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주별산대놀이

양주별산대놀이

정의 및 이칭

양주별산대놀이는 경기도 양주시 주내면 유양리에서 전승되어온 가면극으로서, 1964년에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현재 유양리에 전수회관을 두고 있다. 원래 산대놀이는 서울 근교에서 전승되던 가면극으로서, 애오개(아현동)·녹번·구파발·사직골 등에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전하지 않는다. 학자들은 흔히 애오개·사직골 등에 있었던 원래의 산대놀이가면극을 본산대놀이라고 부르고, 본산대놀이로부터 전파된 양주와 송파 등지의 가면극을 별산대놀이라고 부른다.

유래 및 역사

양주별산대놀이의 유래에 대하여, 송석하와 아키바 다카시(秋葉隆)는 애오개본산대놀이의 영향, 조동일 소장의 양주별산대놀이대본(1957년본)에서는 사직골 딱딱이패의 영향, 1930년에 필사된 양주별산대놀이 김지연본의 제보자인 조종순은 구파발본산대놀이의 영향 아래 형성되었다고 한다. 이와 같이 양주별산대놀이의 유래에 대하여는 여러 의견이 제시되었지만, 대체로 19세기 초·중엽에 본산대놀이 계통의 가면극을 본떠 성립되었다는 점에 대해서는 견해가 일치하고 있다.

양주별산대놀이는 음력 3월 3일, 4월 8일(석가탄신일), 5월 5일(단오), 8월 15일(추석), 9월 9일(중양절)과 기우제(祈雨祭) 때 놀았다. 그리고 섣달 그믐날 밤에 관아에서 나례(잡귀를 쫓는 행사)를 거행할 때, 가면을 쓰고 동헌과 관아의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잡귀를 쫓는 의식에 참가하기도 했다.

원래 양주별산대놀이의 공연 장소는 사직골이었다. 사직골에는 토지신과 곡물신에게 제사 지내는 사직당(社稷堂)이 있었는데, 당집 앞의 넓은 마당이 놀이판으로 사용되었다.

양주별산대놀이의 놀이꾼은 원래 관아의 잡역에 종사하던 하층민이었다. 그래서 반주음악을 위해 관아의 악사청에 소속되었던 악사들의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산대놀이나 해서탈춤은 삼현육각 즉 피리·젓대·해금·장구·북 등의 악기로 반주하며, 음악도 전문적인 악사들만이 연주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탈놀이꾼과 악사가 분리되어 있다.

본산대놀이 계통 가면극은 상업이 발달했던 곳에서 공연된 것들이 많다. 본산대놀이 중 가장 유명한 애오개산대놀이의 전승지인 애오개는 서울 3대 시장의 하나인 칠패시장과 인접하고 있으면서, 현방(懸房, 조선 후기 서울 근교의 독점적 푸줏간)이 있던 곳이다. 노량진에도 본산대놀이가 있었다고 하는데, 노량진은 경강(京江) 지역의 나루였다. 별산대놀이의 전승지인 양주와 송파는 18세기경 금난전권(禁難廛權)을 가진 서울의 시전상인(市廛商人)에 대항하는 사상도고(私商都賈)가 서울로 들어가는 물자를 장악하면서 상설 시장을 벌였던 곳이다. 양주에서는 일제강점기에도 난장을 텄을 때 낮에는 줄타기를, 밤에는 양주별산대놀이를 공연했다.

양주별산대놀이는 1929년 9월 경복궁 조선박람회에서 열린 공연을 계기로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매일신보』 1929년 12월 8일자 신문에 의하면 양주별산대놀이패가 이 공연을 끝으로 그 도구 전부를 모두 팔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총독부박물관에서 이를 구입하는 동시에 활동사진으로 촬영하기로 했다고 한다. 이때의 가면들은 현재 서울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활동사진은 아직 소재가 파악되지 않고 있다. 또한 당시 경성제대 조선어문학과의 교수였던 다카하시 도루(高橋亨)는 놀이패의 우두머리인 조종순(趙鍾洵)을 연구실에 초빙하고, 극의 유래·전수·조직 등에 관하여 3일여에 걸쳐 조사하고 대본을 채록했다.

