에도 흉노족은 중국의 골칫거리였습니다. 그런 까닭에 한나라는 틈만 나면 흉노족 토벌에 나섰는데, 막상 성공한 경우는 썩 많지 않았습니다. 이 무렵에도 이릉이라는 장수가 흉노 토벌에 나섰습니다. 이릉이 이끄는 군사는 중과부적(衆寡不敵)인 상태에서도 당당히 맞서 싸웠지만 오기로 한 구원군이 끝내 오지 않아 고군분투(孤軍奮鬪) 끝에 크게 패하였고, 이릉 또한 흉노족에게 사로잡히는 몸이 되고 말았습니다. 한편 이 소식이 한나라 조정에 전해지자 한무제(漢武帝)는 이릉 일족을 참형에 처하도록 명하였습니다.
그러나 일찍부터 이릉의 충심과 용맹함을 알고 있던 사마천은 그냥 있을 수 없었습니다. 이릉을 변호하는 대신이 아무도 없는 상황에서 사마천은 홀로 이릉 변호에 나섭니다. 그가 내세운 논리는, 이릉이 후에 흉노족 토벌에 나서기 위해 잠시 동안의 수치를 견디고 있다는 것이었죠. 그러나 무제는 사마천의 간언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오히려 사마천이 반역자를 두둔했다며 무망죄(誣罔罪)로 처벌하고 맙니다. 무망죄는 임금을 속였다는 죄죠. 사실 무제는 사마천의 변호가 자신의 처남 즉 부인의 오빠인 이광리 장군을 폄하하려는 것이라 여겨 큰 벌을 내렸던 것입니다. 이광리 장군은 일찍이 대완 정벌에 나섰으나 별 성과를 거두지 못했지만, 이릉 장군은 혁혁한 공을 세운 바가 있었으니까요. 결국 사마천은 형벌을 받게 되는데, 벌은 허리를 잘리는 것이었습니다. 이때 사마천이 택할 수 있는 방법은 세 가지. 첫째는 허리를 잘리고 죽는 것, 둘째는 50만 전을 바치고 사면 받는 것, 셋째는 궁형을 받고 살아남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대부분의 선비는 첫째를 택하고, 돈이 있는 자는 둘째를 택하였지만 돈이 없던 사마천은 셋째를 택하고 치욕 속에 살아남습니다. 왜일까요?
사마천의 아버지 사마담은 죽으면서 아들에게 유언을 남깁니다. 바로 제대로 된 역사서를 쓰라는 거였죠.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이미 《사기》를 집필 중이던 사마천은 아버지의 유언을 받들고 또한 자신의 뜻을 세우기 위해 죽음보다 더한 치욕을 감수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역사에 길이 이름을 빛내게 되었습니다.

구우일모 본문 이미지 1

그렇다면 구우일모(九牛一毛)와 사마천 사이에는 어떤 연관성이 있을까요?

‘이러한 제가 법에 따라 사형을 받는다 해도 그것은 한낱 아홉 마리 소 중에서 터럭 하나 없어지는 것과 마찬가지일 뿐이니, 저와 같은 존재는 땅강아지나 개미 같은 미물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그리고 세상 사람들 또한 내가 죽는다 할지라도 절개를 위해 죽는다고 생각하기는커녕 오직 나쁜 말 하다가 큰 죄를 지어 어리석게 죽었다고 여길 것입니다.’

사마천이 자신의 친구인 임안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임안 또한 무고한 누명을 쓰고 죽음을 기다리던 사형수였기에 사마천은 솔직하게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었지요. 그래서 이 편지 또한 사마천이 남긴 불후의 작품으로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그럼 사마천은 후에 어떻게 되었을까요? 얼마 후 한무제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사마천의 죄를 사면해 준 다음 복직시켰답니다. 으휴, 불쌍한 사마천!
그런데 이보다 더 하찮은 것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