옴중

옴중 양주별산대놀이

가면을 팔고 연희자들이 해산되면서 크게 약화되었던 양주별산대놀이는 1930년대 초에 다시 놀다가 일제강점기 말에 크게 약화된 후 명맥만 유지했다. 1951년 11월 김성대의 후원에 힘입어 김성태는 기억을 더듬어 탈을 복원하고 남은 소수의 인원으로 놀이를 복원했다. 1964년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8명의 연희자가 예능보유자로 인정되고, 사단법인 양주별산대놀이보존회가 결성되면서 새로운 전기를 맞이했다.

내용 및 특성

양주별산대놀이의 내용은 제1과장 상좌춤, 제2과장 상좌·옴중놀이, 제3과장 옴중·먹중놀이, 제4과장 연잎·눈끔적이놀이, 제5과장 염불놀이, 제6과장 침놀이, 제7과장 애사당법고놀이, 제8과장 파계승놀이, 제9과장 신장수놀이, 제10과장 취발이놀이, 제11과장 의막사령놀이, 제12과장 포도부장놀이, 제13과장 신할아비·미얄할미놀이로 구성되어 있다.

제1과장 상좌춤에서 상좌 둘이 나와서 사방을 향해 절을 하고 춤을 추는데, 이는 모두 종교적인 의식으로서의 의미를 갖는다. 과장의 후반부에 이르면 의식적인 춤은 타령조의 깨끼춤으로 바뀌게 되는데, 이는 그간에 수도를 쌓은 상좌가 타락하여 세속적인 놀이판에 자진하여 참여하게 되었음을 행동으로 보여 주는 것이다.

제2과장 옴중과 상좌에서 상좌는 물건을 팔러 다니는 옴중을 만나자, 온갖 세속적인 작태를 무언으로 연출한다. 상좌는 도적놈·불가사리·폭력배·어른 뺨치는 놈 등으로 비유된다. 상좌와 대결하는 옴중 역시 본래는 중이었으나, 행상질이나 하면서 놀이판 주변을 찾아다니는 추한 존재로 등장한다. 그가 쓴 탈에는 전염성이 있는 옴이 잔뜩 올라 있어 보기만 해도 징그럽고 추하다. 한동안 상좌에게 몰리던 옴중은 끝내 상좌를 내쫓고 신명나게 춤을 춘다.

제3과장 옴중과 먹중에서 옴중은 새로 등장하는 먹중에게 자신의 지체를 자랑하려드나, 번번이 망신만 당하고 만다. 옴중을 계속 놀려대는 먹중은 석 삼 년이나 굶은 중으로서, 남의 일수나 월수만 써버릇한 가난하고 염치없는 중이다. 결국 먹중은 옴중을 놀이판에서 몰아낸다.

제4과장 연잎눈끔적이에서 연잎과 눈끔적이가 등장하여, 타락한 중들인 상좌와 옴중, 먹중을 벌한다. 연잎과 눈끔적이는 특이한 차림새를 하고 있다. 연잎은 붉은 얼굴에 이마에는 청색 연잎을 쓰고, 학의 무늬가 그려진 청창의(靑氅衣)를 입고 있다. 눈끔적이의 가면은 적흑색인데, 눈구멍이 크며 속에는 개폐 장치가 되어 있어 눈을 끔적끔적할 수 있다. 호랑이를 그린 장삼을 입고 있다. 이들은 고결한 존재로서, 상좌·옴중·먹중 등 계율을 어긴 파계승들을 쫓아버린다.

제5과장 염불놀이에서 염불놀이는 정상적인 의식으로서의 염불이 아니다. 가령 염불에서 아미타불에 대한 기원을 "나무할미타불, 나무에미타불"이라 해, 남의 부모를 야유하는 언동을 한다. 이밖에도 백구타령·가사·노랫가락 등 세속적인 노래를 불러댄다. 이 과장에 등장하는 먹중들은 모두가 자신의 신분과 처지를 망각하고, 놀이판에 모인 관중들과 함께 어울려 신나게 논다.

제6과장 침놀이는 먹중이 아들·손자·증손자를 데리고 산대놀이 구경을 나왔다가, 이들이 체하자 의원을 불러 침을 맞히는 내용이다.

제7과장 애사당법고놀이는 왜장녀의 딸인 애사당이 나와서 먹중과 함께 법고를 치며 노는 내용이다. 왜장녀라는 말은 본래 몸집이 크고 염치없는 짓을 서슴없이 잘하는 여자를 가리킨다. 이 과장에서도 먹중들은 그들의 신분을 망각한 채, 제금을 치고 꽹과리를 두드리며 행상인의 짓을 벌인다. 땜쟁이의 흉내도 낸다. 이러한 분위기에 왜장녀가 애사당을 데리고 나와 뚜쟁이짓을 벌인다. 돈을 요구하던 애사당은 흥정 금액이 많지 않자 왜장녀를 때리기도 한다. 먹중과 합의가 이루어지자, 애사당은 그의 등에 업히기도 하고 함께 법고를 치면서 놀이판을 벌인다. 돈을 모은 먹중들이 매음녀를 유혹하는 장면을 연출해 보임으로써 타락상을 표현한다.

제8과장 파계승놀이에서 소무의 모습을 보고 첫눈에 반해 버린 노장은 육환장을 집어던지고 접근하나 번번이 거절당한다. 그는 도박판으로 뛰어들어 돈을 딴다. 돈을 움켜쥔 노장을 보자, 소무들은 노장을 받아들인다.

애사당 북놀이

애사당 북놀이 양주별산대놀이

노장과 소무의 춤

노장과 소무의 춤 양주별산대놀이. 1938.5.

노장과 소무들

노장과 소무들 양주별산대놀이

제9과장 신장수놀이에서 신장수는 보자기로 원숭이를 씌우고 등장해 신을 판다. 그러면 노장이 소무들의 신발을 외상으로 산다. 신장수가 원숭이에게 신 값을 받아오는 대신 소무 한 명을 빼오라고 한다. 그러나 원숭이는 소무를 성적으로 희롱한 뒤 그냥 오기 때문에, 신장수는 원숭이와 실랑이를 벌인다.

제10과장 취발이놀이에서 취발이가 등장해 소무를 빼앗으려고 하자, 노장은 옷을 벗어던지고 결사적으로 취발이에게 달려든다. 그러나 결국 노장은 젊고 힘이 있는 취발이에게 패배한다. 지금까지 승승장구 이겨왔던 노장은 취발이에게 소무 한 명을 빼앗기고, 남은 소무와 함께 도망한다. 취발이가 소무를 차지한 후, 소무는 취발이의 아이를 낳는다. 그러면 취발이가 아이에게 글을 가르친다.

제11과장 의막사령놀이는 쇠뚝이가 양반이 거처할 의막(임시 거처)을 정하는 역할을 하므로, 그를 의막사령이라 부른 데서 생겼다. 샌님이 서방님과 도련님 그리고 하인인 말뚝이를 대동하고 놀이판에 등장하여 의막을 정할 것을 명한다. 말뚝이의 친구인 쇠뚝이는 명령을 받고 돼지우리를 임시거처로 정한다. 그래서 양반들은 돼지새끼로 야유를 받을 뿐만 아니라, 그들은 언청이의 모습(첫째양반, 둘째양반)이거나 코와 입이 비뚤어져 있는 모습(종가집도령) 등 비정상적으로 생긴 가면으로 인하여 풍자된다.

제12과장 포도부장놀이에서 샌님과 포도부장이 샌님의 첩인 소무를 사이에 두고 서로 다툰다. 샌님은 늙고 힘없는 무능한 존재로서, 젊고 힘있는 포도부장에게 소무를 빼앗긴다.

제13과장 신할아비·미얄할미놀이는 신할아비와 미얄할미가 놀이판에 나왔다가 미얄할미가 죽게 된다. 그래서 일찍이 집을 떠났던 남매인 도끼와 도끼누이가 모여들어 어머니의 장례(진오귀굿)를 치르는 내용이다.

이상의 양주별산대놀이와 거의 동일한 내용의 산대놀이가 이미 18세기 중엽에 서울에서 공연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강이천(姜彛天, 1769-1801)의 한시 〈남성관희자(南城觀戱子)〉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강이천은 열 살 때인 1778년 남대문 밖에서 꼭두각시놀이와 가면극을 보고, 11년 후인 1789년에 이 한시를 지었다. 이 시에 묘사된 가면극을 통해서 상좌춤과장, 노장과장, 샌님·포도부장과장, 할미과장을 갖춘 가면극이 서울 근교에서 전문적 연희자들에 의해 연행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양주별산대놀이의 놀이꾼은 원래 관아의 잡역에 종사하던 하층민이었다. 그래서 반주음악을 위해 관아의 악사청(樂士廳)에 소속되었던 악사들의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산대놀이나 해서탈춤은 삼현육각 즉 피리·젓대·해금·장구·북 등의 악기로 반주하며, 음악도 전문적인 악사들만이 연주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탈놀이꾼과 악사가 분리되어 있다.

할미가 죽은 후에 모인 신할아비, 도끼, 도끼누이

할미가 죽은 후에 모인 신할아비, 도끼, 도끼누이 양주별산대놀이의 신할아비·미얄할미놀이

양주별산대놀이는 다른 지역의 가면극에 비해서 매우 사실적이다. 양반을 풍자하는 정도에 있어서도 양주별산대놀이는 하회별신굿탈놀이봉산탈춤의 중간쯤에 위치한다. 봉산탈춤에서는 양반들을 직설적으로 공격한다. 이러한 사실성은 가면의 모양에서도 드러난다.

산대놀이 가면은 매우 인간적인 모습이고, 비교적 아기자기하고, 손질이 많이 가해져서 기교적이고 다양하며, 가면의 크기가 대부분 비슷하다. 그러나 야류와 오광대의 가면은 선이 굵고 투박하며, 생김새가 단순하면서도 개성이 강하고, 말뚝이가면은 모두 매우 큰 것이 특징이다. 그리고 산대놀이 가면은 해서탈춤과 마찬가지로 중가면이 많이 등장하고, 야류·오광대에는 중가면이 현격히 적다.

현재 연행되는 양주별산대놀이에 등장하는 인물은 32명이지만, 하나의 탈을 다른 배역에 겸용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사용되는 탈은 22점이다. 첫째상좌(도련님 겸용)·둘째상좌(서방님 겸용)·옴중·먹중(4) ·연잎·눈끔적이·완보·신주부·왜장녀(해산모·도끼누이 겸용)·노장·첫째소무(애사당 겸용)·둘째소무·말뚝이(신장수·도끼 겸용)·샌님·포도부장·신할아비·미얄할미 등이다. 특히 양주별산대놀이의 옛 가면은 1929년 9월 박람회가 개최되었을 때 경복궁에서 양주별산대놀이를 초청하여 공연한 후 경성제국대학에 판 양주별산대놀이 탈이라고 알려진 22점이 현재 서울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양주별산대놀이의 춤은 우아하고 섬세한 중부지방의 무용적 전통을 전형적으로 계승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춤사위가 분화되고 종류도 다양하다. 전반적으로 염불장단의 거드름춤이 발달되었고, 정중동(靜中動)·답지무(踏地舞)·감치고 조이는 손춤사위 등이 특징이다. 염불장단은 비교적 쉬운 약박(6박)을 쓴다. 거드름춤은 그 자체로 끝나지 않고 반드시 깨끼춤을 동반하고 있다. 깨끼춤은 타령장단에 맞추어 춘다. 타령장단은 느린 염불장단보다 적당한 빠르기로 다양한 춤사위로 변화될 수 있는 소지가 많다. 같은 타령장단이라 해도 걷기가 주가 되는 춤을 걸음걸이춤이라 한다. 굿거리장단은 등퇴장이나 길놀이를 할 때 주로 사용되는 장단이다. 빗사위는 양주별산대놀이에서 흥을 돋우기도 하지만, 상대방의 눈을 피해 돌아가는 춤이다. 마치 수탉이 암탉을 홰치는 듯한 모습으로 오른손은 오른쪽 귀 위로 꺾어 올리고, 왼손은 옆으로 벌려 약간 아래쪽으로 내리고, 머리는 상대방이나 판 중앙을 주시하고 무릎을 살짝살짝 굽혔다 폈다 하면서, 원을 돌거나 상대편 자리로 이동하는 춤이다. 거수빗사위는 양주별산대놀이에서 옴중과 노장이 장삼을 휘둘러 앞에 있는 장애물을 헤치면서 걸어가는 춤이다. 오른발을 앞으로 높이 들고, 오른손을 오른쪽 어깨에 얹고 왼팔을 등 뒤로 넓게 돌렸다가, 왼팔을 몸 앞으로 넓게 돌려오면서 오른발을 앞으로 뻗어 내리는 듯하다 옆으로 딛으면서 왼발을 앞으로 들어올린다. 장삼은 어깨에 얹은 채 왼발을 앞으로 들었다가 옆으로 내딛으면서 왼팔을 등 뒤로 넓게 휘두른다. 이상과 같은 춤사위의 세분화와 다양화는 곧 양주별산대놀이의 연극적인 표현의 확장과 심화를 뜻한다.

양주별산대놀이의 탈들

양주별산대놀이의 탈들

역대 명 연희자

초기 주요 연희자 및 전승을 주도한 사람들은 관아의 잡역(雜役)에 종사하던 하급 관속이었다. 19세기 초·중엽의 인물로는 이을축(李乙丑, 노장·가면 제작), 노경무(盧慶茂, 소매·상좌), 류인혁(劉寅爀, 취발이·옴중)이 알려졌고, 19세기 중·후엽 인물로는 신복흥(申福興, 노장·취발이·가면 제작), 고영만(高永萬, 노장), 박광현(朴光鉉, 상좌·말뚝이), 박래원(朴來遠), 김달원(金達元, 옴중)이 알려져 있다. 19세기 후부터 20세기 초까지의 인물로는 윤태균(尹台均, 가면 제작), 이재한(李在漢, 가면 제작), 김성운(金盛運, 왜장녀·가면 제작), 김수안(金壽安, 소매·상좌), 노익조(盧益祚, 샌님), 석성묵(石性黙, 옴중·취발이), 이창유(李昌裕, 왜장녀·목중·샌님·말뚝이·가면 제작), 정한규(鄭漢奎, 신할아비·포도부장), 권봉국(權奉國, 노장), 이윤서(李允西, 취발이) 등이 활약했다.

일제강점기에 활약했던 인물들 중 조종순(趙鍾洵)은 탈놀이의 전과장을 출 수 있는 대표적인 놀이꾼이었는데, 놀이의 공연이 점차 없어지게 되자 탈을 팔기 위해 전전했다고 한다. 그는 양주의 관아가 폐쇄되자 양주를 떠나 서울 근교인 이태원으로 이사하여 어렵게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김성태(金星泰, 1894-1962)는 왜장녀역을 잘했던 김성운(金盛運)과 만신으로 소문났던 무당 사이에서 태어난 놀이꾼으로 노장과 취발이역을 잘했으며, 부친과 이창유(李昌裕)에게서 배꼽춤을 배워 왜장녀역을 하면 관중의 인기를 끌기도 했다. 그는 장구통만한 배를 아무렇게나 내놓고 미친 듯이 날뛰며 춤을 추었는데 매우 익살스러웠다고 한다. 놀이꾼은 아니었으나 가면 제작과 후원자로서 김성대(金成大, 1907-1970) 역시 특이한 존재이다. 1962년 김성태에게서 배운 대로 탈을 만들고 연희본을 충실하게 채록·정리하여 한국전쟁 이후 인멸되어가던 양주별산대놀이를 복원시키는 데 중심 역할을 했다. 그 외에도 권진구(權晋九, 노장), 이건식(李建植, 노장), 나순남(羅順男, 소매), 함준삼(咸俊三, 상좌), 김순봉(金順奉), 박중철(朴重哲, 옴중), 이학선(李學善, 노장), 박기득(朴奇得, 소매·상좌), 박창하(朴昶夏, 목중), 김창흡(金昌洽, 옴중), 이우용(李禹鏞), 박준섭(朴俊燮, 취발이·옴중), 이장손(李長孫, 목중·노장), 박동환(朴東煥, 목중·노장·취발이), 서정주(徐貞柱, 취발이), 함춘길(咸春吉, 장구) 등이 활약했다.

1964년에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될 당시 석거억(石巨億, 1911-1994/ 피리·먹중), 김상용(金相容, 1926-2001/ 먹중·원숭이), 노재영(盧載永, 1932- / 옴중·취발이), 신순봉(申順奉, 1908-1992/ 소무·상쇠잡이), 김성대(金成大, 1907-1970/ 가면 제작), 공재웅(孔在雄, 1914-1971/ 지휘), 김완손(金完孫, 1910-1971/ 해금), 서정주(徐貞柱, 1893-1978/ 취발이), 함춘길(咸春吉, 1915-1975/ 장구), 박상환(朴湘桓, 1891-1971/ 상좌·소무), 지명천(池命千, 1919-1970/ 젓대(大琴)), 박교응(朴敎應, 1912-1982/ 소무), 유경성(柳敬成, 1918-1989/ 소무·가면 제작), 고명달(高明達, 1911-1992/ 노장·눈꿈적이), 김영수(金永洙, 1937-?/ 피리/ 보유자 해제), 박재문(朴載文, 1940-?/ 옴중/ 보유자 해제) 등이 예능보유자로 인정되었다. 그리고 1976년에 이병권(李秉權, 1927-1989/ 상좌), 2002년 김순희(金順姬, 1935- / 해산어멈·소무)가 추가로 예능보유자로 인정되었다. 현재 전수교육조교로는 유경수(柳敬洙, 1960- / 피리·장고), 신해춘(申海春, 1957- / 노장·샌님), 홍상현(洪相賢, 1959- / 옴중·완보), 유한수(柳漢洙, 1947- / 가면 제작·왜장녀), 김순홍(金順弘, 1955- / 소무·애사당), 김정선(金貞善, 1961- / 말뚝이·도끼누이), 석종관(石鐘寬, 1952- / 취발이·신할아비·장고) 등이 있다.

다른 지역의 사례

본산대놀이의 영향을 받은 가면극은 서울과 경기 지역의 송파산대놀이·양주별산대놀이·퇴계원산대놀이, 황해도 지역의 봉산탈춤·강령탈춤·은율탈춤, 경남 지역의 수영야류·동래야류·통영오광대·고성오광대·가산오광대 등이 있으며, 남사당패덧뵈기도 본산대놀이의 영향으로 발생했다.

특히 산대놀이는 서울 및 서울 인근의 경기도에서 전승되던 가면극이다. 원래 애오개(아현동)·녹번·구파발·사직골 등에 산대(山臺)놀이가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전하지 않는다. 대신에 애오개 또는 녹번리의 산대놀이를 배워왔다고 하는 양주별산대놀이와, 구파발본산대 등에서 배워왔다는 송파산대놀이가 현재 전승되고 있다. 최근에는 퇴계원산대놀이도 복원되었다. 학자들은 흔히 애오개·사직골 등에 있었던 원래의 산대놀이를 본산대놀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양주와 송파 등지의 별산대놀이와 구별하기 위한 것이다. (☞ 산대놀이 항목 참조)

한편 마을굿에서 발생하여 발전한 가면극으로는 하회별신굿탈놀이, 강릉관노가면극이 전하며, 이외에 하회의 이웃 마을인 병산별신굿탈놀이와 경북 영양군 주곡동의 가면극 등도 마을굿놀이에서 유래한 가면극이다.

연희본

양주별산대놀이는 1930년 연희본이 학계에 발표된 이후, 다른 지역 가면극에 비해 다양한 채록본이 등장했다. 양주별산대놀이의 대사는 다른 가면극에 비해 욕설, 외설어, 은어가 많은 점이 특징이다. 현재 채록된 양주별산대놀이의 중요 연희본은 다음과 같다.

(1) 〈김지연본〉(『산대도감극각본』, 경성제국대학 조선문학연구실, 1930)
(2) 〈임석재본〉(「양주별산대희」, 『협동』 44·45, 대한금융조합연합회, 1954)
(3) 〈이보라본〉(「양주별산대놀이」, 『현대문학』 46·47·48·49·50·54·55, 현대문학사, 1958.10-1959.1; 1959.6-7)
(4) 〈최상수본〉(「양주산대가면극 극본」, 『한국예술총람 자료편』, 대한민국학술원, 1965)
(5) 〈이두현본〉(「양주별산대놀이 대사」, 『한국가면극』, 문화재관리국, 1969)
(6) 〈김성대본〉(「양주별산대놀이 연희본」, 『한국의 민속극』, 창작과 비평사, 1975)
(7) 〈조동일 소장본〉(「양주산대놀이」(1957년본)-조동일, 『탈춤의 역사와 원리』, 홍성사, 1979에 수록)
(8) 〈서연호본〉(「양주별산대놀이」, 『산대탈놀이』, 열화당, 1987)
(9) 〈양주별산대놀이보존회본〉(양주별산대놀이 보존회, 2002)

(1) 〈김지연본〉은 1930년 3월 17일 경성제국대학 조선문학연구실에서 다카하시 도루(高橋亨) 교수의 지도 하에 작성되었다. 조종순이 구술을 했고, 김지연(金志淵)이 채록했다. 연구실에서는 학부생으로 김재철(金在喆)과 조윤제(趙潤濟) 등이 채록을 도왔다. 이후 이 대본은 전경욱에 의해 주석과 해제 작업이 이루어져 『민속극』(1993)에 실렸다. 구성은 서막(고사)에서부터 제1과정 상좌(上佐) 등장, 제2과정 옴 등장, 제3과정 옴과 묵승 등장, 제4과정 연잎·눈끔적이 등장, 제5과정 팔먹과정, 제6과정 애사당놀이, 제7과정 노장과정, 제8과정 말뚝이과정, 제9과정 취발이과정, 제10과정 샌님과정, 제11과정 신할애비과정 등 전체 11과정으로 되어 있다. 원숭이가 등장하는 대목을 말뚝이과정이라고 표기했다.

(2) 〈임석재본〉은 1929년 겨울 조종순이 구술한 것을 임석재가 채록한 것이다. 당시 경성제국대학 민속학 참고실의 책임자였던 아키바 다카시(秋葉隆)는 조종순을 불러 양주별산대놀이를 조사·연구했는데, 조선어를 못하는 아키바는 당시 경성제국대학을 수료하고 졸업논문을 준비 중이던 임석재에게 통역을 의뢰했고, 이로 인해 임석재는 이 대본을 채록할 수 있었다. 임석재는 1954년 〈양주별산대놀이 대사〉라는 제목으로 『협동』 43·44(대한금융조합연합회, 1954)에 이 연희본을 발표했다.

(3) 〈이보라본〉은 1958년 김성대가 기록했던 대본을 이보라가 정리한 것이다. 1958년에서 1959년에 걸쳐 『현대문학』에 발표되었다.

(4) 〈최상수본〉은 1942년에서 1957년 사이에 박준섭과 김성태의 구술을 최상수가 채록한 것이다. 고사를 시작으로 제1 상좌과장, 제2 옴과장, 제3 먹중과장, 제4 연잎·눈끔적이과장, 제5 팔먹중과장(제1경 염불놀이, 제2경 침놀이, 제3경 북놀이), 제6 노장중과장(제1경 먹중놀음, 제2경 소무놀음, 제3경 원숭이놀음, 제4경 취발이놀음), 제7 샌님과장(제1경 말뚝이놀음, 제2경 포도부장놀이), 제8 신할아비·미얄할미과장 등 총 8과장 9경으로 구성되어 있다.

(5) 〈이두현본〉은 박준섭(朴俊燮)·김성태(金星泰)의 구술을 이두현이 채록한 연희본으로 채록 시기는 1958년 1월이다. 길놀이와 서막고사로 시작해서, 제1과장 상좌춤, 제2과장 옴중과 상좌, 제3과장 먹중과 옴중, 제4과장 연잎과 눈끔적이, 제5과장 팔먹중놀이(제1경 염불놀이, 제2경 침놀이, 제3경 애사당북놀이), 제6과장 노장(제1경 파계승놀이, 제2경, 신장수놀이, 제3경 취발이놀이), 제7과장 샌님(兩班, 제1경 의막사령놀이, 제2경 포도부장놀이, 제8과장 신할아비와 미얄할미) 등 총 8과장 8경으로 구성되어 있다.

(6) 〈김성대본〉은 양주별산대놀이의 후원자이며 연희자였던 김성대가 1968년 직접 구술·채록한 연희본이다. 전체 구성은 제1과정 상좌춤, 제2과정 옴중춤, 제3과정 먹중과 옴중, 제4과정 연잎 눈끔적이 춤, 제5과정 팔먹중춤(제1경 염불놀이, 제2경 침놀이, 제3경 애사당의 법고놀이), 제6과정 노장춤(제1경 파계승놀이(팔먹중놀이), 제2경 말뚝이춤(신장수놀이), 제3경 취발이춤), 제7과정 샌님춤(제1경 의막사령놀이, 제2경 포도부장놀이), 제8과정 신할아비와 미얄할미 등으로 이루어졌다. 원숭이가 등장하는 대목을 말뚝이춤이라 제시하고, 아울러 신장수놀이라고 부연하고 있는 것이 독특하다. 신장수를 말뚝이와 동일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7) 〈조동일소장본〉은 양주의 연희자들이 직접 만들어 사용하던 연희본을 양주 주민인 홍갑표(洪甲杓)가 조동일(趙東一)에게 전한 것이다. 이는 그동안 나온 대본 가운데 가장 충실한 연희본으로 평가된다. 이 연희본은 1957년 양주 현지인이 채록한 것으로 추정된다. 길놀이와 고사로 시작해서 상좌과장, 옴중과장, 묵승과장, 연잎·눈끔적이과장, 팔묵승과장(염불놀이, 침놀이, 애사당의 북놀이 포함), 노장과장, 말뚝이과장, 취발이과장, 샌님과장(포도부장놀이 포함), 신할아비·미얄과장 등 총 10과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원숭이가 등장하는 대목을 말뚝이과장이라 부르고 있으며, 먹중을 묵승(墨僧)이라 표기했다.

(8) 〈서연호본〉은 서연호가 현지조사를 통해 양주별산대놀이의 성립, 놀이의 환경, 놀이패와 놀이꾼, 탈, 기본춤, 놀이의 방식, 연희 내용, 등장인물의 성격 등에 대해 충실한 논의를 진행했다.

(9) 〈양주별산대놀이보존회본〉은 2002년 양주별산대놀이보존회에서 보존회의 공연과 전수생 교육을 목적으로 작성한 것이다. 전체 구성은 제1과장 상좌춤, 제2과장 옴중과 상좌, 제3과장 옴중과 먹중, 제4과장 연잎과 눈끔적이, 제5과장 팔먹중 과장(1경 염불놀이, 2경 침놀이, 3경 애사당 법고놀이), 제6과장 노장 과장(1경 파계승 놀이, 2경 신장수놀이, 3경 취발이놀이), 제7과장 샌님 과장(1경 의막사령놀이, 2경 포도부장놀이), 제8과장 신할이비와 미얄할미, 뒤풀이로 구성되어 있다.

의의

양주별산대놀이는 서울의 본산대놀이를 계승한 가면극으로서 그 유래가 분명하고, 일찍이 1920년대에 학자들의 관심을 끌어 대본도 채록되어 있다. 또한 1929년 조선박람회 당시 연행에 사용되었던 가면들이 현재 서울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당시 상황을 비교적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 본산대놀이 계통 가면극 연구에 있어 양주별산대놀이는 매우 중요하고 핵심적이라 할 수 있다.

양주별산대놀이의 춤은 우아하고 섬세한 중부지방의 무용적 전통을 전형적으로 계승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춤사위가 분화되었고 종류도 다양하다.

참고문헌

  • 서연호, 『산대탈놀이』, 열화당, 1987.
  • 심우성, 『한국의 민속극』, 창작과 비평사, 1975.
  • 양주별산대놀이보존회, 『양주별산대놀이 전수교재』, 2002.
  • 이두현, 『한국의 가면극』, 일지사, 1979.
  • 이보라, 「양주별산대놀이」, 『현대문학』 46·47·48·49·50·54·55, 현대문학사, 1958.
  • 전경욱, 『민속극』,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1993.
  • 전경욱, 『한국의 가면극』, 열화당, 2007.
  • 정형호, 『양주별산대놀이』, 화산문화, 2000.
  • 조동일, 『탈춤의 역사와 원리』, 홍성사, 1979.
  • 최상수, 『산대·성황신제가면극의 연구』, 성문각, 1985.

참조어

고명달, 고영만, 권봉국, 권진구, 김달원, 김상용, 김성운(金盛運), 김성대, 김성태, 김수안, 김순봉, 김순홍, 김순희, 김정선, 김창흡, 나순남, 노경무, 노익조, 노재영, 박광현, 박교응, 박기득, 박동환, 박래원, 박상환, 박준섭, 박중철, 박창하, 서정주, 석거억, 석성묵, 석종관, 신복흥, 신순봉, 신순필, 신해춘, 유경성, 유경수, 유인혁, 유한수, 윤태균, 이건식, 이병권, 이병덕, 이우용, 이윤서, 이을축, 이장손, 이장순, 이재한, 이창유, 이학선, 정한규, 조영자, 조종순, 함준삼, 함춘길, 홍상현